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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고 Oct 22. 2022

Cartier


카르티에의 시조인 루이-프랑소와 카르티에는 31살이었던 1847년 자신이 일하던 피카드의 보석공방을 물려받은 후 1859년에는 보석의 중심지 파리로 이전하게 된다. 1874년 창업자의 아들인 알프레드가 이를 이어받게 되고, 1898년 알프레드는 그의 큰 아들인 루이(1875-1942)를 파트너로 참여시키고, 1899년 파리의 루드라파로 이전하게 된다. 이어 카르티에 삼 형제 중 사업 감각이 가장 뛰어났던 루이의 동생인 피에르(1878-1964)가 런던(1902)과 뉴욕(1909)에 상점을 열면서 루이가 파리의 카르티에, 막내인 자크가 런던의 카르티에, 피에르가 미국의 카르티를 운영하면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2차 대전 중인 1941년 막내인 자크(1884-1941)가 57살의 나이로 독일에 점령된 프랑스에서 죽고, 1942년에는 파리 본점을 잔느 투쌍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피신했던 루이도 뉴욕에서 67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피에르는 루이가 죽은 후 1942년 파리로 돌아와 파리 본점을 관리하다가 전쟁이 끝난 후 1947년에 은퇴하여 제네바 근교의 별장에서 말년을 보내게 된다. 피에르가 은퇴한 후 파리 본점은 피에르의 딸인 마리안이 운영하게 되고, 미국의 카르티에는 루이의 아들 자크가, 영국의 카르티에는 자크의 아들인 쟝-쟈크가 운영하게 된다.


카르티에에 대해서는 그 위상에 걸맞게 1984년에 출판된 한셀 나델호퍼의 'Cartier' 등 여러 권의 책들이 출판되었지만, 대부분 카르티에의 보석과 시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2019년 자크 카르티에의 아들인 장-자크 카르티에의 외손녀인 프란체스카 카르티에 브릭켈에 의해 카르티에 가문의 상세한 이야기가 출판되었다. 루이(1875-1942)와 보석 디자이너였던 잔느 투상(1887-1976)의 복잡 미묘한 관계, 카르티에가 세계적인 보석상으로 성장하는 과정, 4세들에게 넘어간 카르티에가 리치몬트의 벤돔 그룹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1974년 벤돔 그룹에 영국의 카르티에 마저 넘기게 된 장-자크 카르티에의 상실감 등 카르티에 성장과 몰락 과정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들이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파베르제의 에그


루이 카르티에가 손목시계에 앞서 탁상용 시계 제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박람회에서 당시 러시아 왕실 보석을 만들던 파베르제(Faberge)의 제품들을 보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파베르제의 에그는 러시아 왕실에서 부활절 계란 대신에 준 왕실스러운 보석 계란이 시작이었다. 이후 점점 발전하여 보석으로 장식된 계란 속에 '서프라이즈'가 들어 있던 역사상 가장 호사스러운 보석 장식품이었다. 이외에도 당시 파베르제에서는 일반 보석 장신구 외에도 보석과 에나멜 등이 조합된 고급스러운 장식품들을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25살의 루이 카르티에는 1900년 파리 박람회에 출품된 파베르제의 계란을 포함하는 작품들을 보면서 보석 디자인 외에 파베르제 같은 고급 장식품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루이의 동생 피에르는 파베르제의 본거지인 페테스부르크에 카르티에의 분점을 열기 위해 러시아에 잠시 머무르게 된다.


카르티에의 탁상용 클럭들


2020년 크리스티에서 카르티에 가문 시절에 만들어진 탁상용 클럭들이 경매되며 20세기 전반기에 카르티에에서 다양한 디자인의 클럭들이 판매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산토스와 탱크를 디자인한 것으로 유명한 루이 카르티에는 손목시계보다는 탁상용 클럭과 회중시계에서 더 많은 시계들을 디자인했다. 루이 카르티에가 살았던 시대는 손목시계가 막 등장하는 시기였기에 회중시계가 보편적인 시계였다. 루이 카르티에가 미스터리 클럭 등 탁상용의 클럭에 많은 디자인을 남긴 것은 젊은 시절 자신을 감탄시킨 파베르제의 에그 등 고가의 소형 장식품들에 대한 루이 카르티에의 관심을 대변하는 것이다.



