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거리
우리 시대는 종로가 낭만의 상징이었다. 배재고에 다닐 때 종로 가회동에서 하숙하다가 아버지의 지인 집으로 옮겼다. 바로 앞집이 유명한 여배우 윤정희 씨가 살았는데 그분이 나와 같은 성씨임을 우연찮게 알게 되었다. 어느 날 골목길을 가는데 예쁜 여인이 교복에 달려있는 내 이름표를 유심히 보더니 살짝 웃음을 짓기에 이상하게 여겨 뒤를 돌아보니 앞집으로 들어갔다. 대문의 문패에 손 아무개가 써여 있길래 같은 성씨구나 여겼지 그분이 영화배우인 줄도 몰랐다. 퍼플색상의 백바지 비슷한 옷을 입은 모습이 기억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윤정희 씨라 해서 많이 놀랬다. 그렇게 지내다가 졸업할 때는 우이동에서 다녔지만 종로는 광화문과 함께 우리들의 나와바리였다.이 단어는 조폭의 세계에서 많이 쓰는 왜어지만 우스개 소리에도 사용될 만큼 범용 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주먹세계의 낭만적인 멋이 일본의 영향으로 사라졌나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에라 수입할 것을 수입해야지 야쿠자 뭐냐. 아무튼 종로는 낭만시대의 역사가 서려진 무대였다. 많고 많은 에피소드들이 곳간에 숨죽이며 언제 부를까 기다리는 것 같다. 아기자기한 것도 있고 어리석고 몽매한 것도 많다. 장소마다 따른 기억의 잔상들이 똑똑똑 노크를 한다.
각설하고 하여튼 당시 종로 2가 화신백화점과 신신백화점 앞길은 오고 가는 행인들이 부딪치고 서로 길을 막을 만큼 다니기 조차 힘들었다. 요즘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매우 역동적인 시대였다고 본다. 두 백화점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시골에서 한양으로 상경한 사람들이 무조건 찾았던 명소였다. 주말엔 시골양반들이 차례를 기다리는 줄을 섰던 기억이 떠오른다.
청계천을 건너 광교에 있는 조흥은행은 우리나라 최초의 에스컬레이트를 설치했다. 옆을 지나다니면서 감히 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별천지의 특별한 사람들만 타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떻게 계단이 저절로 올라가는가 사람이 발로 밟고 올라가는 것이 고전적인 상식인데 말이지. 현대인이 보기에는 우리 세대는 고인돌의 석기시대를 살았는지도 모른다. 소공동에 위치한 웨스틴 조선호텔은 정문 앞에 서있는 영국왕실의 근위병 같은 사람이 지켜 있어서 감히 호텔 안으로 진입할 수도 없었다. 요즘은 고등학생도 비까 번쩍하는 오성급 호텔을 안방처럼 들락날락 거리는 세상이다. 시대의 급변이 두렵기도 하다. 지금의 노인은 옛날의 노인과는 달리 혼돈의 세대가 될 수밖에 없는 요소들이 도처에 있다. 우마차와 말라 붙은 소똥이 길바닥에 즐비하던 광경은 가히 조선시대의 흔적이라 여겨지는 시절에 어린 시절을 보냈고 격동의 청춘을 살았으며 중년이 지나면서 디지털 혁신과 노년에 접어들어서는 ai로 변모하는 세상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휘청거린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버텨야 하는 세대가 아닌가. 아무려면 어떠랴. 세상이 변해도 내가 추구하는 가치관이 바르면 그만이지.
안국동 인사동 특히 인사동은 낭만으로 넘치던 거리다. 매섭게 추운 겨울의 인사동 거리는 더욱 맛이 나는 거리였다.
꽁꽁 언 발을 부지런히 종종거리며 쏘다녔다. 지금 이 글은 시간을 압축시켰기에 시간을 검증할 필요는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대를 부지런히 왔다 갔다 다니기에 말이다.
일 년에 딱 한번 통행금지해제하는 성탄절은 큰 선물이었다. 혹한이든 폭설이든 간여치 않을 만큼 기다리던 큰 선물이라 여기곤 밤새 추운 거리를 휘잡고 다녔다. 요즘처럼 따뜻한 패딩이나 방한화는커녕 핫팩 또한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라 매우 매우 추웠다. 살을 에이듯 추웠던 생각이 난다. 증기기관차의 굴뚝처럼 수증기를 뿜으며 마냥 걸었다. 여자 친구의 손을 벙어리장갑 안에 함께 끼고 다니기도 했다. 그 시절은 그게 멋의 첨단이며 낭만이었다.
단성사 피카디리 명보극장 세운상가부근은 참으로 멋진 명소로 추억에 남아있다. 한 번은 피카디리 극장 앞에 있는 메밀국숫집에 고교선배와 메밀국수판을 기록적으로 비웠다. 그 선배는 성악을 전공하려고 하던 고삼이었고 나는 고일이었다. 덩치가 산만큼 컸던 그 형은 참 무식하게 많이 먹었다. 식당주인이 많이 할인해 줬던 것으로 생각이 난다.
종로는 그때만 아니라 그 후도 낭만의 거리였고 지금도 먹거리가 풍부하고 밥값이 가장 저렴해서 생활과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동네다. 파고다공원 맞은편 학원 뒷골목에는 6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렁된장집도 있다. 지금도 가끔 들리는데 우렁이 많이 들었는데 가격은 그에 비해 무지 착하다. 오이맛 고추도 무료다. 된장에 푹 찍어서..
연재소설처럼 긴 다큐로 쓸 만큼 긴 역사의 장소가 종로다.
학창 시절의 종로에는 장안다방 허허 다방이 유명했고 여왕봉도 한몫 거들었다. 당시 고전 음악감상의 원조격인 르네상스에서 클래식 마니아들이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웅장한 사운드로 클래식 음악을 감상했다. 베토벤 모짤트 비발디 등 많은 작곡가들의 곡을 자그마한 칠판에 분필로 적은 것을 외우며 들었다. 특히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곡은 여학생들이 애호하길래 작업용으로 스터디했다. 뭐 제대로 감상이야 했겠어? 그냥 똥폼 잡았던 게지.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주페의 시인과 농부인데 곡은 모르겠고 제목만 떠오른다. 작업용으로 주입시켰기 때문이다.
저녁이면 종로일대와 무교동의 막걸릿집은 인파로 넘실거렸고 비록 카바이드로 급속성 시킨 막걸리를 쭉쭉 들이켜 만취해서 다음날 일어나면 골 때리는 저질의 삶을 살았어도 희망차고 역동적으로 살았다. 학교를 졸업하면 앞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즘과 달리 웬만하면 골라잡아서 취업을 할 수 있었기에 요즘의 젊은이들에 비하면 엄청난 특혜를 누렸던 셈이다.
그렇지만 시대와 세대에 따라 가치관이 다르기에 요즘 세대는 이러한 석기시대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역시 젊었을 때 어른들을 꼰상이라 불렀으니 말이다.
나 역시 달라졌다. 엄청난 변화의 격동이 있었다. 삭발하기도 했고 꽤 오랜 기간 좌선에 심취했던 자가 교회에 출석하며 새로운 가치관을 찾았기에 말이다.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태어나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한다. 과연 어떻게 거듭날 수 있었을까?
DO NOT MARVEL THAT I SAID TO YOU, 'YOU MUST BE BORN AGAIN.'(요한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