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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크네 Feb 24. 2024

창조의 북극성

(이 글은 2018년 <정여울과 함께 읽고 쓰기 : 여성의 눈에 비친 세상>강좌에 제출했던 작품입니다.)     


아름다움은 내게 사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종교적인 의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현실을 버티게 해주는 숨구멍이고, 언제가 도달할 낙원에 대한 약속이고, 인간의 불완전성을 잊게 해주는 구원이다. 오래전 모태신앙을 버린 나이지만 그건 무교를 택했다기보다는 예술이라는 세련된 종교로 개종했다는 뜻에 가깝다.


한때, 종교에서도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 중학교 재학시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십 일, 이년 전쯤인데, 그때 나는 신앙생활에 미쳐있었다. 주말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회에 눌러앉아 예배를 보고 기도를 하며 복음 성가집을 눈물로 적셨다. 학교와 가정 양쪽에서 견디기 힘든 상황에 처한 터라 가물어 버석거리던 영혼을 교회에 의탁한 것이었다. 하지만 가혹한 시절이 지나가고 웬만큼 제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되었을 때쯤 지금까지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무지를 부추기는 목사와 존재의 불안을 잊으려 환상을 택하는 신도들. 신도들의 정신상태가 어떤 지경인지 잘 알았다. 나도 한때 그들과 같았으니까. 그건 불안하고 연약한 정신, 치료할 길 없는 영혼의 상처 때문이었다.


울부짖음으로 해서 잠시라도 고통을 잊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내가 정말 용서할 수 없었던 건 목사란 사람들이 인간의 불안과 상처를 이용해 장사꾼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는 예배시간마다 낯이 뜨거워질 정도로 십일조 타령을 하던 속물이었고, 청소년부의 전도사조차 교회를 한 번 빠질 때마다 천국으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한 단씩 사라진다고 세뇌하는 장로교파의 확성기였다. 그건 공포심을 이용한 교묘한 비즈니스였다. 나는 수험생이라는 허울 좋은 변명을 이용해 교회 참석을 줄여갔고 수능을 볼 즈음부터는 완전히 발길을 끊었다.


지금도 가끔 교회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이 주창하는 교리가 야비할 뿐만 아니라 잔인하기까지 하다는 걸 느낀다. 죽음 이후의 영락을 위해 현세를 참고 견디라니. 그건 단 한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삶을 수단으로 만들라는 말과 같다. 지금을 희생한다면 우리의 존재에는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나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대상에게 구원을 구걸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귀한 목적으로 쓰기 위해 지었다는 환상으로 자존감을 얻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삶을 직접 창조하고 싶다.


교회에서 창조는 신에게만 부여된 권능이다. 인간의 창조행위 일체는 신이 준 아이디어를 대신 실현시키는 ‘수주’이다. 하지만 예술에서 인간은 신의 권능을 그대로 이어받을 수 있다. 아름다움의 창조자로서 아이디어를 실현시키고 나와 닮은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향해 “보기 좋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 인간은 창조행위를 통해 신이 된다.


그리하여 나에게 아름다움은 존재가 걸린 문제가 되었다.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 두 손과 집중력으로 무언가를 피워내는 것, 그것은 스스로를 살아있게 하고 인생에 의미와 가치를 만드는 일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나는 도대체 무엇에 인생을 쏟아 부으려고 하는 것인가.


사실 첫 번째 작품을 쓸 때까지만 해도 의식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그때 나는 전공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취업시장에 나를 가져다 파는 것을 피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오랜 우울과 무기력을 끝내고 싶어 글을 썼다. 그리고 다행히 좋은 출판사와 연결되어 소설을 출간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책을 산 독자들의 절반은 만족해했지만 나머지 절반은 실망했다. 물 잔에 물이 반쯤 차있을 때 보는 시각에 따라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있다는 말은 유명하다. 하지만 나는 그 교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과물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기승전결도 엉망이고 캐릭터도 허술하고 가장 공들여 만들어낸 에피소드도 설명식으로 후루룩 끝내버렸다. 독자에게 감정적으로 전달이 될 리가 만무한 방식이었다.


마감에 휘둘려 글을 쓴 결과였다. 미숙했고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작품을 쓰는 일 자체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엇 ‘ 때문에’ 쓰고 무엇에 ‘대해’ 쓰고, ‘어떻게’ 쓸지에 대해,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하는지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덤벼들었다. 결국 내 시간과 독자들의 돈을 낭비하고 만 것이다.


그 후 반년동안 시놉시스를 이리저리 갈아치우며 무엇을 지향하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나는 27년간 책을 읽고 영화와 만화, 공연들을 보며 무엇을 느꼈는가. 무엇이 나를 뒤흔들고 미치게 했는가. 나는 그것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아름다움이란 말은 화살표처럼 하나의 기호에 불과하다. 나에게서 “아름답다”라는 말이 흘러나오도록 하는 요소, 그 본질을 따지고 들어야 했다. 그 안에 답이 있을 것이다.


