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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고 Oct 22. 2022

구찌와 케닝그룹

세베린 분더만


2021년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연출하고 레이디 가가, 아담 드라이버, 알 파치노가 출연한 '하우스 오브 구찌'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 중 알 파치노가 연기한 알도 구찌(Aldo Gucci)는 유태인 출신의 타고난 사업가 스베린 분더만(Severin Wunderman)과 만나며 디오르가 시작한 패션 시계를 베스트셀러로 만들며 패션 시계의 역사에서 하나의 이정표를 만들게 된다.


Gucci는 1921년에 구찌오 구찌(Guccio Gucci)가 이태리 투스카니의 플로렌스에서 수입한 여행 가방을 팔면서 시작되어 그 지역의 가죽 장인들을 고용하여 자신의 제품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2차 세계 대전중 물자가 부족해지자 캔버스로 만든 가방을 판매하면서 초록색과 붉은색의 밴드에 구찌오 구찌를 상징하는 2개의 G로 구성되는 구찌의 로고가 표시되어 유명해진다.



영화로 만들어진 구찌 가문의 비극은 구찌오 구찌의 사업을 3명의 아들인 알도, 바스코, 로돌포가 물려받아 미국에 진출하면서 시작된다. 미국 뉴욕의 5번가로 진출하여 성공을 거두던 알도의 아들들이 별도의 구찌 상점을 열고 구찌의 이름을 이용한 새로운 브랜드를 출시하면서 가족들 간의 갈등이 시작되는 것이다. 1983년 로돌포가 죽자 그의 아들인 마우리지오가 삼촌인 알도와 소송을 벌여 구찌의 경영권을 빼앗게 되고 1986년 알도는 탈세혐의로 1년간 감옥에 가게 된다. 이런 와중에도 구찌는 계속해서 성장하지만 이 시기에 저렴한 구찌 제품들이 마구잡이로 출시되면서 구찌의 프레스티지도 희미해지게 된다.


1988년 마우리지오 구찌(1948-1995)는 자신이 가진 구찌의 지분 중 47%를 바레인의 투자그룹인 인베스트코에 매각하게 된다. 마우리지오는 영화에서 처럼 1995년 밀라노의 사무실 1층 로비에서 이혼한 전처 파트리지아 레지아니(Patrizia Reggiani, 1948~)가 사주한 킬러에 의해 사살되게 된다. 이 사건으로 1998년 29년형을 언도받았던 레지아니는 18년간 복역한 후 2016년에 출소했다고 한다.


구찌 2000


구찌 시계는 1972년에 출시된 '구찌 2000'이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패션 시계의 역사에서 가장 큰 족적을 남기게 된다. 패션 시계는 Dior에서 시작되었지만 구찌에 의해 전통 시계 브랜드들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게 되고, 그 후 패션 브랜드들이 브랜드 시계를 출시하는 유행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1972년에 출시된 구찌 2000은 2년간 100만 개나 판매되면서 단일 모델로 가장 많이 판매된 시계로 기네스북에 올라가게 되었다. 쿼츠 혁명과 함께 스위스의 시계 브랜드들이 몰락해 가던 시절에 구찌 시계는 최고의 황금기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구찌 2000은 알도 구찌(1905-1990)로부터 25년간 구찌의 상표로 시계를 독점 생산하는 계약을 맺은 세베린 분더만이 기획하여 판매한 것이다. 세베린 분더만은 시계 업계에서 기인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구찌로 성공을 거두며 백만장자가 되었던 분더만은 여러 매체와 인터뷰를 했지만 알도 구찌로부터 구찌의 독점 사용권을 얻었던 일에 대해서는 인터뷰 때마다 다르게 설명하여 정확한 내막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알도 구찌는 이와 관련하여 인터뷰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알도 구찌의 혼외 딸인 패트리시아 구찌가 2016년에 발표한 알도 구찌에 대한 회고록의 내용과 분더만의 인터뷰 내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1960년대 말 스위스의 소규모 브랜드이자 콩코드처럼 판매자 상표로 시계를 제조하던 알렉시스 바르셀레이(Alexis Barthelay)의 미국 직원이었던 세베린 분더만(1938-2008)은 구찌를 방문하여 시계를 납품하는 일로 상담을 하려고 했다. 매장에 책임자가 부재중이어서 책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서 있던 곳이 매장의 전화기 옆이었다. 전화가 울려도 아무도 전화를 받으려고 하지 않자 분더만은 자신도 모르게 전화기를 들게 된다. 전화를 건 사람이 바로 알도 구찌였다. 알도는 전화를 받은 사람이 직원이라고 생각하여 이태리 남부의 사투리로 이야기를 했다. 벨기에에서 태어나 5개 국어에 능했던 분더만은 자신도 모르게 알도의 사투리를 따라 응답을 하게 되었다. '너 누구야?' 자신의 직원 중 이태리 남부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의아해진 알도가 눈치를 채자 분더만은 자신이 찾아온 목적과 전화를 받게 된 사정을 말하게 되었다.



