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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오늘사건] 1936년 2월 21일

뤼순 감옥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 순국하다

by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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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신광식과 밀양 박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신숙주의 18대손이었지만 일찍이 몰락하여 그의 11대조 때부터는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그는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신성우를 따라 서당에서 신기선에게 한학을 공부하였다. 9세에 자치통감을 배우고, 14세에는 사서삼경을 모두 마쳐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삼국지와 수호지를 애독하고 한시를 읊을 정도로 한문실력이 높아졌다.


신채호는 신기선의 서재에서 많은 서적을 읽으며 개화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1898년(19세)에는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독립협회 활동을 하여 투옥을 당하기도 하는 등 이 무렵부터 애국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1905년, 신채호는 성균관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음날 사직하고 단발을 결행한 뒤 낙향하여 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장지연이 신채호를 발견,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위촉되어 다시 상경하였다. 11월 20일, 장지연이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채호는 시일야방성대곡의 집필을 도왔으며 장지연이 투옥되자 그를 대신해서 황성신문을 이끌었다. 이후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1907년에 박은식의 도움으로 베델이 운영하던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었다. 안창호가 주도하여 비밀리에 결성한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 취지문을 작성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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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에서 일하던 시기 신채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같은 전기를 다수 출판하였다. 특히 신채호가 민족주의사관에 입각하여 서술한 최초의 한국고대사로 평가받는 독사신론(讀史新論)을 1908년, 그의 나이 불과 29세에 발표한 것은 이런 활발한 저술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국권의 피탈이 확실시되자 신채호는 애국지사들과 협의하여 러시아 제국의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에서 신한촌(新韓村)이 형성되는데 참여하였으며 연해주에서 발간된 한글 신문인 해조신문의 발행에도 참여했다. 1911년 12월 권업회라는 교민단체를 조직하고 권업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였으며 1912년에는 광복회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1913년 권업신문이 재정난으로 어려워지자, 신규식의 초청으로 상해로 떠났다.

1914년에는 윤세복의 초청으로 서간도 환인현 홍도천에 머물며 동창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쳤는데, 이때 국사 교재로 《조선사》를 집필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서간도 일대의 고구려 고적을 답사하였다.


1915년 이회영의 권고로 북경에서 체류하면서 중화보와 북경일보에 글을 기고하여 생계를 꾸렸다. 그러면서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을 집필하였다. 또한 김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한인 청년들의 단결과 교육에 힘썼다.

1919년 2월에 일명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3.1 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가서 ‘29인 모임’에 참석하여 임시정부를 발기하기 위한 회의인 임시의정원을 4월 11일 개회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과거 위임통치청원 전력을 지적하며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다”라고 크게 성토하면서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 결별하였다.


이어서 그는 《신대한》이라는 주간신문을 창간하여 임시정부를 맹렬히 비난하였는데,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과, 독립운동의 외교우선론, 노선의 전투성의 미흡, 임시정부의 무능과 파쟁, 여운형의 도일 등이 비판의 이유가 되었다.


1920년 5월 10일 이회영, 박용만과 함께 10여 개 무장항쟁단체가 참가한 가운데 군사통일 준비위원회를 열고, 만주 시베리아에서의 무장 독립전쟁을 통일적이고 조직적으로 수행할 '통일사령부'를 임시정부정 군무부 산하에 설치할 것인지의 여부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이 회의에서 이승만의 노선에 반대해 이승만과 격렬히 싸우고 법정투쟁까지 벌인 하와이 대표단의 박용만은 이승만의 미국 위임통치 문제를 공개적으로 폭로했다.

838038_855610_1519.jpg 신채호가 공산주의에 실망한 사건인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던 곳

안창호와 김규식은 국민대표회의 소집안을 받아들였으며, 1922년 임시정부의 쇄신을 위하여 국민대표회의안이 4월에 가결되었는데, 창조파와 개조파가 대립하는데 신채호는 창조파의 주동자로서 민중의 폭력혁명을 통해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랜 논쟁에도 불구하고 국민대표회의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창조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떠나 1923년 6월 7일 새 헌법을 제정하고 창조파의 임시정부를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소련정부의 반일활동 금지에 따라 활동이 중지되었고, 신채호는 자유시 참변과 소련이 창조파 임시정부를 불인정하자 공산주의에 대해서 실망하며 이 또한 결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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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창조파 임시정부가 러시아에서 해체되자, 신채호는 실의와 좌절에 빠져 무정부주의와 불교에 관심을 더 깊이 보이게 되었다. 그는 국사연구를 위해 북경대학 교수 이석증에게 대학도서관 열람의 편의를 부탁하여 1922년 중국역사연구법을 쓴 양계초의 역사연구 방법에 영향을 받아 ‘조선상고사’를 집필하였다. 1924년 10월부터 1925년 3월까지 ‘상고사 이두문 명사해석법’, ‘삼국사기중 동서양자 상환고증’,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평양패수고’, ‘전후삼한고’,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들은 1930년대에 ‘조선사연구초’라는 책으로 묶여졌다. 또한 1925년 시대일보에 ‘부를 수한 차대왕’,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년대에 대하여’를 투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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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는 1923년 이후에 이회영과 유자명, 그리고 중국인 이석증 교수와 교류하며 무정부주의 사상을 갖게 되었다. 1923년 의열단장 김원봉이 신채호를 만나기 위해 북경을 방문하고 만나서 “의열단의 정신을 문서화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에 신채호는 김원봉의 요청에 따라 상하이로 와서 폭탄 만드는 시설을 살펴보고, 약 한달 동안 여관방에 앉아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의열단 선언, 즉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


1927년 중국 텐진에서 무정부동맹동방연맹이 조직되었는데 신채호는 이필현과 함께 조선대표로 참가하였다. 같은 해 본국에서 좌우합작을 위한 신간회가 조직되자 홍명희와 안재홍의 권유로 이에도 참여하였다. 이무렵 무정부주의 사상을 담고 있는 ‘대흑호의 일석담’, ‘용과 용의 대격전’ 등의 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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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29년 5월, 신채호는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과 유가증권 위조 등의 혐의로 10년형의 언도를 받고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1935년 그의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형무소 당국은 “보호자가 있으면 출감시키겠다”고 했으나, 그의 보증인이 친일파라는 이유로 신채호는 가석방을 거절하였다. 1936년 2월 18일, 만주국 펑톈 성 다롄 부 뤼순 감옥 독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졌으나 방치되었고, 사흘 뒤인 2월 21일 감방 안에서 혼자 있을 때에 사망하였다. 뇌일혈 및 동상, 영양실조, 고문 후유증 등의 합병증이었다. 향년 5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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