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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Nov 30. 2022

(융) 연금술과 심리학

정신분석 읽기 노트

❋ 아래 내용은 ‘솔’에서 출간된 융 기본저작집 제5권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맨 앞부분에 실린 <연금술의 종교 심리학적 문제 서론>에서 발췌한 것임. 소제목과 내용 중 ( )의 설명은 필자가 임의로 작성함.



무의식적 심혼의 중요성


 인간 심혼은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어둡고 비밀스러운 부분이기에, 그 영역에 대한 배움에는 끝이 없다. 따라서 그에 관한 분석 작업은 모든 겉치레를 넘어서 필연적으로 (의사-환자 간의) 인간적 대결이 될 수밖에 없다. 그 대결은 쉽지 않으며 환자뿐 아니라 의사까지도 마음속 깊이 동요하기에 이른다. 어느 누구든 불이나 독을 만지려면 정도는 해를 입지 않을 수 없다. (분석 과정 중에 있는) 환자는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탐구하며, 의사는 기술과 수법을 동원해 최선을 다해 그를 돕는 것이다. 이 둘의 노력이 추구하는 목표는 감추어져 아직 드러나지 않은 보다 큰 미래적 존재로서의 ‘온전한’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의 전체성을 향한 이러한 길은 곧은길이 아닌 대극을 이어주는 구불구불한, 가장 긴 길이다. 그 길은 또한 미로처럼 너무 혼란스럽게 얽혀있어 그곳에 다가가는 일은 많은 대가를 필요로 한다.


 (동양과 달리) 서양에서는 심혼을 과소평가하며, 그리하여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의 근원이 외부에 놓여있다는 망상을 만들어낸다. 그에 따라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어떻게 어디에서 불행한 일을  만들어내게 되는 더 이상 묻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심혼은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며, 덧없는 의식보다 몇 배나 더 중요하다. 눈(眼)이 태양과 같듯이 심혼은 신과 같다. 우리의 의식은 심혼 전부를 에워싸지 못한다. 심혼은 본성적으로 종교적이며 종교적 기능을 지닌다. 그렇다고 심리학이 새로운 종교적 진리를 만들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종교적 신은 각인에서 유래한 심혼 속의 유형(원형)이다. 심혼의 근원을 알지 못하듯, (심혼 속의) 원형(유형)이 궁극적으로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영웅의 원형이 반드시 영웅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 아니듯, 신의 원형에 대한 발견이 곧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라는 개념의 역설성


 인간 삶의 충만함을 대략이라도 파악하는 것은 역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아무런 모순 없이 명확한 것은  삶에서 일어나는 불가해한 사건들을 표현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인간 심혼에서 발견되는) 원형을 표현하는 확실한 형상 또한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원형(들의 총체)에 자기(Selbst)라는 심리학적 명칭을 부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 개념은 한편으로 인간 전체성의 총개념을 전달하기에 충분히 확실할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전체성의 기술(記述) 불가능성과 확정 불가능성을 표현하기에 충분히 불확실할 것이다.


 인간의 전체성은 한편으로는 의식적 인간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무의식적 인간으로 구성되기에, 자기의 개념 또한 역설적 특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무의식적 인간에 대해 규정할 수도, 그것의 한계를 지적할 수도 없다. 과학적 용어로서의 ‘자기’는 그리스도나 붓다(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형상들의 총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한 형상들 하나하나가 자기의 상징이다. 종교적 형상은 신학에서는 신학 고유의 핵심적 표상이지만, 심리학에서는 이처럼 ‘자기’를 가리키는 개념이므로 (신학자와 신자들의) 관용을 구하고자 한다.  


