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실이란 배경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확정되는 상태다.
현실은 언제 존재하는가
- 현실이란 배경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확정되는 상태다.
현실은
있거나 없거나의 문제가 아니다.
언제, 어떤 조건에서
확정되는가의 문제다.
이 관점은
임마누엘 칸트의 사유와 닿아 있다.
칸트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를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인식된 세계’라고 불렀다.
그의 핵심 문장은 이것이다.
“우리가 아는 세계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인식된 세계다.”
현실은
관측과 무관하게 이미 완성된 배경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성립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현실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쓴다.
현실은 분명하고, 단단하며,
누가 보든 보지 않든 그대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흔히 이렇게 말한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라고.
하지만 양자역학은 이 익숙한 단어 앞에서
한 번 더 멈추게 만든다.
과연 현실은 언제부터 현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빛은 관측되기 전까지
하나의 상태로 확정되어 있지 않다.
어디에 있다, 어떤 모습이다, 무엇이다 -
이런 말들이 아직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상태를
‘현실이 아니다’라고 말해야 할까.
양자역학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그 상태는 아직 현실로 확정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난다.
현실은 있다/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확정되었는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현실은 스위치처럼 꺼졌다 켜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점점 구체화되는 상태다.
그래서 현실은
항상 이미 존재해 왔던 배경이 아니다.
관측, 즉 관계가 형성되는 순간
비로소 하나의 모습으로 정렬된다.
그전까지는
가능성들의 겹침으로 존재한다.
이 말은
세상이 허상이라는 뜻도 아니고,
모든 것이 주관적이라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현실은 언제나 관계적으로 성립하는 만큼만
구체적이다.
우리는 흔히
“객관적 현실”이라는 말을 쓴다.
누가 보든 같아야 진짜 현실이라는 믿음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은
객관성에 대해 이렇게 묻는다.
객관이란 정말 관찰자와 무관한 상태를 뜻하는가,
아니면 관찰 조건이 공유된 상태를 뜻하는가.
같은 실험 조건,
같은 측정 방식,
같은 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비슷한 현실을 경험한다.
이때 현실은 안정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안정성은
관측으로부터 자유로워서가 아니라,
관측 조건이 정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현실은 고정된 무대가 아니다.
관계가 맺어질 때마다
그때그때 하나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장면에 가깝다.
장면은 분명 현실이지만,
모든 장면이 하나의 고정된 세계를 뜻하지는 않는다.
이 지점에서 현실에 대한 우리의 불안이 시작된다.
만약 현실이 항상 고정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가야 할까.
어디에 발을 딛고 서야 할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은 이미 그런 방식으로 흘러가고 있다.
같은 사람도
어떤 관계 속에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현실을 산다.
직장에서의 나,
가족 안에서의 나,
혼자 있을 때의 나는
서로 다른 현실 속에 있다.
이 현실들은 모두 진짜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로 고정된 ‘유일한 현실’은 아니다.
관계가 바뀌면
현실의 모습도 바뀐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현실이 이렇게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과거와 현재, 그리고 시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현실이 그때그때 확정된다면,
시간은 정말
앞에서 뒤로 흘러가기만 하는 걸까.
그 질문을,
다음 이야기에서 이어가 보려 한다.
머무는 생각 - 임마누엘 칸트
“우리가 사는 현실은 관계 속에서 인식된 세계다.”
머무는 시 - 백석
“나는 이 세상에 와서 / 한 번도 같은 하늘을 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