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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르mihr Feb 10. 2023

연금술에서 본 구원의 관념 4

신화 읽기 노트

(이 글은 ‘솔’ 출판사에서 간행된 C.G. 융의 <<연금술에서 본 구원의 관념>> 중 <종교사적 틀에서 본 연금술의 상징>과 <에필로그>를 읽고(269~332p) 필자의 관점에서 사적 편견을 반영하여 정리한 것임)




 근대의 화학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연금술과 연금술사들은 사라져 버렸다. 지금의 과학적 지식으로 바라본다면, 그들의 생각은 엉뚱하거나 비합리적이거나 어리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이 오래전 연금술 문헌들에 대해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그걸 다시 우리에게 설명해 보려고 애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우리 마음속의 ‘본질’적인 무언가를 드러내 주는 상징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인 것 같다.


 사실상 나는 ‘본질’이라는 말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어떤 ‘절대적 불변인 무언가가 있다’는 뉘앙스가 풍기기 때문이고, 나는 ‘불변의 진리’에 대해 언제나 어깃장을 놓고 싶은, 변화하는 세계를 편애하는 마음의 소유자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융이 말하는 ‘마음의 본질’은 정말 그런 것일까? 어쩌면 정말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글을 따라 읽다 보면 그 불변하는 ‘본질’에 대해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것 같다. 세계, 특히 인간의 마음이라는 세계는 무한해서 언제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들이 남아있다. 인간으로서는 그 세계에 대해 절대로 다 알 수 없다. 인간의 마음이라는(사실은 몸 또한!) 무한한 세계의 다양성이라는 본질은 불변이고, 세계의 무한성 앞에서 우리의 무지라는 본질 역시 불변이며, 그런 무지한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알고 싶은 욕망과 노력이라는 우리의 본질 역시 불변이다. 이런 불변하는 ‘본질’이라면 그렇게 나쁜 말은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융은 우리 마음의 그 본질을 드러낸다는 상징을 설명하고자, 동서양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던 외뿔 짐승의 예를 든다. 눈과 귀처럼 보통은 쌍으로 두 개가 난 뿔이, 외뿔 짐승에게는 머리 중심에 하나만 있다. 어릴 때 많이 보던 유니콘의 이미지가 쉽게 떠오르지만, 융이 알려주는 외뿔 짐승은 아주 다양한 종류다. 특정 종에 속하는 풍뎅이는 외뿔이기도 하고, 페르시아의 문헌에는 거대한 외뿔 당나귀가 등장하며, 인도 고전에는 최초의 인간을 홍수로부터 구제한 거대한 외뿔 물고기 이야기가 나온다. 중국의 전설에서 공자가 태어나고 죽을 때 나타났다는 짐승인 기린麒麟 역시, 뿔이 하나였다고 한다. 융은 이렇게 다양한 외뿔 짐승을 예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외뿔 짐승이 다른 사물과 맺는 관계와 다채로운 변환에 대해서도 풍부하게 보여준다. 외뿔 짐승의 뿔은 강인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알다시피 뿔을 뒤집으면 잔이 된다. 힘과 강건함의 남성적 특성의 뿔은 뒤집으면 여성적이고 대지적인 특성으로 변모한다. 그래서 외뿔은 양극적인 것이 결합되어 있는 상징성이기도 하다.





 외뿔 짐승을 실제로 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연금술과 교회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문헌에서 외뿔 짐승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저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일까? 융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그는 ‘상징의 모체로서의 무의식’에 대해 말하면서, 정신의 인식과 정신적인 실존에 대해 이렇게 단언한다.


 “인식하는 정신이 없다면, 존재하는 그 무엇도 인식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정신적인 실존에 의해서만 ‘존재 Sein’가 주어진다. 그러나 의식은 오직 그 고유의 본질 중 일부만을 파악한다.”(270쪽)


 누구나 볼 수 있는 세계에서, 생식하는 짐승 중에는 외뿔 짐승이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만약 생물학적인 눈만으로는 볼 수 없는 세계(의 무의식) 속에서 작용하는 어떤 힘을 누군가 감지하고 그걸 ‘외뿔 짐승’으로 형상화했다면, 그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게 아닐까? 물론, 그걸 존재한다고 말하기에도 애매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융은 ‘잠재적인 실재성’, ‘존재-비존재의 대극성’, ‘합일의 상징’과 같은 말을 자꾸만 반복해서 들려주는 것 같다. 세상의 어떤 것들은 (어쩌면 모든 것들이) 존재와 비존재라는 구분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정신 속에서 솟아 나오는 '상징'이란 존재와 비존재의 중간 그 어디쯤인가를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인 것이다.  