 무의식이 탐구되면 원형이 의식에 근접하게 되어 개체는 인간 본성의 심연에 있는 대극성과 직면하게 된다. 자기 안에서 선과 악은 그야말로 일란성쌍생아보다 더 밀착된 관계로 공존하기에 분석과정에 있는 개체는 빛과 어둠, 그리스도와 악마를 아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이런 대극의 체험은 지적 통찰이나 감득(感得) 능력과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그것을 하나의 숙명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대극성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전체성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의 상징에서 ‘균열’은 세상을 가른다. 이러한 기독교적인 균열의 저변부를 흐르는 저류와 같은 것이 바로 연금술이다. 연금술과 기독교의 관계는 꿈과 의식의 관계와 같다. 꿈이 의식의 갈등을 보상하듯이 연금술은 기독교의 대극 긴장으로 열린 틈을 메우고자 노력한다.


 예를 들어, 연금술의 핵심적 원리인 ‘마리아 프로페티싸 (Maria Prophetissa)’에서는 여성적인 것, 대지, 지하 세계, 악 자체를 의미하는 짝수가 기독교 도그마에서의 홀수 사이를 밀치고 들어간다. 남성적 측면에 따라 이루어진 의식의 세계사적 변화는 무의식의 지하계적이고 여성적인 것을 통해 일단 ‘보상’된다.  보완적(komplementär)이 아닌 보상적(kompensierend)이라는 말의 뜻은, 무의식은 단순히 의식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다소간 변형된 적수이거나 한편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 신의 아들 유형은 ‘지하계적인’ 무의식으로부터 딸이 아니라, 여전히 아들을(현자의 아들) 그의 ‘보충상’으로서 불러낸다. 아버지의 세계보다 선재(先在)했던 어머니는 남성적인 것에 응하여 인간 정신(‘철학’)의 도구를 통해 한 아들을 생산하는데 그는 그리스도와 대립되는 자가 아니라 그의 지하계적 부분이다. 상부의 아들에게 인류(소우주) 구원의 임무가 주어지듯, 하부의 아들은 ‘대우주의 구원’의 역할을 맡는다.


 나의 설명이 그노시스적 신화처럼 들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신화소(mythologem)는 심리적 과정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언어다. 어떠한 지적 표현도 신화적 상(象)이 지닌 풍요로움과 표현력에 도달할 수 없기에 근원적 (원형의) 상은 비유적 언어를 통해 가장 훌륭하고 뛰어나게 재현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고와 삶의 방식, 도덕과 언어의 세부적 사항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제약받기에 각자가 살아가는 삶의 세부적 상황을 분석해보면 개인적인 결정인자를 넘어서서 보편적이고 정신적인 전제에 이르게 된다. (분석 심리학자로서) 내가 제시해야 할 임무는, 이러한 도그마적(보편적) 표상과 일치하는 (심혼의 무의식적인) 원형을 의식화시키는 것이다.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전체성을 향한 나선형의 길


 그러나 이러한 목표를 향한 길은 직선이 아닌 순환형이거나 나선형(spirale)이다. 꿈 모티프는 어느 정도의 간격을 두고서, 나름대로 하나의 중심을 표시하는 일정한 형태로 계속 반복해서 되돌아온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의 중심점, 또는 어떤 경우에나 처음의 꿈에 이미 나타나는 중심을 에워싼 배열이다. 무의식적 사건의 표명인 꿈은, 중심을 에워싸고 회전하거나 순환적으로 발전하여 점점 더 뚜렷하고 광범위한 확충을 통해 중심에 다가간다. 그런 과정을 식물의 성장 과정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연금술에서도 나무는 연금술적 철학의 상징이기도 하다.


 정신치료 과정에서 행해지는 변증법적 대화를 통해 환자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그림자, 즉 그 스스로 투사를 통해 처치해버린 마음의 어두운 반려와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악은 선과 마찬가지로 고려되어야 한다. 선과 악은 결국 행동이 관념적으로 연장되고 추상화된 것일 뿐 양자 모두 삶의 밝고 어두운 현상에 속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로 철저한 치료에서는 인격의 어두운 반려자인 ‘그림자’와의 대결이 저절로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결은 고통스럽게 마련이다. 이런 환자의 고통 앞에서 나는 (환자가 스스로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 개입하지 않고 기다려야만 한다. 그가 자기 안의 대결 속에서 스스로의 인내와 용기를 통해 바로 그 사람에게(만) 허락된 예측하지 못한 해결책을 찾아낼 때까지 말이다.


