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상시 뭘 사든, 뭘 먹든, 가게에서 내주는 영수증이나 계산서를 들여다볼 줄은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여행 동안 그런 것들을 계속해서 유심히 들여다보게 만든 결정적 사건은, 사실 '견과류 2유로' 사건 바로 전날 밤에 일어났다.
로마 음식 5일째, 평상시 집밥이나 가정식 백반이라면 기피하는 우리지만, 밥(알)이 그리웠다. 다행히 숙소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괜찮아 보이는 일식당을 찾은 우리는 작정하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탱글한 밥알 듬뿍 롤과 돈가스와 싱싱한 회가 올려진 초밥에 아주 만족스러웠던 우리는, 당연히 마셔야 했다. 이제 스무 살이 된 큰 딸과 나는, 여행 시작부터 마치 이탈리아 사람인 양(?) 자연스럽게, 특히 저녁 식사 때에는, 가벼운 술을 한잔씩 곁들였다. 어차피 이곳 식당에서는 물도 돈을 주고 사 먹어야 하니까, 비슷한 돈을 내고 (한국에서는 공짜인) 물을 사 먹느니 (한국에서는 훨씬 더 비쌀) 술을 먹는 게 훨씬 더 가성비 있어 보이기도 했다.
거기에서 둘째는 누구나 아는 콜라, 큰 아이는 졸업식에 친구들과 맛봤다며 자기가 아는 술인 하이볼을 주문했다. 그러나 나는 메뉴판에 적힌 수많은 칵테일 중에서 '우메 사와'라는 제일 예뻐 보이는(?) 이름의 술을 골랐다. 내가 먹어보거나 아는 술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런데 칵테일 잔을 기대하던 내게 서빙된 건, 작고 예쁜 파란 병에 담긴 술이었다. 병에는 '사와 사와'라고 적혀있었는데, 나는 그게 '우메'로 만든 '사와'거니 생각했다. 적당히 달고 적당히 묵직한 그 술은 생각보다 훨씬 맛있어서, 큰 딸도 하이볼을 제쳐 두고 내가 주문한 예쁜 술을 함께 마셨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우리에게 계산서를 가져다 놓고, 종업원은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곳도 맛집인지 빈자리 없는 저녁식사 시간이라, 종업원들은 바빴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계산서를 한참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먹은 것과 계산서에 찍힌 글자를 하나씩 대조해 보던 우리는 내가 주문한 '우메 사와' 아래에 또 다른 사와인 '사와사와'가 있는 걸 발견했다. 심지어 '사와 사와'는 '우메 사와'보다 몇 유로나 비쌌다. 나는 식당 주인을 불러서 '버벅거리는' 영어로 묻기 시작했다.
"(내가 마신 술병을 가리키며) 이게 '우메사와'야 아니면 '사와사와'야?"
"그건 '사와사와'야."
"나는 이거 안 시키고, '우메 사와'를 시켰어. 그런데 '우메 사와'는 안 나왔는데, 계산서에는 둘 다 쓰여있어."
"정말? 가서 알아보고 올게.... (잠시 후 돌아와서) 미안해, 종업원이 실수한 것 같아."
당연히 실수할 수 있다. 식당 주인은 이탈리아에 사는 일본 사람이고, 종업원은 한국식 영어를 못 알아듣을지도 모르는 일본식당에서 일하는 이탈리아 사람이고, 나는 일본말도 영어도 잘 못하는 한국 사람이니. 우리 사이에서 말과 행동이 오가다 보면 당연히 실수할 수 있는 일이지. 게다가 본인들의 실수에 대해 정중하게 사과하니, 더 문제 될 게 없었다. 비록 딸과 나눠 마시긴 했지만, 그래도 술병이 예뻐서 평소보다 많이 마신 나는 기분 좋게 대답했다.
"그래, 괜찮아. '사와사와'가 정말 맛있었거든."
내 대답에 그들도 웃으면서 우리를 배웅했다. 그런데 그렇게 식당을 나와 숙소를 향해 걸어가는데 문득 20여 년 전 로마에서의 어떤 순간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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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바티칸미술관 매표소 앞에서 긴 줄을 서 있다가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지폐 한 장을 내고 티켓과 거스름돈을 받았다. 생각보다 거스름 돈이 많은 듯해 순간적으로 매표소 직원을 바라봤는데, 그는 나를 보고 짧게 미소를 짓다가 이내 다음 사람에게 티켓을 내주고 있었다. 내 뒤로도 긴 줄이 이어졌기 때문에, 나는 좀 의아해하면서도 손해는 아닌듯해 일단 미술관 입구에서 티켓을 보이며 입장했다. 그때 내가 들고 있는 티켓이 다시 내 눈에 들어왔는데, 그건 일반 티켓이 아니라 학생이나 20세 이하에게 주는 할인용 티켓이었다.
순간 내가 동양인이라 그들보다 어려 보여 잘못 줬나 싶었지만, 거스름돈을 다시 확인해 보니 할인 티켓보다는 적은 금액이었다. 일반보다는 많고, 할인 티켓보다는 적은 거스름 돈? 미술관 관람을 하는 내내, 내겐 이 어긋난 거스름 돈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질 않았다. 그 차액은 결국 일반 티켓보다는 싼 값에 입장한 나와, 할인티켓보다 비싼 값을 받은 매표소 직원, 우리 둘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사이좋게, 나란히, 둘 모두를 만족시키면서!
20여 년 전, 3개국을 10일간 훑어가는 유럽여행에서 로마는 단지 이틀을 머물렀을 뿐이다. 그땐 다시 로마를 찾지는 않을 것만 같았다. 길도 너무 복잡하고, 오토바이들이 매연을 내뿜고, 어딜 가나 전 세계의 관광객으로 꽉 들어차 긴 줄을 기다려야 했기에. 그런데 이상하게도 집에 돌아온 내게 계속 떠오르는 곳은, 웅장하고 세련된 파리도 청정하고 그림 같은 자연의 스위스도 아닌, 더럽고 복잡하고 심지어 내게 사기까지 잘 치는 로마였다.
그리고 얼마 전, 긴 수험생활을 끝마친 딸과 함께 어딘가를 가보자 마음을 먹은 내게 바로 떠오른 곳은, 또다시 이탈리아와 로마였다. 발길 닿는 곳마다 마주치는 성스러운 성당에 둘러싸인 채, 내게 웃으면서 경쾌하게 사기 치는 사람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들이 내게 친 사기에서 손해 본 것은 없었다. 매표소 직원과 내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 거스름 돈처럼, 그들은 '나와 너'는 만족시키고 '법과 규칙'은 웃음거리로 만드는, 그런 사소한 유희를 즐길줄 아는 것은 아닐까? '사와사와'를 머금고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걷다 보니, 아무래도 나를 이곳으로 다시 불러들인 건 아마도 그들의 이런 소극(笑劇)인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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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20년 만에 찾은 바티칸 매표소는 예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고, 정복을 입은 매표소 직원은 할인 티켓을 구매한 큰 딸에게 아주 유창한 한국말로 "몇 살이에요? 학생증 있어요?"라고 물어보았다. 단지 물어만 보았는데, 그건 내 생각에 우리를 대상으로 한국말 연습을 더 하기 위함이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딸의 신분증을 확인하는 대신 본인이 한국말공부를 하는 중인 한국어가 쓰인 노트를 우리에게 제시하며, "지금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요"라는 한국어를 또다시 유창하게 말했고, 우리는 그런 그에게 그저 감탄과 박수만 보낸 후 입장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