알도는 이 특이한 세일즈맨에게 흥미를 느껴 시간을 정하여 자기가 있을 때 찾아오라며 다시 만날 약속을 하게 된다. 알도를 만나러 구찌의 사무실로 찾아온 분더만은 낡은 옷과 구두를 신은 곤궁한 모습이었다. 알도는 분더만의 사업 제안을 듣고는 즉석 해서 일 년 판매분으로 25만 달러 상당의 시계를 주문하게 된다. 예상 밖으로 엄청난 물량을 계약한 분더만은 베일러에 연락하여 알도와 맺은 계약에 대해 설명하게 된다. 소규모 회사였던 베일러는 25만 달러의 물량은 고사하고 1년에 그 10%도 생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분더만의 사업적 재능이 발휘되는 것이다.


분더만은 알도를 다시 찾아와 회사의 사정을 설명하며 기회를 준다면 자신이 회사를 설립하여 25만 달러의 계약을 이행하고 싶다고 말하게 된다. 알도는 분더만과 함께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며 분더만으로부터 그의 성장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며 당돌한 청년이었던 분더만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분더만이 회사를 차릴 자금도 없다는 것을 눈치챈 알도는 분더만에게 먼저 자신에게서 사업을 하는 방법부터 배울 것을 충고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분더만은 알도 밑에서 일을 배우며 알도로부터 사업자금까지 빌려서 시계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패트리샤 구찌에 따르면 이후 분더만은 알도가 마우리지오와 법적 분쟁을 겪는 과정에도 알도를 찾아와 조언을 할 정도로 평생 동안 알도와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72년 향후 25년간 독점적으로 구찌의 시계를 제조하기로 계약하고 스위스에 시계 제조 회사까지 차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처음 발매한 구찌 2000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분더만은 단 기간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구찌로서는 분더만의 성공으로 시계가 핵심 사업의 하나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한편, 죽기 2년 전인 1993년 계속해서 자금 압박을 받던 마우리지오는 50%의 지분을 추가로 인베스트코에 매각하여 구찌 가문은 창업 후 67년 만에 퇴장하게 되는 것이다. 1989년 마우리지오에 의해 부사장이자 선임 디자이너로 영입된 돈 멜로(Dawn Mello)는 방만하게 운영되던 구찌의 재건 작업을 시작하여 1,000개나 되던 상점을 180개로, 22,000개나 되던 판매상품을 7,000개로 축소하게 된다. 인베스트코에 인수된 1994년에는 1980년대 내내 구찌 가문의 변호사였던 도메니코 드 솔(Domenico De Solle)이 사장으로 취임하고, 톰 포드가 선임 디자이너로 참여하게 된다. 이들의 노력으로 구찌가 다시금 이익을 내게 되자 구찌는 뉴욕 증시에 상장하게 되고, 인베스트코는 1995년에서 1997년까지 주식을 처분하여 19억 달러를 벌게 된다.


