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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고 Oct 22. 2022

장 클로드 비버와 블랑팡

쿼츠 혁명기의 풍운아


쟝 클로드 비버(1949~)는 1949년 룩셈부르크에서 태어났으나 1959년 부모를 따라 스위스 발레 드 쥬 지역의 로잔으로 이주하게 된다. 1975년 로잔대학의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자크 피게의 소개로 오데마 피게에 입사하게 된다. 


오데마 피게에 입사 면접을 치를 때 당시 오데마 피게의 사장이었던 골레이(1921-1987)는 1년간 봉급의 절반을 받으며 인턴으로 근무하는 것을 조건으로 비버에게 유럽 세일즈를 맡기게 된다. 비버는 1년간 회사 내의 시계기술자들과 매일 만나며 시계기술자들의 사고방식을 배우며 한편으로 제품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브랜드의 역사부터 철저히 공부하여 고객에게 제품을 소개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오데마 피게는 1972년 로얄 오크를 출시하였지만 이태리 외에서는 큰 인기가 없었다. 그 입사한 1975년은 오데마 피게에서도 쿼츠 시계도 만들고 다양한 브라슬렛 일체형의 금시계를 만들며 쿼츠 혁명과 함께 찾아온 스위스 프랑의 환율으로 인한 어려움을 버티고 있던 시기였다. 


한편, 1년간의 인턴과정을 마친 비버는 유럽을 돌아다니며 오데마 피게 세일즈를 진행하며 사장인 골레이에게 기계식 시계 신제품에 대한 제안서를 여러 번 내지만 비버의 제안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회사 사정이 나아져 새로운 제품을 출시하려면 14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라는 답변만 들었다고 한다. 당시 소규모 회사였던 오데마 피게로서는 1972년에 개발한 로열 오크의 판매량이 서서히 증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기획한 퍼페츄얼 캘린더에 집중하고 있던 터라 새로운 컨셉의 신제품을 추가로 발매하는 것은 회사의 재정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20대의 나이로 도전적이었던 비버로서는 자신이 40대나 되어야 새로운 세일즈가 가능하다는 대답에 실망하여 4년 후인 1979년 오데마 피게를 떠나 대기업인 오메가의 세일즈 매니저로 입사하게 된다. 오메가에서 그에게 주어진 업무는 오메가의 금시계 판매를 높이기 위한 제품과 마케팅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스와치 니콜라스 하이에크 회장(1928-2010)


오메가는 황동 혹은 스텐레스 스틸에 금도금(골드 캡 포함)을 한 시계를 너무 많이 팔았던 과거로 인해 금시계를 만들어도 금도금 시계로 보이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1980년대는 매년 성능이 향상되고 기능이 다양해진 새로운 모델들이 등장하는 쿼츠 시계들의 전성기였고, 기계식 시계들은 경쟁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이때 비버가 출시한 시계가 오메가의 쿼츠 금시계인 'De Ville'이었다. 시간을 맞출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크라운을 제거한 시계였다. 그러나 1981년 오메가에 입사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비버에게 위기가 닥친다.


당시 SSHI와 ASUAG를 통합하는 자문역할을 맡았다가 스와치의 대주주가 된 니콜라스 하이에크에 의해 스위스 시계산업을 쿼츠 시계를 중심으로 재편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이에크의 이 결정에 따라 오메가와 론진의 오랜 역사를 가진 기계식 무브먼트들의 생산이 중단되고 제조 설비들도 폐기되게 된다. 


시계 제조나 판매에는 문외한이었던 하이에크의 독단적인 결정에 불만을 느낀 당시 오메가의 사장 프리츠 아만이 사직하고 하이에크가 임명한 새로운 사장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만 사단으로 분류되던 비버는 사장과 함께 사직하고 회사를 떠나게 된다.



