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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Feb 03. 2023

연금술에서 본 구원의 관념 3

신화 읽기 노트

(이 글은 ‘솔’ 출판사에서 간행된 C.G. 융의 <<연금술에서 본 구원의 관념>> 중 <라피스-그리스도-유례>를 읽고(160~268p) 필자의 관점에서 사적 편견을 반영하여 정리한 것임)



연금술 문헌 속 기독교적 상징들


 이번 장 <라피스-그리스도 유례(類例)>는 100여 페이지를 훌쩍 넘기는데, 융은 이렇게 긴 페이지를 할애하여 수많은 연금술 문헌에 나타나는 기독교적 유비와 상징들에 대해 보여주려 한다. 연금술 문헌 속에서 사용되는 상징은 교회적 비유로 넘쳐흐른다. 특히 연금술 변환으로 얻으려는 순수하고 영원한 물질인 라피스는 인류의 구원자 그리스도에 비유된다. 그렇지만, 융에 따르면, 이러한 연금술 상징의  뿌리가 기독교인 것은 아니다. 2세기 중엽에 기록된 서양의 연금술 문헌을 보면 동양 특히 중국의 원전들과 유사함을 알 수 있고 이렇게 동서양에서 공통적으로 발전한 연금술의 관념들은, 기독교가 출현하기 이전에 이미 교회 밖에서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연금술에 기독교의 구원과 각종 상징 개념들이 혼합된 이유는 무엇일까? 중세의 연금술사들 대부분이 기독교 교리에 정통한 사람들-성직자들과 철학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연금술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 기독교 교리를 수용했다. 게다가 연금술 과정을 가톨릭 미사의 형식을 차용해 기술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후에 종교사가들의 생각처럼 연금술과 기독교 교리가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보완하고  통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저자는 분명 『불가타 성서』(공인 라틴어로 번역된 성서)를 외우는 성직자일 것이다. 그의 정신이 연금술적 철학으로 가득 차 있듯이, 그의 모든 언어는 성서 인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에게 연금술은 ‘신의 지혜(Sapientia Dei)’와 동일하다. 그의 논문은 「지혜서」 7장 2절과 「잠언」 1장 20~21절로 시작한다.” (201쪽)






개인의 구원과 '개성화-과정'의 관계


 그러나 연금술 문헌에 등장하는 그리스도는 기독교 교리 속의 그리스도와 분명 다르다. 융은 이를 가리켜 ‘그노시스적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쓴다. 우리말로 영지주의(靈知主義)로 번역되는 그노시스는, 우선 인식이나 앎 혹은 깨달음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이라 한다. 그노시스적 교리를 가진 신앙집단은 신(하느님) 역시 인식의 대상으로 여기고 그러한 신의 신비에 접근할 수 있는 지식 자체가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여겼다. 혹은 천상적 신비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 자체, 신의 피조물인 인간 본성에 대한 지식과 통찰력 자체를 신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니 지금의 [교황사전]에 “아직 어린 그리스도교 교회를 괴롭히는 가장 큰 위험”이었다고 쓰여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전 글에서도 밝혔듯이, 연금술사들은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며 이전 연구자들이 남긴 많은 책들을 읽고 꼼꼼히 비교하며 연구하는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은 교회 공동체에 속에서 안식을 얻는 보통 사람들처럼 그저 ‘믿음으로써’ 받을 수 있는 구원과는 다른, 전혀 다른 차원의 구원을 추구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연금술에서의 구원의 관념’을, 융은 자신의 대표적인 심리학 개념인 ‘개성화-과정’으로 설명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융이 말하는 '개성화-과정'은 의식과 무의식 간의 상호작용을 시도함으로써, 사회적/집단적 편견이나 신념에 의해 한쪽으로 치우쳐버린 의식에 본래의 조화로운 다양성을 되찾아 주려는 심리학적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융은 사회생활 속에서 조화를 잃고 치우쳐버린 의식을 '자아'라 부르고, 무의식 속에서 잠자고 있는 다양한 내적 개성과 역량까지 포함한 것을 '자기'라 부른다. 그러니 융의 개성화 과정은 잊힌 자기를 찾아가는 여행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런데 구원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기독교 교리 안에서는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영원히 평화로운 상태인 영생을 얻는다. 그들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반면 연금술사들은 원질료인 혼돈의 물질을 구원하려 한다. 이런 구원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양성체의 등장과 대극쌍의 합일이다. 원질료 안에는 언제나 서로 반대되고, 서로 모순되며, 완전히 상극인 것들이 함께 들어있다. 최초의 ‘검음’의 상태일 때는 뒤죽박죽 되어 있던 것들이 작업 속에서 숨겨져 있던 성질을 드러내는데, 연금술사들은 서로 상극되는 성질들이 조화롭게 결합하는 방식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때 나타나는 상징은 대극으로서의 오누이 쌍 또는 어머니-아들의 근친상간적 결합이나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우로보로스인데, 이는 내적인 재생능력을 획득해  불모의 상태를 벗어나는 영생의 능력을 나타낸다. 그러면 물질은 영원성을 획득하고 구원받는다.


