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는 듯 이어지는 그들의 방식
아직도 서로의 눈을 피한 채,
아무 말 없이 지나치는 그들
회피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
루인은 복도 끝에서 비온을 보았다.
서류를 든 손이 잠시 멈췄지만, 곧 아무 일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비온 역시 그를 스치듯 지나쳐 간다.
둘 사이엔 아무 말도 없었다. 그게 끝이었다.
( 아직 나를 보면 뭐라도 말할 줄 알았는데...)
그는 그 짧은 생각만 남긴 채 눈을 감는다.
속에서는 무언가 뜯겨나가듯한 감각만 남았다.
그날 이후, 그의 회피 기제는 완전히 작동하기
시작했다.
사무실로 돌아와도 머릿속은 여전히 복도에 멈춰 있었다.
그때 평소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던 여직원, 에린이 눈에 들어왔다.
루인은 무심히 커피 두 잔을 들고 그녀 자리로
다가갔다.
“에린 씨, 저번 자료 고마웠어요.”
에린은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네? 아… 네, 팀장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그녀의 손끝이 커피잔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루인은 이미 뒤돌아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어느새 비온의 책상 쪽으로
향해 있었다.
비온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아닌데. 비온은 왜 아무 말이 없지...)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밤이 되자 루인은 클럽에 있었다.
평소엔 거의 마시지도 않던 술을,
오늘은 벌을 받듯 들이켰다.
화려한 조명 속에서도,
루인의 눈빛은 여전히 어두웠다.
웃음 사이로 공허가 섞여 있었다.
시끄러운 음악, 번쩍이는 조명, 익숙한 무감정.
친구들이 여자 무리를 데려왔다.
“루인, 이쪽 봐. 괜찮지?”
그는 웃었다. 자동적인 미소였다.
한 여자가 다가와 말했다.
“술은 제가 따를게요.”
그의 정돈된 말투, 깔끔한 옷차림,
그 매너 하나로 여자들의 시선이 몰렸다.
루인은 자연스럽게 웃고, 잔을 부딪쳤다.
그 순간만큼은 통제 가능한 관계 속에 있었다.
술이 돌고, 분위기가 흐르고,
그는 한 여자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가볍게 팔짱을 꼈고,
루인은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호텔 방 안.
여자가 씻으러 들어간 사이, 루인은 침대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봤다.
희미한 조명이, 마치 물 위처럼 흔들렸다.
이게 편하다.
감정이 없으면, 무너질 일도 없으니까.
아프지도 않겠지.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물소리가 멈추고, 여자가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나왔다.
그는 자연스럽게 팔을 뻗어 그녀를 안았다.
여자는 잠시 머뭇하다가 눈을 감았다.
그러나 가까이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닿지 않았다.
루인의 손끝이 멈췄다.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술이 갑자기 깨는 것처럼, 머리가 텅 비었다.
"…오늘은 안 되겠어요. 미안.”
그는 옷을 챙겨 들고 방을 나왔다.
문이 닫히자, 공허만이 남았다.
새벽 공기 속, 루인은 길가 벤치에 앉아 휴대폰을 켰다.
비온의 번호가 자동으로 떴다.
손가락이 통화 버튼 위에서 멈췄다.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넌 나를 보지 않으려 했지.
나는… 나 자신을 느끼지 않으려 했고.
결국, 우리 둘 다 같은 방식으로 도망쳤던 거네.
루인은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미련이 아니라, 합리화였다.
그래야만 버틸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비온의 얼굴이,
그 마지막 표정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고 되뇌었지만,
그럴수록 심장이 미쳐버릴 듯 요동쳤다.
그는 화면을 껐다.
자판기 커피를 뽑아 한 모금 삼켰다.
쓴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컵 안엔 커피가 아니라, 텅 빈 감정의 잔향만
남아 있었다.
그 시각, 비온은 야근 중이었다.
사무실은 고요했고, 형광등 불빛만이 창가에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다.
모니터엔 닫지 못한 보고서가 깜빡였다.
비온은 마지막 줄을 입력하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마치 루인의 지금 상태를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가, 다시 깊게
들이마셨다.
“이젠… 좀 괜찮네.”
스스로를 위로하듯, 그녀는 속삭였다.
작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조용히 공기 속으로
녹아들었다.
책상 위엔 작은 인형 하나가 있었다.
테라피 향이 스며든 꼬북이 인형
지나가다 “이쁘다”는 말을 듣고, 루인이
몰래 두고 간 것이었다.
비온은 인형을 들어 손에 쥐었다.
그 순간, 그때의 공기와 온도가 되살아났다.
눈물이 뚝, 떨어졌다.
복구가 아닌, 회복의 순간이었다.
너무 늦게 도착한 감정의 울음.
참으려 했지만 숨이 엉키며 터져 나왔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고, 인형을 꼭 쥔 채 비온은
소리 없이 울었다
“…말했잖아, 루인.
이건 내가 해결해줄 일이 아니라고.”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고, 단호했다.
그 끝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건 후회가 아니었다.
너무 오래 미뤄둔 감정의 복구,
그리고 누구보다 루인이 스스로 일어서길 바라는
비온의 조용하고 처절한 울음이었다.
회피형은 감정을 ‘위험 신호’로 인식한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불안을 느끼고,
그 불안을 통제하기 위해 이탈·대체·마비,
공허의 루프를 반복한다.
하지만 감정은 통제의 대상이 아니다.
회피형이 진짜 회복하는 순간은
자신의 감정을 인식할 때다.
“루인은 여전히 감정을 통제하려 했지만,
그건 회피형이 흔히 보이는
잘못된 미련의 형태였다.”
이미지는 작가가 서사의 감정 톤에 맞춰 직접 연출·생성한 시각화입니다.실제 인물 및 사건과는 무관하며,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서사 연출 이미지입니다.
© Y.GUASI | Record&Narr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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