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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서먹하다는 말은 곧 그들과 잘 지내고 싶다는 진정 은밀한 속내와 치환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세상과 말하는 법을 몰랐으므로 뭐라도 쓰며 일방적으로 말을 걸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더러운 일면을 발견하여 낱낱이 훑고 더 작은 조각으로 해체하는 일은, 한다기보단 해내는 일에 가까워서, 나는 나의 작업에 더할 나위 없이 중대한 의미를 부여하며 또 한편으론 내심 그런 스스로를 대견스럽게 여겨본 것이다.
K의 근황을 아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더 이상 내 주변엔 그녀를 아는 이가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단 하나도. 한 명의 사람도. 내 곁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나의 과거를 돌아보고자 할 때에는 오로지 스스로의 머릿속을 헤집는 일밖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니 나는 어쩔 수 없이 열여섯의 K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야만 했다. 그건 아주 수고스럽고, 다소 선택적인 편집이 뒤따랐기 때문에. k에게 질문을 하면 할수록 내가 그녀를 갉아먹고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남은 k는 무척이나 한정적이었으므로 이렇게 갉아대다간 더이상 벗겨낼 일말의 자취마저 사라질 것만 같다는 위기감에 종종 휩싸이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K에게 묻는 일. K를 기다리는 일. 그 애가 올 것만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서는 일.
이 속 좋은 지루함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일상이 단조로워질수록 나는 어쩐지 전에 없는 권태에 휩싸이는 것만 같았다. 그 단 맛이 그저 그런 싸구려가 아니라 아주 여유로운 사치를 부리는 것만 같아 낯을 가렸음에도, 권태를 혐오하고, 닥쳐오는 모든 일에 열성을 부리는 일을 미덕으로 알고 지낸 날들이 아득해질 정도로, 실로 그랬다. 소설에서나 등장하는, 권태라는 실체 없는 존재는 실로 관념적이고 또 동시에 아주 구체적이라, 어떻게 해야 나의 것으로 녹여낼 수 있을까 생각하다보면 하루가 다 갔다. 내린 결론이라 함은, 내 것이 아닌 말들에 내 것이 아닌 문장으론 비슷한 흉내만이 최선이리라, 그러나 나는 그 최선에도 다다르지 못하여 이렇게 잠겨가는 것이다.
나의 강박적인 편집증에 진절이 난다. 커가는 와중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온몸으로 실감하고, 또 그러면서 어설프게 깎인 연습용 석고 모형이 되어가며, 필연적으로 전보단 시들해졌으나, 나는 그것이 내 안의 결핍을 떨쳐낸 강한 의지의 산물이라기보단 일종의 체념으로부터 지겹게 도출한 최종적인 도피였음을 알았다. 도망친 곳에 낙원이 없다는 말은, 세상을 어떻게든 굴러가게 만들어야만 했던 잘난 지식인의 마이크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고ㅡ역시 뭔갈 해보고 잃는 것보다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잃지 않겠다, 는 나의 다짐에 자꾸만 합리성을 더해가려 하는 것은. 그렇다. 그것이 나의 본능이었던 것이다. 만 오천년 전, 커다란 짐승과 재해로부터 살아남으려 도망치던 최초의 질주가 나의 뼈와 살에 스미어 풍요에 시달리는 새시대 새소년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K, 나의 소년. 현재에 묻혀 과거를 사는 나의 케이. 사람에게는 누구나 미운 구석이랄 게 있는 법이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k 만은 나에게 미운 구석 하나 없는, 투명하고 반듯한.
너를 이루는 선들은 모두 직선이었지. 직선과 직선이 만나 늘 숫자로 딱 떨어지는 명쾌한 각을 만들어냈지. 나는 그게 좋았지. 찔리는 법을 몰랐지. 어쩌면 나는 너를 위해 만들어진 맞춤형 양복 한 벌이었을지도 몰라.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몰랐어. 그러나 나의 미운 구석은 너의 옆에서, 너의 앞에서 가장 날카로운 방식으로 나를 뚫고 나왔고. 잘못 기울어진 시소처럼 타고나길 비대칭으로 태어난 너와 나. 네 쪽으로 기울어진 내가 쏟아내었던 것은, 강하게 작열하는 정오의 태양 아래서만 걸릴 수 있던 열사병. 기나긴 장마 끝에 구멍나버린 우산. 폭설에 가라앉은 콘크리트 건물. 아주 작은 생채기에도 부풀어 오르는 마음.
다시 너를 만나기를 바라지만 그 뿐. 이후의 계획은 아무것도 없다. 만나서 해 줄 말도, 들을 얘기도 없다. 그저 네가 살아 있는지, 살아 있다면 잘 살고 있는지. 그것을 확인할 방도가 없어 매일에 안달인 것이다. 너의 시련에 나의 책임은 없다는 증명을 받으려고, 무작정 기다린 열두날의 밤. 품는 희망에 딸려오는 비난을 피하려고, 무작정 숨 죽인 스무날의 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