 그런데 연금술이 외뿔 짐승은 물론이고 수많은 상징의 보고(寶庫)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작업 속에서 일어난 무의식 투사의 원질료가 비개인적이며 순수한 물적物的 특성을 지녔던 덕분이었다. 연금술사들은 원질료 속에 갇혀있는 형상을 발견하고 그 형상의 영혼을 구원하려고 했지만, 그 무의식적 내용과 자아를 분별했고, 그래서 그 안에서 아주 다양한 세계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융에 따르면, 의식적 자아만 있다고 믿는 현대인들의 심리 투사는, 투사된 내용을 오로지 자아에 덧붙임으로써 투사 내용과 자아를 동일시하여 자아는 점점 더 비대하게 팽창한다. 무의식 속의 원형은 출현하면서 의식을 사로잡기 때문에, 그 원형을 인식하지 않은 자아는 그 원형에 상응하는 ‘역할 속에서’ 살게 된다.


 “팽팽하게 부푼 의식은 늘 자아중심적이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현재만 의식한다. 그래서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하게 되고, 미래에 대한 올바른 추론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자기 스스로가 최면에 걸려 있어 자신과 대화할 수 없다. 의식의 팽창은 역설적이게도 의식의 무의식화인 것이다. 의식이 무의식의 내용을 무리하게 떠맡아 모든 의식성의 불가결한 조건인 구별 능력을 상실하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 (328쪽)

  

 연금술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융은 ‘누미노제’라는 낯선 말을 툭 던져놓는다. 이 낯선 말을 익혀보려고 일부러 이곳저곳 뒤적거려 보니, 독일의 오토(R.Otto)라는 철학자가 라틴어의 numen(신의 뜻)이라는 말로부터 만들어 낸 말로써, 주로 종교적 경험의 비합리성이나 압도적이며 절대적인 타자에 대한 경외의 감정을 나타낸다고 한다. 확실성의 시대에 태어나 의지의 한국인으로 살아온 내겐 낯설 수밖에 없는 말이다. 그러나 ‘누미노제’가 모든 압도적인 힘 앞에서 자신의 의지를 굽히고 그저 순종하라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융은 계속해서 연금술사들이 했던 구원의 ‘노력’에 대해 강조하기 때문이다.





 종교의 시대에 보통의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 얻으려던 구원을, 연금술사들은 스스로의 인식의 노력으로 얻으려고 했다. 게다가 그들은 의식된 자기 자신인 자아만이 아니라, 의식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 융이 말하는 ‘자기’까지 구원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온갖 상징으로 표현해내려고 했던 누미노제 즉 ‘신의 뜻’은 실은, 자기 안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신의 모습인 셈이다. 자기 안에서 신을 체험하고 그것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형상화하는 것은 (절대적) 타자에 대한 ‘순종’이다. 그러나 그런 순종을 해내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자아의 입장이나 역할을 굳건한 ‘의지’로써 거역해야만 한다. 이런 ‘순종을 위해 거역할 의지’가 필요한 이유는, 이 ‘신의 뜻’은 주변의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안에서만 들려오기 때문이다.


 “변환은 단지 개인에게서만 시작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도 남음이 있듯이 대중은 눈먼 짐승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로서는 적어도 개별적 인간, 혹은 개별적 인간들이 자아 인격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정신적인 비非-자아에 속하는 내용이 있다는 사실을 통찰하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 우리는 그에 대한 유용하고도 고마운 본보기들, 시인들과 철학자들이 보여주는 본보기, 혹은 ‘원형들’을 갖고 있다.” (329쪽)


 의식적인 자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서는, 타인의 모범을 쫓는 게 아니라, 자기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하고, 그곳에서 지금 의식하지 못하는 세계의 무한성을 만나야 한다는, 아주 어려운 주문을 융은 우리에게 하고 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타인의 모범이라는 것은 이미 의식되고 합리적인 질서의 세계다. 내 곁(?)의 무의식 속에서 의식되지 않고 비합리적인 세계를 만나고, 그러고도 그것을 의식적인 자아에 덧붙이거나 동일시시키지 않으며 살기. 융에 따르면, 그런 것만이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 잠겨있는 영을 해방하면서 동시에 나 자신도 해방되는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만 된다면, 나 자신을 어떤 의식적인 자아 역할에 고정시키지 않으면서-예컨대 ‘엄마’와 같은-, 내 곁(?)의 무한한 타자들을 체험해 나가는 삶이니, 그러면서 미쳐버리거나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지 않는 삶이니, 얼마나 흥미로운 삶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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