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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오늘사건] 1944년 1월 16일

이육사, 옥사하다

by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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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이원록(李源祿)이다. 처음으로 받은 죄수번호 264를 아호로 쓰면서 이름에 의미를 둔 것이다.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한학을 수학하다가 도산공립보통학교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1925년 20대 초반에 가족이 대구로 이사한 뒤 형제들과 함께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1927년 10월 18일 일어난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큰형인 원기, 맏동생 원일과 함께 처음 투옥되었다.


1929년 이원록이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한 후 요양을 위해 집안어른인 이영우의 집이 있는 포항으로 가서 머문 적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어느 날 이영우에게 "저는 "戮史"란 필명을 가지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이 말은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라는 의미였다. 당시 역사가 일제 역사이니까 일제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 즉 일본을 패망시키겠다는 의미였다.


이에 이영우는 "표현이 혁명적인 의미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같은 의미를 가지면서도 온건한 '陸史를 쓰라'고 권고하였고, 이를 받아들여 '陸史'로 바꿔 썼다고 전해진다.


문단 등단 시기는 《조선일보》에 〈말〉을 발표한 1930년이며, 언론인으로 일하면서 중국과 대구, 경성부를 오가면서 항일 운동을 하고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으로 작품도 발표했다. 그동안 대구 격문 사건 등으로 수차례 체포, 구금되었다.


중화민국 국민당 군사위원회에서 난징에 창설해 김원봉이 조선인 항일 군관 훈련반(제6대대) 대장에 있던 군사학교에 1932년 9월 입학하여 보병 육성과 특수 부대원 훈련을 받고 이듬해 4월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상하이를 경유하여 국내로 귀국하였는데 1933년 6월 루쉰을 상하이에서 딱 한 차례 만났다는 연구가 나왔다. 이육사는 루쉰 사후에 신문학 작가 루쉰의 삶을 기념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루쉰의 1921년작 초기 단편 소설 《고향》을 한국에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하였다.

1943년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체포되어 베이핑(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다음해인 1944년 1월 16일 베이핑 주재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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