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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고 Oct 22. 2022

콩코드와 게달리오 그린버그

20세기 시계 업계에 등장했던 독특한 인물인 게달리오 그린버그(1931-2009)는 1970년 콩코드(Condord)를 인수하면서 티파니 전쟁의 주인공이 된다. 게달리오 그린버그는 미국에 정착한 후 미국식 이름인 게리(Gerry)로 알려지게 되지만 쿠바 출신의 시계 판매상이다.


그린버그의 사업적 재능은 어려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린버그의 아버지는 러시아출신으로 러시아혁명으로 살기 어려워진 러시아를 떠나 파키스탄에 도착하여 결혼했으나 열대지방에서의 삶에 적응하지 못했다. 1930년 쿠바를 거쳐 미국으로 가려고 했다. 미국의 비자발급이 늦어지자 쿠바에 머물다가 1944년 하바나로 옮겨 쥬얼리 가게를 열게 된다. 


그가 15살이었을 때 알람 클럭을 찾는 사람과 만나 얼떨결에 판매 약속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 가게에서 보긴 했지만 가격표까지는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게달리오는 아버지의 가게에서 하나를 가져다가 그에게 약속한 가격에 팔았다. 정확한 가격도 모르고 약속을 하고 그 금액에 파느라 실제로는 손해를 보았지만 그는 그 경험을 통해 판매자의 정직함과 말의 책임에 대해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그 거래를 시작으로 어린 나이에 알람 클럭을 판매하는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첫 번째 거래에서 손해를 보았지만 결국 그는 알람 클럭 판매로 손해 본 이상의 돈을 벌기 시작한다. 어린 나이에 실수를 하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타고난 사업가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린버그는 하바나 대학을 다니면서 아버지의 가게에서 일하며 알람 클럭 장사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졸업 후에는 아버지의 쥬얼리숍에 오메가 시계를 공급하던 파비앙 바이스와 친해지며 손목시계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쿠바는 미국 관광객들이 많았고, 관광객들이 놀러왔다가 시계를 구입하는 일이 많았다. 파비앙 바이스는 오메가에 이어 피아제를 공급했다. 그러나 그린버그가 바이스와 함께 쿠바에서 오메가와 피아제 판매에 열중하던 시절 쿠바 혁명(1953-1959)이 시작되었다. 그린버그는 피델 카스트로 정부의 멤버로부터 자본주의자로 의심을 받고 위협을 받는 상황이 되자 바이스와 함께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의 마이애미로 탈출하게 된다.


1960년 그는 29살의 나이로 아내와 2명의 아들을 데리고 미국 땅에 도착했다. 미국 정착 초기에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는 파비앙과 그의 아들인 호세의 투자를 받아 스위스로 갔다. 오메가는 미국 내에 판매조직이 있었다. 그러나 피아제는 아직 미국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피아제의 해외판매 담장자였던 카밀 필레와 협상하여 미국과 푸에토리코에 대한 독점판매권을 얻게 된다. 그리고 가방 하나에 피아제 시계를 가득 넣어 미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1961년 '피아제 시계 회사'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티파니와의 인연은 그가 제네바에서 가져온 피아제 시계를 납품하면서 시작되었다. 티파니 외에도 반 클립 앤 어펠스, 네이만 마르쿠스 등에도 피아제 시계를 납품했다.


그는 이 무렵 저널리스트인 반스 패커드(Vance Packard)가 쓴 '사회적 신분을 추구하는 사람들(The Status Seeker)'를 읽으며 실용적인 미국인들에게 '신분의 상징'으로 고급 시계를 판매한다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이후 그는 미국에서 대학 졸업 선물 정도로 인식되던 시계를 부자들이 골드 와치를 손목에 두르는 것이 '신분의 상징'으로 여기도록 인식을 전환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뉴욕타임스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게달리오 그린버그(1931-2009)


그린버그는 여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귀금속을 남자들에게 시계라는 형식을 통해 '신분의 상징'이자 '성공의 상징'이 되도록 마케팅을 펼쳐나간 인물이다. 마케팅이야 말로 20세기에 대량생산 가능해진 공산품을 럭셔리 제품(천문학적인 가격으로 경매가 이루어지는 예술품)으로 둔갑시키는 마법이자 혁명이었던 것이다.


1965년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바이스 가족이 가지고 있던 지분을 구입하고, 다른 제품도 판매할 수 있도록 회사명을 북미시계회사(North American Watch Company)로 바꾸게 된다. 그리고 그가 본격적으로 꿈을 실현할 기회도 빠르게 다가왔다. 누군가는 파산을 피할 수 없는 어려운 시기가 어떤 사람에게는 성공할 찬스가 된다는 것을 몸으로 직접 보여준 인물이 바로 그린버그였다. 스위스 브랜드들이 하나 둘 파산하던 시절에 파산한 스위스 브랜드들을 인수하여 성공스토리를 만들어나간 첫 번째 인물이 바로 쿠바 출신의 그린버그이다.


뉴욕 외에 미국 전역에 판매망을 가지고 싶었던 그린버그는 1969년에 제니스와 통합된 모바도에 관심을 가졌다. 모바도는 미국 전역에 판매망을 가진 회사였다. 모바도의 뮤지엄 시계도 당시 판매량은 신통치 않았지만 그에게는 잠재력을 가진 시계로 보였다. 사업여건상 제니스에 통합되었지만 모바도는 창업자 가족에 의해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므로 1969년에 모바도를 인수하는 것은 실패하게 된다.


그린버그는 1970년 콩코드가 파산하자 이를 인수하여 콩코드의 사업을 이어받게 된다. 피아제 딜러에 불과했던 그린버그는 이를 계기로 미국에서 시계 사업을 시작한 지 9년 만에 스위스와 미국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시계 브랜드의 사장이 되었다. 한편, 코룸은 1972년 '코인 시계'라는 미국의 20달러 금화(더블 이글)를 사용하여 이전의 코인 시계와는 차별화된 실제로 사용되던 금화로 만든 시계를 처음으로 발매한다. 코룸은 1955년 스위스 라쇼드퐁에서 처음 시작된 신생 브랜드였다.


골드와 얇은 것이 럭셔리로 성공하는 기본 규칙이라고 생각했던 그린버그는 코룸의 시계가 성공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즉시 스위스로 달려가 코룸의 북미 판매를 전담하게 된다. 그의 예상처럼 코룸의 금화(Gold Coin) 시계는 레이건 대통령이 애용하고, 알 파치노가 '스카페이스'에 출연하며 착용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그린버그는 피아제에 이어 코룸의 성공으로 엄청난 이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이런 성공을 통해 '슬림한 골드 시계'를 기획하는 일에 전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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