 그렇다고 그저 수동적 태도로 있거나, 전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의 갈등이 지속되는 동안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일을 이해할 수 있도록 나는 환자를 돕는다. 환자 또한 악이 자신의 내부에 너무 막강한 힘으로 밀어닥치지 않도록 온 힘을 다 쏟아야 한다. 그것을 위해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작업’을 통한 정당성의 인정이다. 개인적 무의식(그림자와 원형)의 내용은 집단적 무의식의 원형과 연관되어 있기에 그림자가 의식화될 때 집단적 무의식 또한 동시에 끌어올린다. 그로써 그의 의식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원형이 되살아날 경우 그것은 극히 냉철한 합리주의자에게도 (아니 바로 그런 사람에게) 편치 못한 일이 된다. 그는 자신에게 저열한 미신적 생각이 밀려든다고 느끼거나, 미쳐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양상을 보일 수도 있다. 현대 의식이 정의 내리지 못하는 것은 모두 정신병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분석작업에 필수적인 신화와 연금술적 지식


 꿈과 환상에 나타나는 집단 무의식의 원형은 자주 기괴하고 섬뜩한 형상을 취한다. 이러한 형상을 심리학적으로 해명하자면 필연적으로 종교사적 현상학의 심층까지 살펴봐야 한다. 이를 통해 의식에 대해 낯설고 심지어 위협적으로 맞서면서 나타나는 환상적 상을 더 명백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거기에 맥락을 부여하는 일은 꼭 필요하다. 그러한 일을 가장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는 길은 신화학적인 비교 자료를 이용하는 것이다. 특히 개별적인 꿈의 상징과 중세 연금술 사이에는 풍성한 관계가 존재한다. 교회 안에서 (도그마의 영향으로) 의식은 무의식 그 본래의 뿌리로부터 멀어져 간 반면, 연금술과 천문학은 본성, 즉 무의식적 심혼으로 이어지는 다리의 붕괴를 막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특히 연금술은 이교와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상징의 모호성을 효율적으로 보호했다.


 비유적 측면은 연금술사들에게 너무도 중요한 것이었다. 그들은 상징의 심리적 효과를 의식했는데, 화학적 소재에 대한 그들의 연구는 (물질의) 변환의 본질을 밝히려는 노력임과 동시에 (자신의) 심리적 과정의 모사이기도 했다. 심리적 과정은 물질의 불가사의한 변화처럼 무의식적 자연 과정인 까닭에, 물질의 화학작용 속으로 한층 더 쉽게 투사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연금술의 상징성이 말하는 것은 무엇보다 인격의 형성 과정 즉 개성화 과정의 문제다.


 연금술사는 신앙이 아닌, 인식을 통한 (대극 문제에 관한) 탐색을 시도했다. 그들의 작업 과정에서 원형적 형태인 신성혼 즉 ‘화학적 결혼’으로 대극의 합일이 이루어지려면  (작업자인) ‘장인’이 (스스로 발견한) ‘작업의 형상과 동일시되지 않아야 했다. 그가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는 한 작업의 형상은 비인격적이고 객관적 형태로 놓아두었기에, 심혼에서 떠오르는 원형과 자기 스스로를 동일시되지 않게 유지하는 데에 있어서 (현대의 정신분석 환자들보다) 훨씬 유리했다. (따라서 연금술사들의 ‘작업’과정이 바로 현대의 심혼의 분석자들이 미신에 빠지거나 미치는 느낌의 위험에 처하지 않기 위해 따라해야 할 방법이라는 이야기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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