 “우로보로스는 스스로를 잡아먹고 교미하고 수태하고 죽고, 다시 부활하는 용을 말한다. 자웅동체인 우로보로스는 이미 그 자체로도 대극으로 구성되며 동시에 이것을 결합하는 상징성을 지닌다. 그는 한편으로는 치명적인 독, 바질리쿰, 스콜피온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만병통치약이며 구세주다.” (194쪽)


 


“다 아는 바와 같이 라피스 안에서는 원소들의 혼돈스러운 충돌이 아니라, 원소들의 가장 내적인 상호 간의 결합이 일어난다. 이는 돌을 썩지 않게 한다. 그러므로 돌은, 저자의 의견처럼, 구세주의 피와 같은 작용을 한다 : 즉, “건강과 행복한 영생: 우리의 돌은 무엇보다도 이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261쪽)


 그런데 융의 말대로 이 모든 작업과정이 연금술사 개인의 심적 투사과정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질료 안에 함께 들어있다는 서로 모순되며 상극인 성질들은 모두 실상 연금술사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연금술사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실상, 서로 모순되는 무수한 욕망들이 공존한다. 예로부터 철학자-성직자들은 인간의 욕망이 정신이 아닌 육체에서 기인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제각각의 욕망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하기보다는, 절제된 의식으로 금지하고 억누르려 한다. 반대로 그런 정신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특정한 욕망에 굴복하고 휘둘리면서 기쁨을 맛보려 한다. 그러나 이 두 경우 모두 욕망에 대한 인식은 요원하며, ‘구원’과는 멀어지게 마련이다. 참는 것도, 좇는 것도, 모두 마음의 평화는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나 만약 연금술사들처럼 물질에 마음을 투사시켜 그 혼돈의 물질 안에 숨어있는 마법의 돌을 발견하려 한다고 해보자. 그러려면 우선 원질료를,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을, 불꽃이 이글거리는 화덕 속에 집어넣어야 한다. 이 상징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적으로 치열한' 글쓰기 같은 것일까?) 어쨌든 연금술서에 의하면 그런 뜨거운 불길을 통과해야만 마음에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던 것들이 제각각 본색을 드러내고, 서로 조화롭게 결합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뜨거운 불 속에서 원질료-마음은 죽음을 맞이하고, 그래야만 부활할 수 있다. 죽음 속에서 부활하는 것은, 알다시피 그리스도이다. 희생 제의를 반복하는 기독교 사제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에 일치시키지만, 작업 중의 연금술사는 원질료 속에서 찾고자 하는 실체와 그리스도를 일치시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철학적 인간(homo philosophicus)’ 즉, 소우주와 동일하다. 이는 죽지 않고 죽은 모든 자들을 살리는 유일자이다. “철학적 인간”은 외관상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 한편으로 그는 ‘하나인 것(일자 一者) 혹은 ‘생명의 영약’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안트로포스와 동일하거나 적어도 관계가 있는 내적인 불멸의 인간을 의미한다.” (221쪽)



그런데, 지금도 '개성화-과정'이 중요할까?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재가, 옛사람들이 살던 세상보다는 훨씬 더 자유와 개성을 중시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융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 아니 의식적으로는 맞고, 무의식적으로는 틀렸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인간이 문명을 발전시켜 점점 더 정교하고 복잡한 관념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내면화하면서 살아갈수록, 그런 관념에 편입하지 못한 잠재력들은 무의식 속으로 더 깊이 침잠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중세 사람들은 물론, 지금보다는 사회적 자유가 적었다. 신분제와 공동체와 신앙에 얽매여 있는 삶. 그런 것들이 사라진 지금 우리는 무한한 사회적 자유를 누린다.(고 여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는 없던 더많은 (실재적이며 세부적인) 관념들에 구속되어 있다. 이를테면 국가와 국민, 어른과 학생, 자본(가)과 노동(자), 중산층과 평등,,, 등등.


 융은, 연금술사가 살던 시대의 옛사람들을 제한하던 규율은 어쩌면 지금보다는 더 단순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의식적 규율이 제한할 수 없는 더 큰 영역에서, 개개인이 타고난 다양한 개성을 드러내주는 무의식을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었고 각자에게 체험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금은 그때보다 더 많은 다양한 것을 자유롭게 ‘의식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에 들어맞지 않는 것들은 심지어 ‘비정상적인'것이라 불리기까지 하므로, 의식성에 들어맞지 못하는 개개인 속에 자리한 개성적이며 다양한 욕망들은 무의식 속으로 깊이깊이 숨어버린다. 그러는 사이 그는 잘 맞지 않는 기성복에 자기 몸을 맞춰 살면서, 채워지지 않는 끝없는 허기에 시달린다.


 그러나 있는 것이 깊이깊이 숨는다고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들은 쌓이고 쌓이다가 가끔씩 엉뚱한 곳으로 동일시 투사되어 집단적/폭력적으로 분출한다. 융은 세계를 죽음에 몰아넣는 전쟁이나 집단 학살 등을 모두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그렇게 큰 사건이 아니더라도, 그와 유사한 사건들을 우리는 주변에서도 흔히 목격할 수 있다. 매우 다양해 보이지만 실은 부속품이나 수식어 몇 개만 바꾼 것에 불과한 다양함, 스스로 규정하기보다는 ‘외부에서 규정한’ 가장 좋은 것을 찾아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시대일수록, 융이 말하는 ‘개성화 과정’은 더 중요하게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역시, 어떤 식의 해결과정이 '정석'이 되거나 사회적 권위에 의해 '정답' 찾기식이 되어버리면 곤란하겠지만.

 

 “리플레이(1415~1490)가 살았던 때는, 신이 그의 비의와 함께 아직 자연 속에 살고 있었고 구원의 신비는 존재의 모든 단계에서 일어나던 시대였다. 왜냐하면 무의식적으로 일어난 것들이 아직 방해받지 않은 낙원의 참여로 질료와 함께 살고 있었고 경험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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