루이 카르티에는 산토스, 탱크, 베누아 등과 함께 다양한 디자인의 보석 시계들도 디자인했다. 동일한 디자인의 시계를 대량으로 제조하는 시계 전문 브랜드가 아니라 보석이 중심이 된 보석상이었으므로 루이가 중심이 된 파리, 피에르의 뉴욕과 막내인 자크가 운영하는 런던에서 제조된 시계들도 고객들의 요구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제조되었다. 그리고 1940년대까지 파리와 미국에서 시계 판매가 많았던 것에 비해 영국에서는 소량만 제조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런던의 카르티에를 이어받은 장-자크가 시계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면서 1940년대 이후 런던의 시계 판매가 증가하게 된다. 그러나 보석 판매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카르티에의 시계 판매 기록도 자세히 남아 있지 않지만 1960년대에도 1년에 총 3,000 개 정도로 소량만 판매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야거 르 쿨트르(Jaeger LeCoultre)와의 인연


에드몽 야거와 자크 르 쿨트르


한편, 산토스 듀몽을 위해 1904년 시계를 만들어주었던 루이 카르티에는 자신이 디자인한 시계들을 만들기 위해 1903년 파리에서 비행기와 자동차 계기판의 정밀 계측기를 제조하던 예거(Edmond Jaeger: 1858-1922)와 만나 자신이 디자인한 손목시계의 제조를 의뢰하게 된다.


예거는 루이가 원하는 슬림한 무브먼트를 설계하여 특허를 받고는 이를 생산하기 위해 자신이 설계한 무브먼트를 제조할 회사를 찾게 되고, 야거의 광고를 본 자크-데이비드 르쿨트르(1875-1948)가 1903년에 연락하여 야거와 르 쿨트르 및 카르티에와 르 쿨트르의 인연이 시작된다. 



이렇게 해서 야거가 르 쿨트르의 무브먼트를 사용하여 카르티에의 산토스가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산토스 제조 후 1905년 루이와 야거는 '유로피언 와치 및 클럭 컴퍼니(European Watch & Clock Co.)'를 설립하게 되고, 르 쿨트르는 야거가 설계한 무브먼트를 제조하여 납품하게 된 것이다. 회사 이름에 시계와 클럭이 함께 들어간 것으로 보아 루이가 디자인한 탁상용 시계들의 제조에도 야거가 일정 부분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야거는 1918년경부터 건강이 나빠지면서 앙리 로다네(Henri Rodanet, 1884-1956)를 고용하여 로다네에게 야거 항공 S.A.의 기술감독을 맡기게 된다. 1922년 야거가 죽은 후에도 야거의 회사와 르 쿨트르의 관계는 유지되었다. 이 시기에 앙리 로다네의 설계로 르 쿨트르에서 생산한 무브먼트가 듀오 플랜과 101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무브먼트였다.



1937년 르 쿨트르가 야거 항공 S.A.의 시계 부문을 인수하여 현대와 같은 'Jaeger LeCoultre'가 만들어졌고, 그 이후 '야거 르 쿨트르'의 시계들이 등장하게 된다. 야거가 죽은 후에도 카르티에와 르 쿨트르의 인연은 1970년대까지도 계속되었다.



루이 카르티에는 1900년대 초 손목시계가 등장할 무렵 유행하던 아르데코(Art Deco)를 상징하는 가장 클래식한 시계인 산토스, 탱크 시리즈, 베누아(baignoire) 등을 디자인했다. 현대 시각에서 본다면 1917년에 디자인되어 1919년 이후 다양한 모델로 등장한 탱크는 시계 디자인뿐 아니라 다이얼 디자인도 당시에 등장한 아르데코 시계들 중 가장 매력적인 디자인의 하나이다.



탱크를 애용했던 앤디 워홀은 파텍 필립, 롤렉스 등 많은 시계를 수집한 시계 컬렉터이기도 했다. 앤디 워홀(1928-1987)이 Cartier Tank에 대해 했다는 말이 탱크의 매력을 가장 잘 설명한 말로 자주 인용된다.


"나는 탱크를 시간을 보려고 차는 게 아닙니다. 사실 시계 밥을 준 적도 없어요. 내가 탱크를 차는 건 차고 싶은 시계이기 때문이에요." (1973)


(  “I don’t wear a Tank watch to tell the time. Actually, I never even wind it. I wear a Tank because it is the watch to wear!” )



로버트 호크와 페랭이 머스트 카르티에를 출시하기 전에도 카르티에의 탱크는 정치인들과 배우들에게 인기 있는 시계였다.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탱크를 착용하고 있는 사진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케팅을 위해 섭외하기도 쉽지 않은 정치인, 기업인, 배우, 운동선수 등 유명인사들이 작고 얇은 탱크를 애용했다. 그 덕분에 이들을 따라다니는 기자들의 사진들을 통해 탱크는 마케팅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선전되는 시계였다.



