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하게 씩씩한 조세핀, 준 앨리슨의 <푸른 화원>

영화 속의 배우, <푸른 화원>

by 김밥


<푸른 화원>은 흑백 화면의 TV로 처음 보았다. 뭣도 모르고 보기 시작한 영화 중 한 편이었다. 엄마와 네 자매의 이야기에 끌릴 수 있던 시절이 아니어서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다음이 궁금해지는 서사적 매력도 있었지만, 마음을 움직였던 결정적 한 방은 네 자매 중에서 제일 어리고 제일 착한 소녀를 떠나보내야 하는 마음 아픈 설정이었다. 전쟁영화나 서부극의 장렬한 최후가 아니어도 감동을 전해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여자애들이 보고 눈물 흘리는 순정 만화가 엉터리만은 아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 감성적 변화를 가져다준 영화가 <푸른 화원>이었다. 초등학교 때 부모님을 조르고 졸라서 구했던 50권의 동화 전집 중에서 읽지 않고 지나쳐 버렸던 「작은 아씨들」이 그 영화의 원작이라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랐다.



“준 앨리슨(June Allyson)”이란 이름은 <삼총사>라는 영화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춤 잘 추는 진 켈리 주연의 활극 영화였다. 거기에 나오는 예쁘고도 착하디 착한 콘스탄스라는 여인의 본명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준 앨리슨이란 배우가 좋았다. 그 영화에 같이 나왔던 라나 터너라는 여배우는 그 영화에서 내게 찍혔다. 이유는 단 하나다. 착하고 예쁜 콘스탄스 즉 준 앨리슨을 해치는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 뇌리에 박힌 그녀의 그 이미지는 제법 오래갔다. 그 정도로 보호하고픈 여배우 준 앨리슨을 다시 한번 지켜보며 좋아하는 배우임에 틀림없다는 방점을 찍게 만든 영화가 <푸른 화원(花園)>이었다. 콘스탄스와는 전혀(?) 다른 괄괄한 아가씨 조세핀 역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푸른 화원 (Little Women, 1949)




지금까지 여러 번 영화화된 작품 그것도 문학작품이 원작이 된 영화는 많기도 많을 것이다. 「작은 아씨들(Little Women)」은 그중에서도 손꼽혀야 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드라큘라, 셜록 홈스, 달타냥과 삼총사 그리고 007 제임스 본드같이 주인공의 활약이 확실한 원작들은 이리저리 상업적으로 디딜 구석이 많아서 영화로 많이 만들어지긴 했어도 원작 그대로라고 보긴 힘든 영화들이 많다. 그런 점에서 작은 마을에서 한 가족을 배경으로 특별한 액션이나 충격적인 반전도 없는 잔잔한 이야기를 자주 영화화한 작품이라면 「작은 아씨들」 말고 또 있을까 싶은 생각마저 드니 「작은 아씨들」이 손꼽혀야 한다는 생각에. 영화로 만들어질 때마다 수준작으로 평가받았던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제목을 ‘푸른 화원’이라고 붙였을까? 「작은 아씨들」이 원작인 걸 안 다음부터 개봉 제목을 그렇게 지은 이유가 궁금했다. 생각이 가는 대로 이것저것 자료를 찾아봐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1949년도 버전의 영화 개봉 이전에 원작 소설 제목을 「푸른 화원」이라고 붙였던 흔적도 찾지 못했고, 1933년도 영화의 제목을 <푸른 화원>이라고 붙이지도 않았으며, 다른 나라의 제목이 그랬던 흔적도 찾지 못했다. 추정이지만, 원제와 상관없이 감성적으로 그럴싸한 제목을 붙이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싶다. 이 영화의 감독 머빈 르로이 감독의 작품만 하더라도, <Waterloo Bridge>가 <애수>가 되고 <Random Harvest>가 <마음의 행로>가 되었듯이.



1955년의 신문광고
1963년의 신문광고


<푸른 화원>은 1949년도 영화지만 우리나라에서는 1954년과 1964년에 개봉했었다. 당시의 신문에서 영화평을 찾아보았다.

