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독특한 생김새의 스마트폰을 본 적이 있습니다. 화면 아래에 조그마한 키보드가 달린 모습이었죠. 그때는 좀 특이하다고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훗날에야 그것이 한때 스마트폰 시장을 석권했던 캐나다 기업 블랙베리의 제품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난 뒤였지만요.
2023년에 개봉한 영화 '블랙베리'는 이 회사의 설립자이자 친구 사이인 마이크 라자리디스와 더글라스 프레긴, 그리고 기업 성장을 이끈 CEO 짐 발실리를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이제는 다소 익숙하다고도 할 수 있을 앞마당에서 시작한 IT 기업의 신화를 다루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두 막역한 친구와 그들이 만들어낸 기업을 일약 세계구로 성장시킨 잔뼈 굵은 사업가라는 구도는 일견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소셜 네트워크'를 떠올리게도 하네요. 대니 보일 감독의 '스티브 잡스'와 함께 감상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서로의 교차점을 확인해보는 재미가 분명히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 시절의 기술 덕후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들이 만들어낸 열정 가득한 작품으로 성공한 회사가 어떻게 몸집을 불려가고 변해가는지를 충실히 보여주는 흐름이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출근해서는 다들 일할 생각은 안 하고 자기 자리에 앉아서 8비트 그래픽 게임만 주구장창 해댄다든지, 매주 열리는 사내 영화 상영회에서 인디아나 존스 영화를 신나게 본다든지 말이죠. 기껏 따낸 계약금은 받지도 못하고 열심히 만들어낸 역작은 팔리지도 않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개노답이라고요? 맞습니다. 하지만 이 노답 엔지니어들이 만들어낸 것이 전세계를 집어삼킨 스마트폰의 조상님입니다. 이런 회사가 그대로 고사해버리지 않고 짐 발실리라는 사업가의 손에 그 가능성이 발굴되었고, 끝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어쩌면 그 다음에 벌어질 일은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 영화가 비슷한 다른 작품들과 다소 차별되는 면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현실 감각은 없지만 '낭만'만은 가득했던 이 기업은, 더욱 큰 가치만을 쫓게 됩니다. 커진 회사는 더 큰 위기를 겪고, 더 큰 이익을 추구하게 되죠. 그렇게 호랑이 등에 올라타게 된 순간 몰락이 시작됩니다.
결국 영화는 혁신을 뒤로하고 현재에 안주하게 되는 것을 경계하라는 말을 하는 듯합니다. 조금 삐딱하게 본다면 뻔한 이야기죠. 스크린 너머로 지켜보는 우리야 말하는 게 쉬우니까요. 어휴 저 미련한 것들, 그러게 욕심 좀 적당히 부리지, 하고요.
그런데 그 엄청난 휴대폰을 만들어내고 거대 기업으로 성장시킨 천재들이 그걸 몰랐을까요? 그럴 리가 없겠죠. 그럼에도 그들은 그 바보 같은 함정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왜일까요?
간단히 말하자면 이 세상이 너무 넓고 복잡해서겠죠. 얼마나 넓고 어떻게 복잡한지는 각자가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영화 '블랙베리'는 넷플릭스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