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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Dec 12. 2022

연금술에서 본 구원의 관념 1

신화 읽기 노트

(이 글은 ‘솔’ 출판사에서 간행된 C.G. 융의 <<연금술에서 본 구원의 관념>> 중 <연금술의 기본 개념>과 <연금술 작업의 정신적 특성>을 읽고(~90p) 필자의 관점에서 사적 편견을 반영하여 정리한 것임)



‘모호한 것은 모호한 것을 통하여, 미지의 것은 미지의 것을 통하여’


 이 구절은 연금술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는 책의 초반부에 융이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을 핵심적으로 나타낸다. 연금술은 화학적 실험을 행하는 기술이면서 동시에 ‘애매모호한’ 철학이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가장 순수한 물질을 추출하겠다는 목표는 있지만, 그것을 어떤 질료로부터 어떠한 방식으로 추출해 낼 것인지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연금술사들 각자는 각자의 개성과 기질과 꿈에 따라 다르게 작업하고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 역시 각자의 비밀 언어로 기록을 남겼던 것이다.


 워드프로세서가 자꾸 빨간 밑줄을 그으며 ‘진료’로 바꾸라고 지시할 만큼 낯선 단어인 ‘질료’는, 연금술 작업의 재료를 말한다. 그냥 재료라고 하면 될 것 같은데,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철학자들이 이것을 기어이 ‘질료’라고 부르는 이유는 정말 아무런 가공도 되어있지 않고 그 어떤 판단도 미리 덧 씌우지 않은 순수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 흔히 ‘재료’라고 부를 때는 이미 그것의 처리 과정과 그것이 이루어 낼 최종 결과를 예측하고 있으니 말이다. 질료에 형식이나 형상을 입혀야 실체가 드러나며 현실성을 얻는다. 융에 따르면, 연금술사들은 원 질료를 대할 때 ‘비어있는 정신’으로 그 성질을 탐구하였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지식은 물론이고 혼의 무의식까지 투사시켰다.


 “연금술사는 질료(stoff)의 성질을 탐구하는 동안 그는 질료의 어둠을 밝히기 위해 미지의 질료에 무의식을 투사했다. 잘료의 비밀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또 다른 비밀, 즉 알지 못하는 자신의 심혼 배경을 설명해야 할 대상에 투사하였다. ‘모호한 것은 모호한 것을 통하여, 미지의 것은 미지의 것을 통하여’ 설명되어야 했다! 이런 과정은 의도적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37쪽)





 “실험자는 화학 실험을 수행하는 동안 어떤 정신적인 체험을 하는데, 그러한 체험들이 그에게는 화학적 과정의 특별한 행태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투사이기 때문에 그는 물론 그러한 체험이 질료 그 자체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투사를 질료의 특성으로서 체험했다. 그가 실제로 체험한 것은 그의 무의식이었다. … 인간이 텅 빈 어둠을 탐구하려 하고 그것을 자기도 모르게 생명력 있는 형상들로 채우려 하는 모든 곳에서 투사는 계속된다.” (38쪽)


 그러니 연금술사의 실험 작업을 마치 지금의 화학 실험처럼 상상하면 전혀 맞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내가 종종 맞닥뜨리는, (밥때가 될 때까지 딴짓하느라) 아무 준비 없다가 문득 냉장고를 뒤적거리면서 거기 있는 것들만으로 어떻게든 음식을 해내야만 할 때의 난감한 상황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요즘 하고 있는, 어지럽고 말도 안 되는 꿈을 한 편의 형식을 갖춘 글로 만들어 내기가 딱 그런 상황인 것 같기도 하다. (내 의도보다는 영혼의 총체적 지휘에 따른 손의 흘러감에 맡겨보는 상황?) 그러나 물론 나는 생각나는 대로 혹은 잔머리를 굴리며 작업하지만, 연금술사들의 작업은 이런 것들보다는 훨씬 고차원적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금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결해지고자 노력하는 정신적 태도와 종교적 열정으로써 연금술 작업에 임했던 것이다. 그들은 얻고자 하는 형상과 법칙이 질료 자체가 아니라 작업자의 혼(Seele, 魂)에서 기인한다고 믿었다. ‘사물들은 그것과 유사한 것에 의해 완전하게 되기 때문에’, 만약 물질에서 기대하는 것과 같은 과정은 우선 자기 자신 안에서 완성되어야 했다. <<제4의 서>>에 따르면 변환 작업의 그릇은 ‘인간의 두개골’이다. 그곳에 사유와 지성이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러한 정신이 거하는 육체도 강건해야만 한다.





