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의 혁신인가, 체형의 억압인가?
“슬로건이 ‘모두에게 맞는 원 사이즈(One Size Fits All)’라더니, 그 사이즈가 ‘스몰’이더라고요.” 최근 한 유튜버의 영상이 90만 회의 조회수를 돌파하며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해당 영상에서 소개된 브랜드는 미국 10대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여성 의류 브랜드, ‘브랜디 멜빌(Brandy Melville)’인데요. 이 브랜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체형이 작은 사람만 입을 수 있는 '원 사이즈' 옷만을 판매한다는 점입니다. 단 하나의 사이즈, 즉 엑스스몰(XS)이나 스몰(S)만을 고집하는 브랜드에게 과연 ‘모두를 위한’ 의류라는 슬로건이 적합할까요?
이에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미국 10대 소녀들 사이에서는 브랜디 멜빌의 옷을 입을 수 있는지 여부가 인기의 척도로 여겨진다”고 보도했습니다. 또한 “이 브랜드가 마른 체형의 10대들에게 자신의 체형을 ‘특권’으로 여기게 한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는데요. 미국 10대 소녀들이 멜빌의 옷을 입기 위해 극단적인 체중 감량을 하는 ‘브랜디 멜빌 챌린지’의 유행 역시 그 이면의 불안감을 여실히 보여주는 듯합니다. 브랜디 멜빌을 소화하는 사람은 곧 '날씬한 사람'이라는 공식이 암암리에 성립되고 있는 걸까요. 이러한 후일담 속, 지난 9월 브랜디 멜빌이 성수동에 상륙하며 우려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원 사이즈’가 모든 사람에게 적합한 개념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그 귀추가 주목되는 것이죠.
원 사이즈 의류는 20세기 중반, 대량생산과 표준화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등장했습니다. 당시 의류 제조업체들의 최우선 과제는 비용 절감과 생산 효율성 향상이었고, 그 요구에 부합하기 위해 하나의 사이즈로 ‘다양한’ 체형을 포괄할 수 있는 원 사이즈가 탄생한 것인데요. 신축성 있는 소재와 넉넉한 디자인으로 생산 공정을 단순화시켰고, 재고 관리 역시 용이해졌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마른 체형만을 위한 특권으로 전락하자 개인화된 취향을 중시하는 현대 소비 트렌드에 부합하지 않게 되었죠. 결국, 원 사이즈 의류는 그 출발점에서의 실용성을 잃고, 특정 체형을 이상화하는 의미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원 사이즈 의류는 여성 신체에 대한 사회의 편향된 인식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브랜디 멜빌이 마른 체형의 백인 여성 모델을 전면에 내세워 이상적인 미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듯, 원 사이즈 의류는 마르고 가는 체형이 아름다운 여성의 전형이라는 왜곡된 관념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인데요. 이러한 시각은 '평균적 몸'과 '보편적 사이즈'에 대한 사회적 관념을 반영하고 있으며, 특히 여성에게 더 협소하게 적용되는 경향이 있어 심각한 문제를 드러냅니다. 홍익대학교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의 김진영 교수는 “한국 여성들은 미에 대한 기준이 비슷하고 몸무게나 사이즈에 대한 강박이 있다. 사이즈가 없으면 생산자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 몸이 뚱뚱하다고 본인을 탓하면서 다이어트를 통해 기준을 맞추려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죠.
앞서 언급한 원 사이즈 의류의 부정적인 면에도 불구하고 국내 원 사이즈 의류 브랜드들은 여전히 상당한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데이터저널리즘 팀 다이브의 분석에 따르면 무신사와 29CM에서 최근 올라온 여성복 4만 5,678개의 상품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전체의 39%가 ‘프리사이즈’로 판매되고 있었는데요. 남성복이 4만 4,939개 중 6.8%만 프리사이즈인 것과 비교해 보면 확실히 프리사이즈 여성복 비율이 높습니다. ‘프리(free)사이즈’라는 단어는 누구나 자유롭게 입을 수 있는 옷이라는 느낌을 주지만, 실제로는 그 의미가 퇴색하고 있는 상황이네요.
이에 전문가들 또한 온라인 쇼핑몰에서의 사이즈 정보 제공 개선과 다양한 체형을 반영한 새로운 사이즈 체계 개발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일반적으로 국내 여성복 사이즈는 44•55•66으로 분류되며, 그 이상은 빅 사이즈로 나뉘는데요. 이 기준이 제정된 1981년, 우리나라의 20대 성인 여성 평균 키는 155cm, 가슴둘레는 85cm였고, 이 두 숫자의 끝자리 5를 따서 ‘55’라는 사이즈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20대 성인 여성의 키 160cm, 가슴둘레 90cm로 평균 사이즈가 증가하자, 더는 기존의 사이즈 표기법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국가기술표준원이 1999년, 의류 치수 표기법을 삭제하였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과거의 사이즈 측정법이 익숙하다는 이유로 고수되어, 여전히 많은 여성복이 55 사이즈를 기준으로 제작되고 있죠.
하지만 일각에서는 마른 체형을 선호하는 소비자의 수요로 인해 제조업체도 어쩔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매스미디어의 영향으로, 마른 체형의 연예인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습은 대중에게 강력한 인식을 심어줍니다. 이에 따라 많은 이들은 “살을 빼면 연예인처럼 예뻐질 수 있다”는 환상을 품고, 특정 다이어트 비법이 유행이 되어 퍼지게 되죠. 마른 몸이 미의 기준으로 정착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살찌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당연한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가시적으로 보이는 구조적인 문제들만이 현 여성복의 흐름을 악화시킨 것은 아닐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경제적인 손길이 여성의 심리를 건드리는 것도 중요한 원인인데요.
쇼핑몰에서는 오히려 이러한 소비자들의 심리를 이용해 사이즈를 작게 표기하고 있다는 후문입니다. 예를 들어, 실제로 M 사이즈이지만 S 사이즈로 표기된 옷을 구입했을 때, 자신이 더 작은 옷을 입게 되었다는 만족감을 느끼게 되는 현상을 반영한 것이죠. 이렇게 소비자들이 쇼핑몰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도록 유도하고, 결국 높은 수익 창출로 이어지게 만드는 마케팅 기법을 ‘배너티 사이징(Vanity Sizing)’이라고 부르는데요. 겉으로 보기에는 기업 입장에서 경제적인 성공을 도모할 수 있는 전략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명확한 의류 표준 규격에 혼란을 야기한다는 사실. 결국, 브랜디 멜빌 또한 이처럼 날씬한 몸을 추구하는 전 세계 Z세대의 욕망을 원동력 삼아 사업을 확장한 형상으로 보이네요.
“가부장제에서는 여성의 가치를 외모로 축소하여 끊임없이 여성 스스로 자신의 몸으로부터 소외되도록 해 온 역사가 깊죠. 그런 ‘아름다움’의 기준이 점차 ‘마른 것’과 ‘하얀 피부’가 되어 온 것 같아요”(손희정 평론가) 에디터는 여성과 남성 모두가 사회가 정해 놓은 성별의 틀에 갇혀야 한다는 강요는 더 이상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체형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자연스럽게 소비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제품과 사이즈도 다양해지지 않을까요? 사회는 사람들이 의식하고 행동하는 대로 변화하기 마련이니까요. 이제는 더 이상 ‘여자다운’ 혹은 ‘남자다운’이라는 틀을 씌우며 옷을 입기 위해 고민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오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