미우치 스즈에의 만화 <유리가면>에서 배우의 꿈을 꾸는 주인공 소녀 마야는 정식 데뷔작 <작은아씨들>을 앞두고 자신이 맡게 될 ‘베스’의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베스처럼 학교도 가지 않고 베스가 입었을 법한 남북전쟁 당시 북부소녀의 복장을 하고 집에서 뜨개질을 하고 고양이와 놀아주고 살림을 하며 베스의 생활을 모사한다.


하루, 이틀, 사흘 날이 가고 베스의 삶을 따라하는 시간들이 길어질수록 마야는 베스가 그저 내성적인 소녀가 아니라, 가족과 음악을 사랑하고 자신만의 작은 세계를 소중히 가꿔나가는 아름다운 내면을 가진 소녀라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뒤따른 깨달음. ‘마음이 먼저. 대사와 행동은 그 다음.’ 마야는 그 깨달음으로 무대에서 단순히 베스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베스 자신이 된다.


이것은 픽션을 쓰는 작가들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참가했던 희곡수업에서 들은 말이 있다. 이야기란 감정을 보는 장르라고. 작가는 캐릭터의 감정에 얼마나 깊게 다가가느냐에 따라 에피소드가 달라지고 이야기 흐름이 달라지고 작품의 깊이가 달라진다고. 나는 그 말에 진심으로 동감했다.


내가 뮤지컬과 만화를 보며 감동할 때는 무대 의상이 훌륭하거나 그림이 근사할 때가 아니었다. 등장 캐릭터의 감정이 깊고 생생할 때였다. 그 감정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때 몰입이 되고 캐릭터의 기쁨뿐만 아니라 슬픔에도 감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감정이 단발적이라면 보는 이에게 미치는 영향력도 그 정도일 것이다. 감정은 서사 전체를 지배해야 한다. 그건 캐릭터의 운명과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른다.


히구치 이치요의 소설 <키 재보기>는 오이란(고급 창부)의 동생 미도리와 승려의 아들 신뇨의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을 그린다. 신뇨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승려가 되어야 할 운명이기에 명랑하고 사랑스러운 미도리에게 끌리면서도 애써 무시한다. 미도리 또한 언니가 준 용돈과 타고난 미모로 유곽 근처 불량소년들의 여왕벌처럼 군림하지만 내심 자신을 무시하는 신뇨에게 마음이 가 있다.


여러 소동들 속에서 미도리는 신뇨가 자신이 창부의 여동생이라 경멸하고 있다고 오해를 하고, 사람들만 보면 신뇨의 험담을 하며 마음에 입은 상처를 숨긴다. 어느 비오는 날, 신뇨는 미도리의 집 앞을 지나다가 게다 끈이 끊어져 비를 맞으며 끈을 고치는데, 정원에서 그걸 보던 미도리는 망설이다가 신뇨에게 신발 끈을 건넨다. 하지만 신뇨는 미도리를 외면하고 미도리는 처음 실연의 슬픔을 겪는다.


그 뒤, 미도리는 머리를 올린다. 언니를 따라 오이란이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미도리의 유년기는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미도리는 자신의 집 현관에 종이로 만든 수선화 한 송이가 꽂혀있는 걸 발견한다. 꽃 중에 수선화를 가장 좋아하던 미도리는 기뻐하다가 어쩐지 그리움이 가슴에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눈물 짓는다. 그날은 신뇨가 승려가 되기 위해 절로 떠나는 날이었다.


서로에게 끌리던 그들의 마음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차곡차곡 쌓이다가 결국 비오는 날 미도리의 집 앞에서 절정을 맞는다. 승려가 되려는 신뇨는 미도리를 좋아하면서도 외면할 수밖에 없고, 신뇨의 진심을 오해하면서도 좋아하는 마음을 참을 수 없던 미도리는 신뇨의 외면으로 인해 완전히 자신의 사랑이 끝났음을 알게 된다. 고통과 체념, 실망이 교차는 순간. 이날 이후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길을 간다.


둘은 어른이 되어서도 다시는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신뇨는 열반에 올라 모든 것을 초월한다 해도 미도리를 기억할 것이고 미도리는 숱한 남자를 울리는 오이란이 되어서도 신뇨만큼은 특별한 남자일 것이다. 어른의 길목에 들어서기 전 처음만난 사랑이자 이루어지지 못한 채 묻어버린 사랑이기에. 이 사랑은 이따금 그들의 마음속에 다시 살아날 것이고 삶의 행로를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애틋함을 품은 잔잔한 파동으로 언제까지고 삶을 지배할 것이다.


