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과 창작의 반복 속에서
지난 5일 발매한 5세대 신예 보이그룹 라이즈(RIIZE)의 신곡 ‘러브 119’,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나요? ‘러브 119’는 2005년 발매된 밴드 이지(izi)의 히트곡 ‘응급실’을 샘플링해 만든 곡입니다. ‘응급실’의 킬링 구간으로 꼽히는 도입부의 감미로운 피아노 라인을 따오며 티저 공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샘플링이란 원곡의 특정 부분만 추려 새로운 곡에 덧붙이는 방법입니다. 기존 원곡 전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리메이크 방식과 달리 곡의 일부만을 활용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샘플링은 사람들에게 이미 익숙한 멜로디를 들려주기 때문에 새로운 곡을 제시해도 어느 정도의 익숙함과 대중성이 보장되어 있죠. 대중의 선택을 받은 곡이기에 어느 정도의 작품성 또한 보장되어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K-POP의 ‘이지 리스닝’ 흐름과 함께 최근 발매한 음원들 중 이처럼 샘플링을 활용한 곡을 여럿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시로 바흐의 ‘G 선상의 아리아’를 샘플링 한 레드벨벳(Red Velvet)의 타이틀곡 ‘Feel My Rhythm’이 있죠. 서정적인 클래식 음악을 댄스곡으로 전환하며 부드럽고 신비로운 레드벨벳만의 세계를 그려냈습니다.
클래식 명곡을 샘플링하는 시도는 예전부터 계속되어 왔는데요, 89년 발매한 변진섭의 2집 수록곡 ‘희망사항’에 조지 거슈윈의 ‘Rhapsody in Blue’가 삽입된 것이 국내 대중음악 최초의 클래식 샘플링 곡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클래식 샘플링이 주는 익숙한 멜로디와 함께 큰 시너지를 일으킨 곡들은 지금까지 꾸준히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익숙함은 부정적인 기시감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우선 샘플링에는 자칫 잘못하면 원곡의 아우라에 짓눌릴 여지가 있는 위험성이 존재합니다. 또한, 저작권은 저작자 사후 70년까지 보호되기 때문에 100여 년 이상이 지난 클래식 명곡들은 저작권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이로 인해 사용이 자유롭다 보니 클래식 샘플링 곡들이 난무해 너무 쉽게 대중성을 확보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창조적인 변화가 없는 사용은 모방에 그칠 뿐이죠. 과연 대중들이 개성 없는 익숙함에서 완전성을 찾을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이번 ‘러브 119’가 여기서 준 차별점은 클래식과 달리 색채감이 강한 대중음악을 재해석한 것입니다. 기존 록발라드 곡을 팝 댄스로 변주했으며, 사랑을 되돌리고 싶어 하는 슬픈 감정을 노래한 원곡과 달리 첫사랑에 빠진 풋풋한 감정을 응급상황에 빗대어 표현하며 전체적으로 원곡과는 확연히 다른 결을 보여주죠. 지난 아이브(IVE)의 ‘After LIKE’의 성공 사례와 비슷한데요, 로비 윌리엄스의 ‘Supreme’의 간주를 샘플링 한 화려한 신스 리프는 곡의 이미지와 맞게 적절히 편곡되어 곡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더 찬란하게 만들어줍니다. 두 곡 모두 원곡과 확연히 다른 색깔의 결과물을 만들어냄으로써 기시감을 덜어내고 신선함을 더한 성공 사례를 만들어냈습니다.
샘플링은 이제 전 세계 청자를 대상으로 하는 K-POP이 쉽게 대중성을 확보하는 전략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샘플링은 실패를 피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예술은 항상 모방에서 시작합니다. 샘플링 유행 시대 속 등장한 위와 같은 히트곡들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모방과 창작 속에서 발전을 이루는 것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작곡가만의 개성을 담아 발전해 나가는 샘플링 곡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음악과 무대가 기대됩니다. 지금도 실험적인 음악가들은 매우 창의적인 샘플링의 요소와 방식에 관해 고민하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