한편, 1961년 SSIH에 통합된 빌러레(Villeret)의 레이빌(Rayville)은 제한-자크 블랑팡이 1735년에 창업한 브랜드였으나 1932년 설립자 가문의 후계자가 사업을 포기하면서 '레이빌'로 회사 이름을 변경하게 된다. 그러나 그 후에도 '블랑팡'이라는 브랜드를 계속 사용하면서 '레이빌의 블랑팡'이라는 조금 복잡한 명칭이 생기게 되었다.


블랑팡은 1920년대 영국의 시계 기술자 존 하워드가 발명한 자동 무브먼트를 제품화하여 세계 최초로 자동 무브먼트를 개발했지만 파텍 필립이나 바쉐론 콘스탄틴 같은 고가의 시계를 제조 판매한 역사는 없었다. 1930년대 이후 틈새시장이었던 여성용의 작은 무브먼트를 만들어 그루엔, 엘진, 해밀턴 등 미국 회사들에 납품하며 레이디버드(Ladybird)라는 모델명으로 판매하던 여성 시계 전문 브랜드였다.


1961년 SSIH에 통합된 후에도 '블랑팡'은 오메가와 티솟의 약점이었던 여성용 소형 무브먼트와 보석 시계를 생산하며 1970년에는 연 20만 개를 생산할 정도로 여자용 보석 시계 전문 브랜드로 성장한다. 그러나 쿼츠 시계가 전성기에 들어선 1975년 바젤 페어 참석을 마지막으로 생산과 판매를 중단하며 동면에 들어가게 된다. 


블랑팡의 생산이 중단된 시기에 오메가에 근무하던 비버는 1735년이 설립되어 스위스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블랑팡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하이에크의 강압적인 회사 운영으로 오메가를 그만두고 새로운 출발을 준비를 하던 비버는 블랑팡의 상표를 구입하여 쿼츠 시대에 역행하는 소규모의 하이엔드 기계식 시계 회사를 창업할 생각으로 자크 피게와 상의하게 된다. 오데마 피게에서 근무하던 당시 진행되던 퍼페츄얼 캘린더 개발을 지켜보았던 것이 오데마 피게 급의 슈퍼 하이엔드 브랜드를 지향하는 블랑팡을 시작하게 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프레드릭 피게에서 무브먼트를 제조하여 1735년에 설립된 오랜 역사를 가진 블랑팡의 브랜드로 최고가의 컴플리케이션 시계를 판매하는 사업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컴플리케이션과 슬림 무브먼트가 오랜 가업이었던 피게가 흥미를 보이자 21,500 스위스 프랑을 지급하고 블랑팡 브랜드만 구입하게 된다. 그리고 프레드릭 피게의 공장에서 가까운 발레 드 쥬의 루이 엘리제 피게의 농장에 회사를 차린다. 비버 전설의 시작이다.



블랑팡 : Blancpain



비버의 인터뷰에 따르면 비버 자신도 그 무렵 명확히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자크 피게와 함께 블랑팡을 창업한 1983년에 기계식 시계가 부활하고 있다는 변화들이 느껴졌다고 한다. 당시 만네스만에서 인수한 르 쿨트르와 IWC의 사장이었던 귄터 블륌라인이 기계식 시계 부흥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오이스터 쿼츠를 개발했던 롤렉스에서 기계식 시계 생산을 중단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Since 1735 Blancpain has never made a quartz watch and never will.'

'1735년부터 블랑팡은 쿼츠 시계를 만든 적도 없고 앞으로도 만들지 않을 것이다'


