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량의 법칙- 한 사람에게 주어진 몫에 대하여
박간호사,
오늘 평소 알고 지내던
이십 대의 신규 간호사가 찾아왔어.
입사한 지 석 달 만에 사표를 제출한 후,
인사차 들렀다고 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섣부른 판단이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과
‘조금만 더 버텼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어.
하지만 그 말은 꺼내지 않았어.
그 간호사는 담담하게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 눈빛에는 이미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 가득 내려앉은 듯했어.
그래서 나는
“괜찮아, 수고했어”라는 말로
조용히 위로를 건넸어.
박간호사, 너도 알다시피
인생은 종종 예고 없이 방향을 틀잖아.
또한 힘든 일은 기다려주지 않고
겹쳐서 오기도 하지.
업무의 무게가 쌓이면
관계가 흔들리고,
몸이 먼저 반응하고,
마음이 뒤따라 무너지기도 하잖아.
그러다 보면 결국
‘이 자리를 떠나는 게 맞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닿게 되기도 하지.
간호라는 것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잖아.
전문지식과 술기를 바탕으로
환자의 신체를 돌보면서
그 마음까지 헤아려야 하고,
보호자와 의료진 사이에서
끊임없이 조율하고 설명해야 하지.
간호사가 서 있는 자리는
늘 누군가의 생명을
온몸으로 떠받치는 자리라고 생각해
그렇기에
늘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요구받지만,
완벽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잖아.
그러니 이제 막 흰 가운을 입은 신입이
그 모든 무게를 곧장 감당해야 한다는 건
생각보다 가혹한 일이라는 걸
너도 잘 알잖아.
특히 찰나의 판단이 누군가의
생명과 직결된다는 사실은
많은 간호사들의 밤을
쉽게 잠들지 못하게 한다는 것도 말이야.
그래서 나는
“간호는 서비스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웠어.
서비스라는 단어만으로는
생명에 대한 책임감과 중압감을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어.
간호는
친절함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자리해야 할 것은
전문성과 책임이라고 생각하거든.
누군가의 생명을 맡아 선 자리라면
미소보다 먼저 준비된 지식과
확신 있는 판단이
전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어.
나는 가끔 생각해.
사람마다 겪어야 할 난관의 총량이
어쩌면 정해져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야.
많은 사람들이
출발선과 조건의 불공평함에 대해 이야기하지.
그런데 수많은 생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느낀 건,
인생이라는 긴 시간을 따라가다 보면
아무 위기와 난관 없이 지나가는 삶은
결코 없다는 사실이었어.
냉정하리만큼 그 몫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돌아온다고 생각해.
다만
언제, 어떤 모습으로
그 시간을 마주 하느냐의 차이일 뿐.
누군가는 젊은 날에 먼저 만나고,
누군가는 순탄하다고 믿던 삶 한가운데서
날벼락처럼 위기에 직면하게 되기도 하지.
그래서 그 순간에는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오는지 원망스럽고,
끝없는 시간 앞에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해.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시간 또한 기필코 겪으며 지나야 했던
정해진 몫이었음을
조용히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아.
박간호사,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대개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비로소 그 의미가 또렷해지는 것 같아.
그 당시의 아픔이 완전히 설명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헛된 시간은 아니었다는 위로만은
조용히 남지 않을까 해.
그리고 그 시절의 상처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 것 같아.
사면초가의 순간,
삼켜야 했던 눈물,
믿었던 이로 인해 다친 마음은
무의식 속으로 스며들어
서서히 사람의 결을 바꾸는 것 같아.
조금 더 깊게,
조금 더 신중하게,
조금 더 단단하게 말이야.
그래서 나는
힘든 일이 찾아오면 이렇게 생각해 보려 해.
지금은 그저 내가 지나야 할 몫을
지나는 중이라고.
그리고 이 시간이
적어도 의미 없는 소모는 아니라는 믿음을
조용히 가져보려 노력해.
박간호사,
혹시 지금 너도
버티는 것조차 버거운 시간을 지나고 있다면,
그건 너의 부족함 때문도 아니고,
너에게만 유독 가혹한 시련도 아닐 거야.
그저
네가 겪어야 할 인생의 한 장면을
통과하고 있는 중이라고 믿어보면 어떨까 해.
지금의 그 힘겨운 시간은
너를 무너뜨리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너를 다른 자리로 옮기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르잖아.
지금은 방향을 잃은 것처럼 보여도
너는 결국
네가 서야 할 자리로
천천히 옮겨가고 있을 거야.
그리고 병원을 떠난 그 간호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