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의 시발, 고부봉기가 일어나다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 탐학한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고부군의 동학도들과 농민군들이 쟁기와 낫 등 농기구를 들고 집단으로 무장 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움직임은 곧 중앙정부의 탐관오리들에 대한 분노로 향했다. 보국안민과 폐정개혁을 기치로 내건 농민들의 기세가 걷잡을 수 없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대원군은 이 기회를 이용, 동학 농민군과 접선하여 손자인 이준용을 추대할 계획을 세운다.
1886년 흥선대원군은 민씨 정권이 〈조약〉을 체결하자 불만을 품은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결탁하여 차남 이재황(李載晃, 고종)을 옹립하고 재집권하려다가 실패하고,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농민 세력과도 연합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동학 농민운동이 실패로 돌아가 실현되지 못하였다. 동학군 중에는 전봉준과 같이 대원군의 문하에 출입하던 인물들도 있었고, 폐정개혁과 대원군 추대, 민씨 외척세력 척결과 개화파 척결을 외치는 목소리도 강력했다. 대원군과 이준용은 민씨 정권의 부패정치와 지방에 파견된 탐관오리들에 대한 반발을 주목했다.
한편 정부에서 안핵사(按覈使) 이용태를 보내 이들을 위로하고 탐관오리 처벌을 약속하자 동학군은 저절로 자진 해산하였다. 이 첫 발발을 고부 봉기라고 한다. 이후 1차, 2차로 들불처럼 전국적으로 동학농민운동은 퍼져나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