라는 모토에 따라 자크 피게는 블랑팡을 오로지 기계식 시계만 만드는 회사로 창업했다. 당시 30대의 나이로 젊은 사장이었던 비버의 패기와 미래에 대한 믿음이 가져온 도전이었다. 하지만 그가 동업한 프레드릭 피게 역시 기계식 무브먼트의 생산을 중단하고 쿼츠 무브먼트를 생산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생산이 중단된 프레드릭 피게의 슬림 무브먼트 대신 푸조의 슬림한 수동 무브먼트인 푸조 7001(두께 2.5 밀리)에 문페이스와 캘런더를 추가한 시계를 만들어 1984년 바젤 페어에 등장하게 된다. 그가 오데마 피게에서 근무하던 시절 쿼츠와 경쟁하기 위해 개발된 것은 퍼페츄얼 캘린더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비버 역시 문페이스와 캘린더 기능을 가진 시계가 성공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창업 이후 지속적으로 자금 압박을 받던 비버는 골드 제품을 주문받을 경우 판매대금의 일부를 선금으로 받아야 했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자동차에서 슬리핑백 속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했다고 한다.


1985년부터는 프레드릭 피게가 재생산한 슬림 무브먼트와 캡트가 개발한 무브먼트들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문페이스 캘린더 모델은 그 후 자동 모델로 변경되며 캡트가 개발한 슬림 자동 무브먼트(칼리버 95)를 사용하여 자동 모델로 판매된다. 또한 피게의 슬림 무브먼트들의 재생산되면서 블랑팡은 피게 21을 사용하는 울트라 슬림 수동 모델, 피게 70을 사용하는 울트라 슬림 자동 모델도 판매되며 본격적인 블랑팡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듬해인 1986년에는 자동 퍼페츄얼 캘린더 모델을 발표하고, 1988년에는 당시 가장 작은 수동 미니츠리피터(두께 3.3 밀리)와 자동 미니츠리피터(두께 4.85 밀리)를 발표했다. 1989년에는 퍼페츄얼 캘린더와 미니츠리미터를 결합한 자동 시계를 발표하여 단기간에 파텍 필립이나 바쉐론 콘스탄틴이 오랜 역사를 통해 판매해 온 다양한 컴플리케이션들을 일 년에 한, 두가지씩 발표하게 된다. 그리고 이에 동반하여 본격적인 쿼츠 시대에 '쿼츠 시계는 만들지 않는다'는 도전적인 마케팅도 시작되면서 블랑팡은 파텍 필립과 바쉐론 콘스탄틴에 비교되는 하이엔드 브랜드의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게 된다. 블랑팡은 노포들에서 제조해 온 기존의 컴플리케이션들을 투루비용 모델만 제외하고는 모두 자동 무브먼트로 실현하면서도 가장 슬림한 시계를 제조했다.


블랑팡 자동 스플릿 세컨드 크로노그래프 1186


1988년과 1989년에 발표한 자동 크로노그래프가 블랑팡의 가장 유명한 모델이다. 당시로서 가장 슬림한 자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버티컬 클러치 방식)인 칼리버 1185와 스플릿 세컨드 칼리버 1186이 개발되었던 것이다.  블랑팡 이전에 파텍 필립이나 바쉐론 콘스탄틴 같은 슈퍼 하이엔드 브랜드에서 자동 크로노그래프를 발표한 적이 없었다. 프레드릭 피게에서 이 시기에 개발한 크로노그래프들은 1990년대 이후 바쉐론 콘스탄틴, 오데마 피게 등에 공급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25년 이후 울트라 씬 슬림 무브먼트만을 제조하던 프레드릭 피게는 블랑팡의 컴플리케이션 시계를 위해 퍼페츄얼 캘린더, 미니츠 리피터, 투루비용과 이들을 조합한 다양한 컴플리케이션을 제조할 수 있는 슈퍼 하이엔드 무브먼트 제조 업체로 성장했다.


블랑팡 6 마스터피스

1991년 블랑팡은 손목시계로는 처음으로 이 모든 컴플리케이션을 통합한 1735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모델을 발표한다. 당시 파텍 필립이나 바쉐론 콘스탄틴도 도전한 적이 없는 가장 복잡한 손목시계 컴플리케이션이었다. 같은 해에, 블랑팡은 그동안 개발해 온 6가지 손목시계를 '6 마스터피스'라는 이름으로 플레티늄 모델 99 세트의 한정판으로 발표한다. 


