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1999년 차가운 시간
1997년 겨울이었지.
그해 12월, 한국은 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요청했고 세상은 그 시절을 ‘IMF’라 불렀어.
단어 하나였을 뿐인데
그 말은 유난히 차갑고, 오래 위협적으로 남았지.
세 차례의 면접을 치르고
6개월 수습 뒤 정규 간호사가 된다는 조건으로
대학병원에서 수습기간을 밟고 있던 너의 앞에
낯선 ‘IMF’의 시간이 놓였고 그 문턱에서
너는 ‘파트타임’이라는 이름을 처음 달게 되었어.
지금은 너무도 흔해진 말이지만
그 비정규직이라는 명칭이
그렇게 서러운 자리가 될 줄은
너는 미처 몰랐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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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동과 병동 사이를 오가던 시간들.
간호사 출산휴가가 생기면 그 병동으로,
인력이 비면 또 다른 병동으로.
필요할 때 채워지고
역할이 끝나면 조용히 이동하는 구조였지.
한 달에 밤 근무는 아홉 번.
체중은 어느새 10kg이 줄어 있었지.
그렇게 2년 반...
너는 이미 많이 지쳐 있었을 거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들었을 거야.
하지만 부모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너는 늘 말을 삼켰지.
오랜 기간 고생하신 부모님께
사직이라는 이유로
그분들의 시간을 더 무겁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어쩌면
잘 버티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들키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넘기고 있었는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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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너는 백혈병 아이들이 많은
소아과 병동에 몇 년 근무하게 되었었지.
그 아이들 곁에는 늘
수호신처럼 어머니들이 있었어.
낮에도, 새벽에도
아이 손을 놓지 못한 채
잠들지 못한 얼굴로
체온을 재고, 숨을 확인하며
하루를 이어가던 어머니들.
그분들은 매일 밤
고열과 기침 속에서
아이의 생을
처절하지만 숭고한
모성으로 붙들고 있었었어.
너의 고용의 불안과 불합리는
그 앞에서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조용히 작아져 버렸어.
그런데도
오히려 그분들은,
새벽녘
아이들의 활력징후를 재야 하는 너를 대신해
채 눈을 뜨지도 못한 채
이미 체온계에 익숙해진 손으로
아이의 열을 재어주던 날들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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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그 시절 너를 버티게 한 건
나이팅게일의 선서도
간호사의 사명이라는 말도 아니었어.
아픈 자리에서
아이 앞에서만큼은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던
어머니들의 절절한 모성.
그 강인함 앞에서
박간호사,
너의 고단함은
스스로 작아질 수밖에 없었을 거야.
네가 특별히 강해서
그 차가운 시절을 견뎌낸 게 아니라
너에게 강인함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보여준 어머니들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었지.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날 너의 하루에 남아 있던 건
서러움과 고단함만은 아니었을 거야.
힘든 상황 속에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말없이 오가던 위로,
조심스럽게 서로에게 전해지던 온기가
그 하루를 함께 지나고 있었음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그 힘든 항암과정과
오랜 치료의 시간을
사랑으로 건너온 어머니들,
그리고 천사 같던 아이들.
지금은 부디
평범한 하루 속에
행복이 가득하기를.
그리고
박간호사
그들에게 가졌던
고마움 마음을...
부디 평생 잊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