구찌가 뉴욕 증시에 상장되자 LVMH 그룹은 구찌의 주식을 은연중 확보하여 구찌 그룹 인수를 계획하게 된다. 1999년 LVMH에서 모은 주식은 38%에 도달하게 된다. 이를 알게 된 구찌의 사장 도메니코 드 솔과 칩 디자이너 톰 포드는 프랑스 PPR(Pinault Printemps Redoute)를 찾아가게 되고, 나중에 케링(Kerring) 그룹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는 PPR이 대규모로 주식을 구입하고 증자를 통해 LVMH의 지분을 12%로 낮추면서 LVMH 그룹의 구찌 인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구찌 그룹은 케링그룹의 핵심 브랜드가 된다.


Corum의 Bubble X-Ray


한편, 알도 구찌와 1972년에서 1997년까지 25년간 독점 시계 판매권을 계약했던 분더만은 1994년 구찌의 경영권이 인베스트코로 넘어가면서 계약 연장 문제로 구찌와 분쟁을 겪게 된다. 결국 1997년 구찌 그룹이 1억 5천만 달러에 분더만의 회사인 '세베린 몬트르'를 인수하면서 구찌의 시계 제조도 구찌 그룹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분더만은 2000년 이 자금으로 모바도의 그린버그가 미국 내 판매권을 가진 '코룸'을 인수하여 새로운 시계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2000년 바젤 페어에서 처음 선을 보인 시계가 분더만 시대의 코룸을 대표하는 버블 시계였다. 돔 형태의 두꺼운 크리스털을 특징으로 하는 시계이다. 장 콕토의 작품들과 함께 해골과 관련된 미술작품들을 수집하던 기괴한 취미를 가진 분더만을 기념하여 2022년에 버블 X-레이가 발표되었다.



세베린 분더만의 이런 기괴한 취미는 세계 2차 대전과 나치가 가져온 그의 불운한 인생사와 관련이 있다. 1938년에 벨기에의 브러셀에서 태어난 분더만은 어린 시절 전쟁을 겪게 되었다. 나치가 벨기에를 침공했던 것이다. 유태인이었던 분더만 부모는 3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분더만을 친척 아이들과 함께 가톨릭 교회의 신부에게 맡기게 된다. 가톨릭 교회에서 지내던 분더만은 교회가 운영하는 맹인 학교에서 학업을 시작하게 된다. 맹인 학교에서 유일하게 앞을 볼 수 있었던 분더만은 나치가 학교로 들어왔을 때 맹인 학생들의 손을 잡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Corum Bubble 시계


이렇게 하여 나치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분더만은 10살의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미국으로 이주하여 친척의 손에서 자라게 된다. 친척집에서의 생활이 편하지 만은 않았는지 로스앤젤레스에서 고등학교를 16살에 중퇴한 분더만은 돈벌이에 뛰어들게 된다. 영악했던 분더만은 당시 신문배달을 하는 아이들을 관리하고, 저녁에는 주차장을 관리하는 일로 돈을 버는 한편 사창가에서 손님들을 안내하는 일을 하며 팁을 받아 적지 않은 돈을 모으게 된다.


분더만의 첫 사업은 그렇게 모은 돈으로 골드 체인을 만드는 기계를 구입하여 보석상에 골드 체인을 납품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20대에 시작한 첫 사업이 실패하면서 바르셀레이의 세일즈맨이 되어 알도 구찌와 만나 34살에 구찌 시계로 성공신화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나치의 침공과 홀로코스트로 어린 시절 겪은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 분더만은 기괴한 메멘토 모리 문화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며. 코룸을 인수한 후 버블 시계를 발표하면서 해골을 손목시계 다이얼의 테마로 사용한 첫 번째 인물이 되었다.



2014년 케닝그룹은 율리스 나르당과 지라드 페레고를 인수하여 스와치, 리치몬트, LVMH와 함께 하이엔드 브랜드를 보유한 시계 그룹으로 등장하였으나, 2022년 이들을 매각하며 시계 사업에서는 철수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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