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정부 파리코뮌 결성되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 제 2제국 정부의 무능함에 대해 프랑스 민중들이 항쟁을 일으켰다. 파리 시민들의 농성에도 불구하고 1871년 1월 28일 휴전조약이 체결되면서 그 해 2월 12일 강화조약을 토의할 국민의회가 보르도에 설치되고 임시행정장관에 L.A. 티에르가 임명되었다.
국민의회는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비준했으나 파리 시민은 오히려 항전의 뜻을 굽히지 않고 이 조약에 불만을 가졌다. 3월 18일 티에르의 임시정부는 정규군에게 농성 중인 국민군(의용병)이 사용한 대포 227문을 압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군인들은 명령에 불복종하는 하극상을 보였고 르콩트와 토마 장군이 사살당했다.
이를 계기로 시민과의 마찰이 생겼으나 곧 정규군과 국민군 사이에 화해가 성립되어 19일 양자의 대표는 시청을 점거하고 ‘중앙위원회’를 결성하였다. 26일 실시된 선거에서 85명의 의원이 선출되었다. 바로 이것이 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정부인 파리코뮌이다. 이후 5월 20일까지 파리를 자치적으로 통치하게 된다.
파리코뮌은 파리 시정 자치체라는 뜻이며, 70일간 자치 정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파리코뮌은 프랑스를 자유로운 코뮌들의 연맹체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인민들에 의한 지방정부인 코뮌을 수립하라는 호소문을 풍선에 매달아 날려 보냈다. 마르세유 등에서도 코뮌 운동이 일어날 정도로 그 영향력이 대단했으며, 10시간 노동, 야간노동 철폐, 종교와 정치의 분리, 공창제 폐지, 여성과 외국인에게 시민권 부여, 여성동맹 결성, 기혼-독신-미혼모-법률혼-사실혼 관계없이 자녀연금제도 실시 등 오늘날 봐도 혀를 내두를 사회 개혁을 주장하였다. 또한 파리코뮌이 존재하는 동안 파리에서는 민중들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었다.
이렇다보니 티에르 정부는 이를 묵과할 수가 없었기에 파리코뮌을 진압할 군대를 조직하였고, 공산주의라면 학을 떼던 비스마르크는 티에르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 포로 40만명을 즉각 석방시켰고, 티에르는 이들을 곧바로 진압군에 투입시키면서 파리코뮌은 더이상 진압군을 대적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렇다보니 그들간의 전쟁으로 프랑스 파리는 그야말로 박살이 나버렸고, 파리코뮌 인원들은 모조리 총살을당하면서 두달에 걸친 반란은 진압이 되었고, 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정부는 무너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