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없는 어른들
오늘은 이태원 참사 3주기다.
아직도 그날의 참혹함은 잊히지 않는다.
살아남았지만,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었던
사람들.
결국 죄책감 끝에 스스로 희생자의 길로
들어선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나이는 너무나 어렸다.
그들 중엔, 아직 미성년자도 있었다.
(159번째 희생자 이재현 군은 참사 43일 만에
결국 숨졌다.당시 나이 16세)
그런데 당시 책임자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나왔다.
“의지가 약했다.”
희생자를 향한 말이었다.
기가 막힌다.
화면으로 보던 나조차 숨이 막혀 미칠 것 같았는데,
나라의 총리가 그렇게 말하다니.
그게 정말 인간의 말인가.
그 나이의 그들은 아직 어른이 아니었다.
감당할 수 없는 공포 앞에서,
그저 살고 싶다고 외쳤을 뿐이다.
“나 좀 살려주세요, 제발…”
그건 의지가 약한 게 아니라,
살고자 하는 본능이었다.
참사 현장에 한 경찰관이 있었다.
확성기도 없이, 목이 쉰 줄도 모른 채
터져라 외치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절규였고, 명령이었고,
마지막까지 사람을 살리려는 울음이었다.
그들을 지켜줘야 할 경찰은 인력 부족으로
이태원이 아니라 다른 곳에 배치돼 있었다.
13만 명이 몰린 인파 속에서,
현장의 안전 인력은 고작 137명뿐이었다.
159명이 숨지고, 195명이 다쳤다.
그 결과는 참사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말했다.
“어떻게 그 좁은 골목에서 그렇게 많이 죽었지?”
그 말 한마디에,
국가의 무책임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난 뒤,
모두가 오랜만에 거리의 자유를 되찾은
첫날이었다.
그런데 왜 그 집결의 위험을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까.
정말 몰랐던 걸까, 아니면 알고도 외면한 걸까.
생각할수록, 그 무심함이 안타깝고
동시에 화가 난다.
난 안네의 일기가 생각난다.
안네의 언니, 에바 프랑크는
전쟁이 끝난 뒤 40년 만에 국제인권위에서
피해자로 인정받았다.
그 긴 세월은 잊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아파서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누가 아우슈비츠의 피해자에게
“왜 이제 와서 말하냐”고,
“그땐 왜 버티지 못했냐”고 묻겠는가.
그런 말은 폭력이다.
이태원에서 잃은 젊은 생명들도 그렇다.
그건 개인의 약함이 아니라,
국가의 부재가 만든 죽음이었다.
안네의 언니 에바가 결국 구제받았듯,
그날을 살아낸 이들도 언젠가, 희생자들을
향해 말할 것이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그날의 눈물은 사라진 게 아니다.
단지 너무 깊이 내려앉아 있을 뿐이다.
지금은 아프면, 그냥 아픈 대로 괜찮다.
감정을 다 흘려보내도 된다.
어느 날 문득,
조금 무뎌지고 다시 숨을 쉴 수 있을 때가
올 것이다.
세상이 언젠가 그 고통을 대신 들어줄 테니까.
에바처럼,감정이
무뎌질 때까지만 버텨도
그건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는 것이다.
잊지 말자.
그날의 이름들은 아직 우리 곁에 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이름들이 다시 불릴 것이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정의다.
#이태원참사3주년 #추모 #트라우마
#안네의일기 #유엔인권이사회
안네의 일기 ― 에바 프랑크(Eva Schloss) 간략 소개
에바 프랑크(본명 에바 슐로스, Eva Schloss, 1929~ )는
‘안네의 일기’로 잘 알려진 안네 프랑크의
의붓언니다.
둘은 어릴 적 암스테르담에서 같은 동네에
살며 친구로 지냈다.
전쟁 중 나치의 유대인 탄압으로 함께
체포되어 안네는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
에바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
전쟁이 끝난 후,
에바의 어머니는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Otto Frank) 와 재혼하면서
에바는 안네의 ‘의붓자매’가 되었다.
에바는 살아남은 뒤에도 오랜 세월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하지 못했다.
그러다 40년이 지나서야,
국제 인권 단체의 요청과 유대인 공동체의
설득으로 에바는 처음으로 자신이 겪은
경험을 증언하기 시작했다.
그때 세상은 비로소 그녀를
“살아남은 피해자이자 증언자”로 인정했다.
“용서는 가능하지만, 잊는 건 불가능하다.”
ㅡ 에바 슐로스
그녀는 이후 평생을
전쟁과 혐오, 무관심에 맞선 인권 운동가로
살며 전 세계 학교와 유엔에서
강연을 이어왔다.
© Y.GUASI | Record & Narrat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