블랑팡 1735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빠른 속도로 컴플리케이션의 명가들을 추격하면서 욕심이 과했던 것인 지 이 무렵 자크 피게가 블랑팡과 별도로 운영하던 무브먼트 제조 업체인 프레드릭 피게가 자금난에 봉착하게 된다. 자크로서는 블랑팡에만 공급해서는 컴플리케이션 무브먼트들의 개발비조차 회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캡트가 개발한 새로운 무브먼트들을 다른 브랜드들에도 판매해야 했으나, 1980년대 말까지도 고급 무브먼트에 대한 수요는 크게 증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매년 한, 두 가지의 무브먼트를 개발했던 자크 피게는 무브먼트 개발과 생산설비를 구입하느라 은행에서 빌린 막대한 금액에 대한 이자조차 지급하기 어려워졌다. 결국 블랑팡의 지분과 함께 무브먼트 제조업체인 프레드릭 피게를 1991년에 매물로 내놓게 된다. 비버는 피게의 자금 문제를 해결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당시 블랑팡이 스와치 그룹에 6,000만 스위스 프랑에 매각됐다는 기사와 함께 비버와 자크 피게가 창업 10년 만에 엄청난 돈을 번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후 두 사람의 행적을 보면 은행빚을 정리하고 나서 비버와 자크 피게에게 남은 금액은 얼마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젊은 패기로 시작한 약 10년간의 악전고투는 1990년에는 연간 6,000 개를 판매하여 1,200만 스위스 프랑의 매출을 올렸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사이 은행 빚만 늘어났던 것이다. 엄청난 자금을 투입하여 개발한 고가의 컴플리케이션 판매 비중이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버는 여러 인터뷰에서 이 시절을 일관되게 '실패'였다고 말하고 있다.


1991년 기계식 시계의 인기가 고가의 슈퍼 하이엔드를 중심으로 회복되는 것을 확인한 스와치의 하이에크는 스와치 그룹에는 없는 고급 에보슈를 제조하는 프레드릭 피게와 슈퍼 하이엔드 브랜드의 필요성을 느끼던 시절이었다. 비버의 지휘 하에 매년 새로운 컴플리케이션 모델을 발표하며 슈퍼 하이엔드 브랜드로 성장한 블랑팡을 오메가 위의 상위 브랜드로 위치시켜 파텍 필립, 오데마 피게, 바쉐론 콘스탄틴 등과 경쟁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블랑팡도 함께 인수한 이유였다.


1981년 SSIH를 통합하여 스와치 그룹을 만든 하이에크는 쓸모없어 보이는 레마니아를 피아제가 구성한 투자그룹에 매각하게 되고, 1991년 이를 중동의 인베스트코가 인수하게 된다. 인베스트코는 1987년 브레게를 인수한 후 브레게의 시계 제조에 어려움을 겪던 상황이었으므로 레마니아와 같은 소규모 컴플리케이션 공장이 필요했다. 스와치 그룹은 1999년 브레게와 레마니아를 인수하게 되고, 브레게는 스와치의 최고급 브랜드가 된다.



프레드릭 피게의 자금난 외에도 비버 또한 10년간 세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회사 업무에 몰두하느라 아내로부터 이혼을 통보받고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이었다고 한다. 블랑팡을 매각하기로 한 후 아내에게 회사를 팔아버렸으니 이혼하지 말자고 애원했으나 아내는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며 결국 떠나 버렸다. 결국 블랑팡을 매각한 직후부터 후회를 거듭하던 비버는 몇 주만에 하이에크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블랑팡에서 다시 일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하이에크는 그의 좌절감을 이해한다며 블랑팡의 사장과 함께 오메가를 다시 부흥시키는 일을 맡에 달라고 하여 그는 블랑팡의 사장 겸 오메가의 마케팅 담당 사장을 겸직하여 복귀하게 된다.


