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는 세월의 뒤안길
세상의 어떤 사람이라도 그 삶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평범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각각의 에피소드 혹은 해프닝이 겉으로 보기에는 별다른 것 아니게 비치더라도 실상을 알고 보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다양한 사건들이 나름대로 특별한 의미가 있어도 시간이 흘러가며 그 충격과 파동의 여파가 강한 것에게 떠밀려 기억의 창고에 들어갔을 뿐이다. 나이가 들어 돌아보면 당시의 상황이 정말로 위험했던 일이 많았다. 그리고 화를 용하게 피할 수 있었던 것이 그저 운이 좋았던 게 아니라 무언가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해야 할 일이 있기에 살려 두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지금은 울창한 나무로 빽빽한 산들이 어렸을 때는 온통 벌거숭이 민둥산뿐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믿기지 않겠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그 산들을 푸르게 가꾸기 위해 벌목을 멈추고 식목정책을 대대적으로 실시하면서 전 국민이 별다른 대책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아궁이를 연탄으로 교체했던 어린 시절에 일어났던 슬픈 사건들이 떠오른다. 당시에 눈만 뜨면 쏟아지는 연탄가스 사고 뉴스가 사회면을 장식하였다. 연탄에서 나오는 일산화탄소는 살상용 독가스만큼 치명적이었고 매일 중독 사고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우리 가족도 예외 없이 한차례 그러한 위험을 겪어 위급했으나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렸다. 군불로 때던 구들장 바닥이라 여기저기 연기가 피어오르던 그 틈새를 장판지를 풀칠하며 메꾸었으나 연탄가스는 연기처럼 보이지 않고 새어 나왔으니 어디에서 나오는지 찾지도 못했다. 삶에서 발생한 지독한 환란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나 이렇게 스토리의 소재로 되기도 한다.
이어진 큰 시련은 따로 있었다. 살고 싶은 소망마저 던져 버리고 싶었던 고통은 국민학교 5학년부터 시작된 비염과 축농증이 고등학교까지 7년 동안 심하게 괴롭혔던 암담한 사건이다. 누런 고름처럼 생긴 콧물이 콧구멍을 틀어막아 숨을 쉴 수 없어 강아지처럼 입으로 숨을 쉬기도 했다. 때로는 숨이 막혀 머리가 어지러워지기까지 했다. 숨을 쉬지 못하는 것은 죽는 것과 사실상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 아닌가. 특히 햇볕이 따갑고 더운 날에는 머리에 핏발이 서며 브레인 포그로 멍한 상태에서 송곳으로 쑤시는 것처럼 아팠다. 그러다가 머리통을 담벼락에 찧기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지옥이 따로 없음을 체험으로 알았던 시절이다.
어느 날 서울의 작은 이비인후과에서 전기인두로 지지며 치료하여 마침내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축농증을 완치했고 다시 찾은 호흡의 자유는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으리만큼 황홀했다. 숨을 마음대로 쉴 수 있다는 자유는 참으로 소중한 경험이었다. 한편 역설적이지만 이로 얻는 이득도 있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숨을 참는 훈련이 저절로 된 셈이라 수영장에서 잠수하여 숨 참기 내기를 하면 단연 남들보다 월등히 오래 견딜 수 있는 것을 보면 세상에 공짜가 없듯 고통스러운 시련 역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주기 마련이라는 생각이다.
이와 같은 것 외에도 많은 위험은 삶의 곳곳에 도사려 있었고 그때마다 신의 보호하심으로 생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바다에서 익사할뻔한 사건이 두 번 있었고 한번은 가지가 잘 부러지는 감나무에 올라갔다가 밟은 가지가 우지직하며 쿵 떨어졌는데 나무 밑에는 작은 바위처럼 생긴 정원석이 있었으나 다행히 그 돌덩이들 사이로 떨어져 다치지 않은 것도 결코 작은 일은 아니었다.
성장해서 어른이 되어도 철들지 않은 성품은 변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크고 작은 소동을 끊임없이 일으켰다. 홍콩에서 지내던 당시 한번은 고교 동창생 녀석과 졸업 후 처음 만난 기쁨에 주점에서 만취하여 집으로 돌아가다가 일어난 위험한 해프닝이 생각난다. 어찌 된 영문인지 이튿날 아침 따갑게 비치는 햇살에 눈을 비비며 떠보니 하얗게 빛나는 선상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주위를 살펴보니 비스듬한 갑판이었고 나는 매미처럼 붙어서 자다가 깬 참으로 난해한 사건이었다. 그 배는 마카오로 운항하는 페리였다. 그나마 바다에 추락하지 않은 것이 진심 다행이었다. 그런데 더 기이한 것은 당시에 여권도 소지하지 않은 채 오밤중에 해관을 통과하여 페리에 잠입한 일은 지금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다. 퐁당 빠졌더라면 그대로 태평양 바다로 흘러갔을 것이다. 바로 홍콩 앞바다가 태평양이니까.
온누리에 온 지 31년째다. 2007년 13년 만에 재수 끝에 안수를 받은 뒤 사업한답시고 중국 심천으로 떠난 지 13년만인 2020년 팬더믹으로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귀국했다. 평생을 떠돌아다니던 자가 이제는 여기서 마무리할지 아니면 또 어디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 알고 보면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깜깜이로 시작한다. 따라서 그냥 이끄시는 대로 사는 것이 인생임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살면서 스스로 시도했던 많은 것들이 대부분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영혼은 참으로 평안하다. 비록 세상에서 놓친 것이 많았어도 크게 안타깝지 않은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안다.
문득 히스기야 왕이 떠오른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15년을 더 살게 되었으나 그 결과 므낫세왕이 태어나 50여 년 유다를 그릇되게 통치했고 마침내 누적된 죄에서 돌이키지 않았던 유다는 문을 닫게 되었다. 이 부분을 여러 번 묵상했으나 뜻을 참으로 알기 어려웠다. 왕의 기도를 들어주셨던 하나님의 원하심은 과연 무엇인가? 오래 산다고 해서 그 자체가 진정한 복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답한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능력이 깨알만큼이라도 있을까? 아니 그보다 나의 노력이 아니더라도 그분은 이미 영광스러운 분이다.
실상이 그러하다면?
그저 그분의 한없는 긍휼을 바라며 믿음의 끈을 소망으로 붙들며 사는 것이 남은 삶의 여정이며 목적이 아닌가 싶다. 간절하게 듣고 싶다. 그분의 음성을.
For THUS SAYS THE LORD GOD, THE HOLY ONE of Israel:
“In returing and rest you shall be saved; In quietness and confidence shall be your Strength.”(이사야3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