누군가는 감정이 일시적인 마음의 발작이라고 표현한다.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인간에 대해 무지하다는 건 확실하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감정은 운명과 맞물려 돌아간다. 감정은 삶의 궤도를 바꾸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영혼을 지배한다. 서사는 이걸 보여줘야 한다. 운명을 살아가는 개인이 어떤 감정을 경험하는지, 그리고 그 감정이 그 후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것이 서사에 의미와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작품에서 감정만이 전부는 아니다. 아름다움에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 그건 인간이 이성적 존재이며 동시에 짐승이기에 직감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진실이란 측면이다. 단지 개연성이나 핍진성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이 두 가지도 중요하지만 아름다움에 있어 진실이란 인간을 얼마나 솔직하게 보여주느냐를 의미한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선과 악, 훌륭함과 비루함, 용감함과 비겁함이 혼재된 존재이다. 이를 무시하고 작품을 만들 때 결과물은 생동감을 잃고 공장에서 찍어져 나온 싸구려 주전부리가 되고 만다.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에 등장하는 캐릭터 댄은 누가 봐도 훌륭한 가장이다. 그는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첫아이를 잃고 조현병 증상을 보이는 아내를 케어해왔다. 병을 고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하며 사랑으로 감싸안아주려 노력하는 그는 완벽한 배우자의 전형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관객에게 판타지를 제공하지 않는다. 댄은 그저 평범한 중년의 사내일 뿐이다. 병에 걸린 가족을 둔 사람답게 그는 피로와 절망으로 지쳐있다. 아내가 상담을 받는 동안 병원 복도에서 기다리며 댄이 부르는 노래 “who’s crazy”는 그런 그의 심경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미친 건 누굴까? / 남편 아님 아내? / 평생 믿었지 /이 뒤엉킨 삶도 언젠가 풀릴 거라고 / 미친 건 길 잃은 아내? / 아님 아직 / 꿈꾸는 남편? / 면담하는 환자, 아님 밖에 서 있는 남자? / 스물넷 푸른 청춘에 / 열렬히 사랑 했지만  / 이젠 운전만 하면 아무 여자라도 괜찮아     


그는 아내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스물 넷 푸른 청춘에 했던 순수한 사랑이 아닌 의무와 집착에 가깝다. 그리고 댄 자신도 아내와 마찬가지로 미쳐있음을 알고 있다. 노래의 마지막에서 댄은 시인한다. “사랑은 맹목이란 그 말 / 사실은 광기” 라고. 결국 그는 1막 마지막에서 자살시도를  아내에게 전기충격요법을 택하도록 설득한다. 위험하다는 건 알지만 아내가 떠나고 혼자 남는 건 그에게 공포이기에.


이 작품은 뮤지컬로는 드물게도 퓰리처상 드라마부문을 수상했다. 상이 작품의 가치를 정하는 건 아니지만 뮤지컬 장르에서 각본으로 이정도 평가를 받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는 <넥스트 투 노멀>이 인간의 그늘을 (보고 있기 불편할 만큼) 현실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상처를 두고 누군가는 정신을 놓을 정도로 몰두하고(다이애나), 누군가는 외면하고(댄), 누군가는 일부러 덧나게 해 세상에 시위를 한다(나탈리). 그리하여 모두 공평하게 미쳐간다. 상처에 대처하는 지극히 일반적인 모습이다. 이 소름끼치는 리얼함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건 진짜야’라는 감정을 느끼게 한다.


<넥스트 투 노멀>의 각본가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뮤지컬 시장에서 이렇게 무거운 이야기를 10년의 기간 동안 제작하려고 매달리는 건 도박이었을 테니까. 아마 작가는 그만큼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10년을 세월을 바친 절실함. 어쩌면 작품의 아름다움이란 작가가 얼마나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에 달려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무언가를 탐낼 때 내숭을 떨고 공수표를 날려대지만 진심으로 사랑할 때는 가식을 버리고 목숨을 건다. 그건 댄의 노래처럼 맹목이란 이름 광기이다. 그 사랑의 광기가 바로 창조의 근원이 된다.


이제는 무엇을 지향해야 할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감정과 진실을 찾아라. 그리고 집요한 사랑으로 창조하라. 무엇을 위해 글을 써야할지 분명해졌다. 시작할 용기가 생겼다. 물론 앞으로 갈 길에는 숱한 시행착오가 있을 것이다. 막 시작한 것뿐이니까. 그러나 길을 잃는다고 해도 괜찮다. 나는 영혼의 하늘 위로 북극성을 띄웠다. 언제든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있다. 이따금 하늘을 올려다보며 걷다보면 결국 낙원을 찾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는 나와 꼭 닮은 피조물들이 뛰어 놀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보며 보기 좋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 감동적이고 진실하며 사랑스러운 존재들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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