비버가 오메가를 떠나 블랑팡을 창업하여 동분서주하는 동안 하이에크의 지휘 하에 1983년에 발매된 플라스틱 스와치 시계의 성공으로 위기를 벋어나 안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러나 기계식 시계의 부활로 브랜드의 고급화가 필요해진 상황에서 비버의 경험은 스와치 그룹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 덕분에 비버는 스와치 그룹에 합류하면서 이사회 멤버가 되어 스와치 그룹의 전반적인 운영에 관여하는 등 파워맨으로 변신하게 된다. 블랑팡으로 쓰라린 실패를 맛보았지만 이후 비버는 맡는 일마다 성공을 거두며 실패를 모르는 '전설적인 사장'의 명성을 얻게 된다.


첫 만남은 악연이었지만 비버는 이때부터 하이에크의 오른팔이 되어 저녁 늦은 시간이나 새벽 등 아무 때고 하이에크에게 전화할 정도로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1975년 오데마 피게에 입사했던 때로부터 블랑팡의 도산까지 15년간 실패만 거듭하던 비버는 오메가의 부흥을 지휘하는 한편 스와치 그룹의 일본, 한국, 싱가포르 등 동남아의 판매를 전담하며 오메가의 사장을 맡은 직후인 1993년에 개방되어 신흥 시장으로 떠오른 중국에 가장 먼저 입성하여 성공을 거두게 된다.



오메가에 근무하는 동안 비버는 1970년대와 1980년대의 20년간 쿼츠에 집중하며 너무나 많은 신모델을 쏟아낸 탓에 엉망이 되어 버린 오메가의 모델들을 정리하고 오메가를 다시금 롤렉스와 경쟁할 수 있도록 마케팅에 집중하게 된다. 비버를 통해 오메가의 '문와치'에 대한 마케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007의 새 영화가 준비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007 시계로 씨마스터를 협찬하면서 200만 달러를 투자하여 007 영화의 모든 행사에 공식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와 함께 제임스 본드가 오메가를 착용한 다양한 사진들 확보하여 씨마스터를 007 시계로 선전하게 된다. 그 외에도 여성 모델로 신디크로포드를, 스피스마스터의 모델로 마이클 슈마허를 영입하여 마이클 슈마허 특별판을 판매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오메가의 씨마스터와 스피드마스터가 오메가의 대표 상품이 되어 롤렉스와 경쟁하는 현재와 같은 위치로 부활했던 것이다.


스와치 그룹에서 브레게와 누벨 레마니아를 인수하던 1999년 비버는 오메가의 성공을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강행군을 거듭하다가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2001년 레지오넬라 병에 걸려 완전히 탈진하여 52세로 스와치 그룹에서 사직하고 프리에이전트가 된다. 그리고, 3년 후인 2004년에 쿼츠 혁명기인 1980년에 창업한 소규모 시계업체였던 와블로(Hublot)의 창업자인 카를로 크록코를 만나 와블로의 사장으로 다시 등장하게 된다.


스와치 그룹에서 은퇴한 후 와블로의 하이엔드화에 성공하며 성공신화의 마지막 장을 화려하게 장식한 비버는 2008년 와블로가 LVMH에 인수되면서 LVMH의 시계 부분 총괄사장이 되어 태그 호이어와 제니스의 브랜드 이미지 정립에 중요한 역활을 담당하다가 2018년 69세로 은퇴하게 된다.


LVMH의 회장 아르노와 비버


쿼츠 혁명기에 오데마 피게에 입사하며 등장했던 1970년대 히피 출신의 비버는 1975년부터 2018년까지 43년에 걸쳐 활동하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오메가를 떠나 블랑팡을 창업하며 슈퍼 하이엔드만이 기계식 시계가 살아남는 길이라고 보았던 비버의 예상처럼 21세기는 하이엔드 중심의 시장으로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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