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서가 발표되다
제2차 세계대전 말 연합군은 전후 처리 문제를 위해 카이로회담을 갖고 여기서 일본 패망후 한국에 대해 적당한 시기까지 신탁통치할 것을 합의하였다. 이후 전쟁이 끝난 1945년 12월 미국 · 영국 · 소련은 모스크바에서 외무장관 회의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의 제임스 번즈, 영국의 어니스트 베빈, 소련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만나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의 회의 후 12월 27일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문제들과 관련한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들 외무 장관들이 서명한 공식 문서인 <미국, 영국, 소련 외무장관 임시회의>의 하위 명칭인 <소련, 미국, 영국 외무장관회의 보고서>이다.
이 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은 첨예한 대립을 보였으나 결국 의견을 조율하여 같은 해 12월 27일 합의문으로 네 개의 조로 이루어진 '미ㆍ영ㆍ소 3국 외무장관 회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문서에서 세 번째 조인 "한국(III.Korea)"에 관한 문단은 네 개 항으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이 속칭〈한국 문제에 관한 4개항의 결의서>이다. 이 중 세 번째 항은 신탁통치안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일로 한반도는 극렬한 좌우익 대립으로 치닫게 된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합의되었다는 사실이 처음 알려진 1945년 12월 28일께부터 처음에는 좌우파 가릴 것없이 모두 강력한 반탁의사를 표명했다.
그런데, 1월 2일을 기점으로 찬탁으로 일제히 바뀌었는데, 미군정도 이러한 일에는 소련의 의사가 작용했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1월 3일에 예고되었던 좌익들의 반탁집회는 집회 당일날 지도부에 의해 찬탁집회로 돌변하여 진행되어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이 시기 우익진영 일반, 그 중에서도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세력은 반탁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실제로 처음부터 강력한 신탁 통치안을 제시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좌익은 처음엔 표명에 미온적이었으나, 나중에 소련측의 요구에 의해 모스크바 회의의 내용의 전문이 공개된 후, 회의의 결과를 받아들인다는 입장에 섰고, 우익은 즉각적으로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서 좌익계열은 임시정부 건설원칙에 강조를 했었으며, 우익계열은 신탁통치 반대에 강조하면서 서로 대립하게 되면서 서로 극단으로 치닫게 되고 서로 테러를 강행하기에 이른다.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서는 해방 이후 가장 극렬하게 좌우익으로 분열이 된 일대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