 “이 기술의 은혜에 도달하고자 하는 사람은 연구에 몰두해야 하고 진실을 책에서 찾아야 하며 꾸며낸 허구의 이야기와 거짓된 작업에서 찾아서는 안된다. 충실한 연구와 현자(철학자)들의 말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이 기술을 진정으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55쪽)


 “인간의 육체에는 형이상학적인 어떤 실체가 숨어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이것은 내적인 약제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 자체가 썩지 않는 진정한 약제이다.” (67쪽)


“연금술사는 매우 섬세한 정신의 소유자여야 하고 금속과 광물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연금술사는 거칠고 경직된 정신을 가져서는 안 되며, 탐욕스럽거나 물욕이 강해서도 안 되고, 우유부단하고 변덕스러운 정신의 소유자 여서도 안 된다. 또한 작업을 서두르거나 성급한 상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연금술사는 확고한 결단, 끈기와 인내를 갖추어야 하며 온화하고 느긋하며 절도가 있어야 한다.” (70쪽)





 이러한 정신-신체적 덕목을 갖추기 위해 연금술사들은 명상(meditatio)과 (적극적?) 상상(imaginature)을 행했다. 내적 대화인 명상은 신과 함께 간구할 때, 혹은 자기 자신과 또는 선한 천사와 나누는 대화와 비슷하다. 이러한 내면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타인’ 즉 무의식으로부터 응답하는 목소리를 듣고, 그와 더 생생한 관계를 이루어나갈 수 있다. 융에 따르면 이런 대화를 통해서 온갖 사물들은 잠재된 상태에서 드러난 상태로 옮겨간다.


 융은 상상을 무의식을 활성화시키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생각한다. 상상은 실체가 없는 허깨비가 아니라 반은 정신적이고 반은 신체적인 미묘한 것(微妙體)이다. 따라서 혼의 상상력은 연금술 작업의 비밀의 문을 여는 매우 중요한 열쇠다. 혼의 상상력은 육체 안에서 작동하지만, 그것이 발휘하는 기능은 대부분 육체밖에 있다. 융은 무의식을 의식과 신체 사이를 매개하는 정신적 실존물로 보는데, 이는 연금술서에 묘사된 상상력을 지닌 혼과 일치한다.


 “혼은 단지 부분적으로만 우리의 경험적 의식의 존재와 상응하며, 그 밖에는 투사된 상태에 있으면서 보다 위대한 것을 상상한다. 너는 보다 위해한 것을 이해할 수 있고, 너의 육체는 그것을 실현할 수 있다. … 그 위대한 것은 … 현대적으로 표현하자면: 자연의 외부에 있는 … 선험적으로 원형적인 성질을 가진 무의식 내용들의 실현을 말한다.” (86쪽)


 이러한 위대한 실현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연금술사의 정신 ‘속’도 아니고, 외부의 질료라는 ‘바깥’도 아니다. 그 장소는 오직 비밀 언어인 상징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는 ‘현실의 중간영역’이라고 한다. 앞으로 연금술사들의 작업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중간계가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아직? 연금술사가 아니므로) 성급하게(!) 상상해보니, 나에게는 글쓰기 작업이 떠오른다. 내가 쓴 글은 내 안에 있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외부의 질료 그 자체도 아니다. 내 글도 그렇지만, 특히 내가 글을 쓰는 시간 동안 나는 현실도 비현실도 아닌 그런 상황 속에 놓여있지 않나?




 융에 의하면, 연금술사들은 아무도 진짜 금을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융의 이 말이 만약 ‘비밀 언어’라면, 나는 내가 글을 쓰는 상황에 비춰보면서, ‘아무도 처음 의도한 대로의 정확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고쳐 읽을 것이다. 글을 시작할 때 희망했던 것과 글을 끝낼 때 내가 얻게 되는 것은 매번 다르다. 그건 아마 나도 연금술사들처럼, 매우 모호한 희망을 품고 글을 시작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시작할 때는 생각지도 못한 것을 매 번 얻기 때문에, 그 기쁨을 잊을 수 없어 또다시 글을 쓴다. 연금술사들 역시 그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수백 년 동안 진지하게 실험을 해왔지만 그들은 결코 진짜 금을 만들지 못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확고하게 실험하고 작업하게 했는지, 그 시도가 절망적으로 끝났어도 계속 신적(神的) 기술에 대한 논문을 쓰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지? … 그들은 늘 새처럼 날 수 있기를 꿈꾸는 자들과 같은 것을 바랄 수 있었다. ‘감행’, ‘모험’, ‘탐색’, ‘발견’에서 얻는 만족은 결코 경시될 수 없는 것이다.”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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