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겨움의 심리 ]

공감이 한계에 닿을 때

by Y GUASI

글을 쓰다가

문득 과거의 관계들이 떠올랐다.
형태는 조금씩 달랐지만, 결국 구조는 늘 같았다.
누군가는 버티고, 누군가는 참고, 또 누군가는

자신을 소모하면서 살아간다.

“힘들다, 지친다, 아프다.”
그 말이 입버릇처럼 따라붙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그렇게 산다.
가족도, 연인도, 아무도 내치지 못한 채
그걸 ‘책임’이라 부르며, 마치 생존의 증거처럼
내세운다.

나는 같은 말을 들을 때마다 묘한 피로를 느낀다.
그건 연민이 아니라, 마치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거부감에 가까운 피로’다.

그래, 뭐 어쩌겠어.
그렇게 살아야 한다면 그렇게 살면 되지.
다만, 그 이야기를 내게 하진 마.

지금도 내 주변엔 그런 사람들이 많다.
“사는 게 왜 이렇게 버겁냐.”
“남편은 남편이 아니라 왼수야.”
“그래도 애 때문에 버티지.”

그들의 말은 늘 같은 자리를 맴돈다.
분노와 체념 사이, 바뀌지 않는 일상의 반복.
처음엔 내가 이상한가 싶었다.
왜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이 안 되고,
위로보다 냉소가 먼저 튀어나올까.

혹시 내가 냉정한 인간인가?
혹은, 너무 오래 이해만 하다 보니
이제는 이해가 고갈된 걸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되지 않았다.
회피형이니, 불안형이니, 성향이니…
그런 이론을 아무리 붙여도
결국 인간의 본능은 단순하다.

자기에게 해가 되는 환경이라면,
누구라도 본능적으로 거리를 두게 마련이다.
정서적이든, 물리적이든.

그걸 못 하는 건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다.
사실은 아직 그만큼 살만해서다.
고통을 말로 흘려보낼 만큼의 여유가 남아
있는 것이다.

어느 날, 그런 이야기 들이 떠오르면서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그냥 역겹다.”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딱 끊어졌다.
아, 이 사람은 내게 해로운 존재구나.
이제는 더 들어줄 수도, 감당할 수도 없구나.

그건 혐오가 아니라 직감이었다.
“이대로 계속 듣다간, 나까지 썩겠다.”
그건 잔인한 판단이 아니라
정신이 스스로 내린 경고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점검하기로 했다.
혹시 내가 잘못된 걸까?
혹시 내가 너무 냉정한 걸까?

나는 눈에 보이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성격이라,
‘내 반응이 비정상이라면 고쳐야지’ 하고 병원을
찾았다.

결과는 단 한 문장이었다.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띵했다.
이건 감정의 결핍이 아니라,
공감이 한계에 닿았을 때 나타나는
인간의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이건 냉정함이 아니라,
나를 보호하기 위한 마지막 감정의 작동이었다.

사람은 진짜 힘들면 도망간다.
정말 못 견디면 손을 놓는다.
그럼에도 붙잡고 사는 건,
아직은 살 만한 이유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공감의 끝’이 어떻게 ‘역겨움’이라는

방어로 변하는가?

그 감정은 혐오가 아니라,자기 경계를 다시

세우는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방식이다.

#유구아씨 © Y.GUASI | Record & Narr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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