2017년에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1929-1994)의 탱크도 그중 하나이다. 재클린의 여동생 리 라지윌(1933-2019)의 남편인 스타니스와프 라지윌(1914-1976)가 팜비치에서 열린 50 마일 걷기에 참가하여 17시간이 걸려 성공한 것을 축하하는 그림을 선물하자 그에 대한 답례품으로 재키에게 준 것이라고 한다. Jackie가 재클린의 애칭이듯이, Stais는 스타니스와프의 애칭이다.


스타니스와프는 폴란드 왕자출신으로 그 시절에 흔했던 폴란드의 민주화 혁명으로 런던으로 망명하여 있던 시절에 초고속으로 이혼하고 런던에 머물던 재클린의 동생과 만났던 것이다. 따라서 시계의 케이스백에 적힌 내용은 재키가 라지윌에게 선물로 준 그림에 축하 문구로 적은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이 시계는 관심받는 것을 좋아하는 미국의 방송출연자인 '킴 카다시안'이 379,500 달러에 낙찰받아 트럼프를 만나러 백악관에 갈 때 착용했다고 한다. 



카르티에의 빈티지 시계 중 현재까지 가장 높은 가격을 기록한 것은 손목시계가 아닌 탁상용 시계다. 2차 세계 대전중 인 1942년 11월 미군의 북아프리카 상륙을 축하하며 피에르 카르티에가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1942년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증정했던 시계이다. 2007년 소더비 경매에서 160만 달러에 낙찰되었다.


탱크 바스큘런트


탱크 모델들도 1917년에 프랑스 탱크를 바탕으로 디자인되어 1919년에 판매된 탱크 오리지널(Tank Normale), 루이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 디자인했다는 탱크 루이(Tank LC), 1921년에 첫 발매된 탱크 신트레(곡선형 탱크), 1922년에 중국 디자인의 영향을 받아 발매된 탱크 시누아(Tank Chinoise), 1928년의 점핑 아워 시계인 탱크 기셋(Tank Guichets), 1932년에 발매된 바스큘란트 등이 루이가 직접 디자인한 탱크모델들이다.


카르티에 가문에서 운영하던 시절에 제조된 카르티에 탱크들은 르 쿨트르, 프레드릭 피게 등의 슬림하고 고급한 무브먼트가 사용되고 있다. 1932년 발표된 바스큘란트를 제조한 것도 1931년 Réne-Alfred Chauvot의 특허권을 인수하여 리버소를 제조했던 세자르 드 트레이(Cesar de Trey)가 창업한 Spécialités Horlogères S.A이며, 이 회사도 르 쿨트르와 통합되게 된다.


파리의 카르티에는 1903년에서 1942년까지 루이가, 루이가 죽은 후인 1942년부터 1947년까지는 피에르가 그 이후 1947년부터 1966년까지는 피에르의 딸인 마리온이 운영하다가 그 후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1933년 파리 카르티에 보석 디자인의 책임자로 승진한 잔느 투쌍은 1970년까지 근무하다가 은퇴하게 된다.


한편 뉴욕의 카르티에는 1909년부터 1942년까지 피에르가 운영하다가 그가 파리로 돌아간 후 1942년에서 1962년까지 루이의 아들인 자크가 운영하다가 1962년에 매각된다. 3대에 걸쳐 성장시킨 가업이 4대째에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Cartier의 베누아와 크래시


막내인 자크가 운영하던 런던의 카르티에가 가장 오래 유지되었다. 1919년부터 1941년까지 자크가, 그 이후에는 자크의 아들인 장-자크 1942년부터 1974년까지 운영하다 매각하게 된다. 장-자크는 1967년 고객이 자동차 사고를 당하여 망가진 베누아 시계를 보고 카르티에의 크래시를 디자인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미국의 카르티에가 매각된 1962년부터 카르티에의 정책은 일관성을 잃게 되며 카르티에를 인수한 투자자들이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조잡한 시계들을 카르티에 브랜드로 판매하여 1962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 10여 년간은 카르티에 삼 형제들이 운영하던 시기의 럭셔리한 이미지가 대부분 사라진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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