...아름다운 화면을 통하여 ‘포퓨러’한 감상과 미국인다운 경쾌한 ‘유모어’를 떠뜨려놓고 있는데 역시 국문 자막의 미흡으로 원의 기분은 십분 파착(把捉)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줄거리가 가지는 통속성에 끌려 촬영 기법도 깊이 파고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자미(滋味) 있게 만드는 점에만 시종한 감이 없지 않다. 말하자면 아름답고 구경하기에 자미가 나는 영화에 그쳤다고 하겠다. (1954년 10월 18일 조선일보)

작품성보다는 통속적 재미에 그쳤다는 평을 하며, 자막의 미흡함도 지적하고 있다.


10년 후 재개봉했던 1964년의 신문에서는 특색 있게 이 영화를 소개하고 있었다. 유행하던 배우들에게 초점을 두고 있는 면이 재미있었다.

...이 영화에서는 인기 상승 중인 신진일 때 리스가 18세 마거리트 오브라이엔이 11세의 신선발자(新鮮潑刺)한 모습들이다. (1964년 2월 3일 경향신문)

이 기사에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마거릿 오브라이언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사진에 “<푸른 화원>의 ‘리즈’와 ‘오브라이언’”이라는 설명을 붙여 영화를 소개하고 있었다.



또 하나의 당시 칼럼에서는, 비평 차원에서 썼다기보다는 편안하게 이 영화의 장점을 전해주려는 면으로 보여서 오히려 인상적이었다.

“흘러간 좋았던 옛날들”을 생각게 해주는 전형적인 ‘하트 워밍’형 영화로서 뭉클하고 ‘찡’하는 대목이 군데군데 있는데 ‘머빈 르로이’ 감독은 한창때의 대가다운 솜씨로 짜임새 있게 다듬어놓았다. (1964년 2월 2일 조선일보)




원작 「작은 아씨들」에서는 물론 이 영화 <푸른 화원>에서도 주인공에 제일 가까운 작은 아씨는 “조세핀”이다. 줄여서 “조”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그녀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조의 역할로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바람에 준 앨리슨이 더 좋아지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작은 흑백 화면으로 보았던 한계는 있었겠지만, 이때 준 앨리슨의 나이가 31세였다고 하는데도 10대 소녀처럼 보였던 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준 앨리슨이란 배우를 손가락에 꼽을 만큼 좋아했던 이유는 더도 덜도 말고 편하게 보인다는 면에서였다.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것 같은 외모 탓일까? 그런 외모에 그런 역할을 맡는다고 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당연히 거기에 어울리는 연기가 따라야 한다. 당시 그녀의 연기에 대해서 "연기라기보다 그 사람 자체"라는 말이 따라다녔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다고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보였으니 그런 역할을 맡겼을 터라고 해도 그럴 것 같고, 그런 역할을 잘 해냈으니 그렇게 보였을 터라고 해도 그럴 것 같으니.




조(조세핀)의 역할로 유명한 배우를 꼽으라면 단연코 캐서린 헵번이라고들 한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로 유명한 그녀지만, 1933년도 버전 <작은 아씨들>에서 조 역할을 잘 해낸 걸로도 유명하기 때문이다. 원작의 조를 가장 잘 표현한 배우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내 눈으로 처음으로 보았던 “조”는 준 앨리슨이었다. <푸른 화원>이 처음 본 “작은 아씨들”이었으니까. 그러다 보니 제일 먼저 마음에 새겨진 조는 준 앨리슨이 연기한 조였다. 철없는 머슴애같이 구는 개구쟁이이면서도 가족에게 자신의 역할을 다하려 애쓰며 결코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았던 그녀였다. 캐서린 헵번의 도전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조의 이미지가 더욱 인상적일 수도 있겠으나 먼저 본 조가 준 앨리슨이었고 그녀로부터 느낀 조의 따뜻함을 잊을 수 없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1949년 영화는 원작보다는 1933년도 영화의 각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니 서사는 비슷한 데도 조세핀의 느낌은 달랐다. 그 정도로 두 배우가 연기한 조에 대한 느낌은 살짝 대척점에 서 있었다. 굳이 두 조세핀을 비교하려고 꺼낸 얘기는 아니지만, 준 앨리슨의 조세핀이 내게 준 감동을 캐서린 헵번의 조세핀이 그대로 주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는 개인적 느낌을 말하는 것이다.




