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소

인생도장

by 손진일

세상은 영혼의 훈련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계 같은 속성을 빼고 영혼의 무게를 가볍게 하는 이른바 영혼의 다이어트 훈련소 같은 역할을 한다. 과연 어떤 성품이 무거운 것일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5리를 억지로 가자고 하면 10리를 동행하라고 하시는 뜻을 생각해 본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오늘날 우리의 삶은 각박하고 초급 해서 이 말씀은 귓전에서 맴돌다가 동풍 따라 흘러가 버릴 수 있다. 예수님은 이기심을 포기할 것을 강조하신다. 그러나 세상은 이기심을 버리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공을 하려면 이기심을 가지라고 장려한다. 자신의 의지로 살아야 한다며 긍정 마인드를 한껏 고취시킨다. 설사 때로는 이타심을 함양해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그것도 알고 보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이용할 뿐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이타심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 성공을 하려면 이기심이 충만해야 하는 것이 세상의 공식이다. 자기의 이익만 추구하는 이기심은 거대한 탐욕의 막장으로 자석처럼 서서히 끌고 가서마침내 엄청난 자력으로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중력의 틀 안에 가두고 만다. 그리고 대부분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이기심과 쌍둥이처럼 다니는 것이 자기 방어기제다. 스스로 보호하기에 급급해서 늘 여유가 없고 초조함이 삶을 끌고 다니며 끊임없이 긴장시키고 스트레스를 안겨준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경계하며 방어를 하는 일이 쉬운 일인가. 면역기능의 이상으로 발생하는 대상포진 같은 질환은 대식세포의 지나친 활동이 적군인 균뿐만 아니라 아군 세포마저 공격을 해서 생기듯 자기 방어의 부작용이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일찍이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울타리를 만드는 것은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며 그로 인해 새로운 적이 생긴다라고 지적했다. 냉철한 통찰력을 볼 수 있다. 나를 보호하려는 순수한 의도가 오히려 적을 만든다는 아이러니한 논리다. 마키아벨리도 군주론에서 이와 비슷한 맥락의 말을 했다. 중세나 현대나 시대가 달라도 사람의 심리는 비슷하다는 생각이다.

인간의 약한 점을 들쑤시며 꼬드기는 또 다른 세력이 있는데 바로 조급 함이다. 사람은 어쩌면 본태적 조급증에 시달리는 존재라고도 볼 수 있다. 급한 만큼 사람의 행동이 빠른가? 자연의 동물들과 경주를 하면 사람의 주력은평균에도 못 미치는 형편없는 수준인데 공연히 마음만 바쁘다. 도대체 왜?

물리학의 속도 개념과 기준은 빛이다. 만약에 빛보다 빠른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언뜻 세월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세월 즉 시간은 속도라는 물리적 속성과 관련이 있으며 시간이 곧 속도의 기준이 된다. 그러나 어찌도니 셈인지 세월은 빛의 그 빠른 속도를 무시할 만큼 엄청나게 빠른 것을 알 수 있다. 아예 차원이 다를 만큼 시간은 참 특이한 속성을 보여준다. 단위가 작을수록 길게 또 느리게 느껴지고 반면 크면 클수록 짧고 빠르게 인식된다. 세월은 덩치가 크다. 초와 분 같은 마이너와 체급이 다르니 후자에 속한다. 빛이 몇 년을 다니는 거리도 세월은 불과 몇 초 만에 복귀시키는 엄청난 속도다. 아마 세월은 망각의 도구를 사용하여 속도의 개념을 초월하는 것은 아닐까?.

속도 자체는 비교의 개념에서 출발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세상은 죽기 살기로 달려야 살아남는다. 잡아먹으려 쫓고 먹히지 않으려고 달리는 생존의 치열한 싸움이다. 비교라는 콘셉트는 처음에는 이렇게 빠른 놈 느린 놈으로 시작되어 다양하게 발달했다. 현대는 비교문화의 정점에 달했다. 모든 것이 비교의 대상이다.


천지에 만발한 모든 꽃들은 다 예쁘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서로 비교한다면? 아마도 스트레스받아 시들지 않을까?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모든 활동이 시간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면 말이다. 세상에서 일 잘한다는 콘셉트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다. 효율은 시간이 중심개념이라면 효율이라는 낱말 자체가 사라질 것이다. 아이들은 지각했다고 혼날 일도 없을 거다. 아름다운 추억이라는 의미도 없어지겠지. 기념일? 역사? 인간 문명의 대부분이 무개념화 될 것이다. 시간이 없다면 기다림이라는 행위도 사라질 거다. 좋든 나쁘든 기다림은 인간의 속성에 지대한 작용을 해왔다. 대부분은 귀찮고 짜증 나는 것이 기다림이다. 그런데 한편 무서운 생각이 든다. 고난에 처해졌을 때 시간이 가지 않는다면?


죽음 이후의 삶이 영생과 영벌로 나누어진다고 성경은 명명백백하게 증거 한다. 이것을 보고 듣고도 두려운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무모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영혼에 대해 무책임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죽음이 단순히 엔딩이 아니고 새로운 변화과정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진정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 평생을 잘살기 위해 애를 쓴다. 그리고 노후를 위해 시간과 자금을 투자하라고 권유하는데 노후를 포함한 그 평생의 시간이 대체 얼마나 될까? 숫자의 세계에서는 존재의 가치도 희미할 정도로 작은 앞자리 숫자다. 그토록 짧은 기간의 행복을 위해 기를 쓰고 경쟁을 한다. 그럴진대 영원한 삶을 위한 우리는 무엇을 또 어떻게 해야 할까? 두뇌가 우리를 속여서 잊으며 살게 하는 것이 아닐까.

나의 소망은 오직 하나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 거하는 것이다. 시간이 멈춘 영원한 세계에서 평강과 기쁨을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이라는 훈련장에서 연단하며 때때로 뜨거운 풀무에서 죄를 녹여 떼어내는 과정을 반복하며 살아내는 것이다.

혹시라도 몰랐다면 너무 늦기 전에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만약에 백만분지 일의 확률이라도 지옥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니 1억 분의 1이라도 실제로 지옥이 존재하며 그것이 자신에게 해당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천억 분의 1이라도 남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적용된다면 정말로 두렵지 않은가?


AND IF YOUR EYE CAUSES YOU TO SIN, PLUCK IT OUT. IT IS BETTER FOR YOU TO ENTER THE KINGDOM OF GOD WITH ONE EYE, RATHER THAN HAVING TWO EYES TO BE CAST INTO HELL FIRE- WHERE’ THEIR WORM DOES NOT DYE AND THE FIRE IS NOT QUENCHED.’(마가 9: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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