1868년에 탄생한 원작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각색되는지 그리고 어디에 초점을 두고 연출하는지에 따라 영화 <작은 아씨들>의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면이 있었다. 1949년도의 작품 <푸른 화원>은, 굳이 따지자면 2차 세계대전과 냉전 시대의 영향을 받기 쉬운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안정, 가정, 가족의 화합이라는 면을 강조하는 분위기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담을 뛰어넘어 다닐 정도로 활달하고 누구 앞에서나 씩씩한 성격의 “조세핀 마치”라면, 1949년 언저리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시대였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푸른 화원>의 조세핀은 어느 시대의 조세핀보다 자신을 희생하며 가족을 지키고 갈등을 줄이는 데 애쓸 수밖에 없었을지도. 자신의 열정을 불태우는 독립적 여성보다는 상황에 순응하고 안정에 힘을 싣는 이미지가 필요한 때였는지도. 그래서 발탁된 조세핀이 준 앨리슨이었을지도.


<푸른 화원>은 작품적으로는 평이한 걸로 평가되는 면이 있지만, 관객들에게는 포근하게 다가오는 감동이 있었다. 그 동네, 그 가정, 그 가족, 그중에서도 가장 큰 활약을 펼치는 캐릭터를 꼽으라면 조세핀 마치와 베스 마치를 들 수 있다. <푸른 화원>에서의 조세핀과 베스는 영화화된 작품 중 가장 부드러운 조세핀과 가장 착한 베스로 보이기도 했는데, 거기에 얽힌 에피소드도 남아있다. 준 앨리슨이 자신과 마거릿 오브라이언이 그 회사(MGM) 최고의 “울보 배우”라는 농담을 했다고 한다. 둘이 함께 연기할 때 너무 많이 울어서. 베스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의 조세핀을 연기했던 준 앨리슨이 그날의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서 나머지 촬영을 포기했다고 하니 말이다. 이야기 속의 조세핀과 베스에게 그 배우들이 빙의(憑依) 되었나 보다. 베스는 어디서나 약하고 착한 캐릭터였지만, <푸른 화원>의 조세핀은 정열적인 면보다는 따뜻한 면을 앞세웠던 캐릭터였다. 그렇기에 다른 조세핀보다 약한 캐릭터로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외유내강형 캐릭터로 볼 수도 있지 않은가? 실제로 보기는 더 힘든. 준 앨리슨의 조세핀이 보다 매력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중이다.



<푸른 화원>의 클라이맥스라고 하면 베스의 죽음이고, 조세핀이 소설을 마무리하는 장면으로 대단원의 막이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한다. “나의 베스”라는 제목과 “조세핀 마치”라는 이름을 쓰고, 다음 페이지에 “지금은 떠나고 없는 내 동생 베스에게 바친다. (Dedicated to my sister Beth who is now parted from me.)”는 문자 대사로 – 더빙이었던 그때의 대사를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한다 – 베스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린다. 조가 진정으로 자신의 가슴에 사무친 이야기를 썼다는 느낌이 감동으로 다가왔던 장면이다. 거기서 받은 감동이 너무 커서였는지 그걸로 영화는 끝난 걸로 생각될 정도였다. 멍했던 기분에 그 뒤로는 무슨 장면을 보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조가 쓴 책은 동생 베스가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에 대한 답변이었을 것이다.


난 언니가 그리울 거야... 하늘나라에서도.

I think that I will be homesick for you... even in Heaven.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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