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닥터후'와 '재생성'

나를 죽이지 못할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니

by 하이드

영국의 국민 드라마 '닥터후'는 역대 최장수 SF 드라마로 유명합니다. 1963년 첫 방송을 시작한 이래 무려 60년이 넘게 이어져 오고 있으며, 시대에 따라 부침은 있지만 영국을 상징하는 문화 컨텐츠 중 하나로 자리 잡았죠. 전성기 시절엔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적인 흥행을 이뤄낸 거대 프랜차이즈입니다.


닥터후를 타 SF 드라마와 차별화시켜주는 특징은 여럿 있지만, 저는 그중 '재생성'이라는 설정이 가장 눈에 띕니다. 재생성이 뭐냐하면 배우 교체입니다. 주인공인 '닥터'는 2026년 현재 무려 20명에 가까운 배우들이 거쳐 간 배역입니다.


닥터후 50주년 스페셜 'The Day of the Doctor'


이렇게 몇 년에 한 번씩 배우가 바뀌는 외적인 사정을 작품 내부의 설정으로 만들어낸 것이 재생성의 실체입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닥터는 우주에서 가장 발전한 외계인 타임로드 종족이기 때문에 죽음의 위기에 처하면 신체가 완전히 재구성되어 부활한다'라는 설정이죠.


작품 내외적인 이유로 도중에 배우가 교체되는 일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죠. 하지만 어지간하면 비슷한 외모나 특징을 가진 배우를 새로 캐스팅하고 별다른 설명이 없거나, 작품 속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배우도 바뀌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비슷하게 수십 년간 여러 배우가 거쳐 간 007 시리즈 역시 제임스 본드의 얼굴이 바뀌더라도 '나는 원래부터 이랬소' 라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걸 생각하면 확실히 보기 힘든 대처인 듯합니다.


재생성을 하게 되면 닥터는 실제로 몸이 변하고, 함께 오랫동안 모험해왔던 동료들도 닥터가 변한 것을 보고 혼란에 빠지는 모습은 몇 번이나 반복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반응은 작중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시청자들도 똑같이 겪습니다.


이게 다 한 사람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작품들은 배우를 바꿀 일이 있어도 그나마 위화감을 줄여 줄 만한 비슷한 배우를 물색하지만 닥터의 캐스팅에는 한계가 없거든요. '저게 진짜 닥터 맞냐'는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것은 작품 안이나 밖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독특한 배우 교체 과정이야말로 이 오래된 시리즈에 끊임 없이 활력을 줍니다. 이전 닥터를 사랑했던 팬들에게 재생성은 정들었던 얼굴과의 이별이기도 하지만 곧 새로운 닥터와의 만남이기도 합니다. 재생성을 앞둔 닥터가 애절하게 유언을 남기다가 얼굴이 바뀌자마자 곧바로 활기차게 인사를 건네는 순간은 참으로 복잡한 감정을 남긴다는 것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네요.


닥터후는 타임머신을 타고 수많은 외계인들과 사건을 만나며 끝없는 우주를 모험하는 드라마입니다. 그리고 모험을 하는 닥터마저 계속해서 모습과 성격이 바뀌며 무려 60여년 동안 이어지는 동력을 제공합니다. 보통 이야기란 건 길어질수록 고착화되기 마련인데, 닥터후는 매우 초창기부터 한계 없는 변화를 모토로 삼은 이야기니까요.


사실 닥터후만큼이나 오랫동안 이어지는 시리즈가 적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단일 주인공의 단일한 서사가 반세기가 넘게 계속되는 TV 시리즈로서는 거의 유일한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그 오래 전 방영분과 최신 방영분을 비교하면 '이게 정말 같은 작품이 맞는 건가'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시대가 다르고, 작가가 다르고, 제작 환경이 완전히 다르죠.


1대와 12대 닥터의 만남. 12대 닥터 역을 맡은 피터 카팔디는 닥터후의 첫 방영 당시 5세였습니다


그럼에도 어느 시대에나 닥터가 있습니다. 닥터는 어떤 모습이라도 될 수 있습니다. 그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모든 닥터들은 하나의 인격체이며, 전부 연속성을 가진 닥터의 생애였다는 사실이 이야기에 통일성을 부여합니다. 시청자들이 '이건 닥터다'라고 느낄 수 있는 본질이 있으니까요.


반대로 보면 새 부대에 담은 술이 시청자들의 인정을 받지 못할 경우 중심이 흔들리게 될 수도 있다는 한계 역시 존재합니다. 실제로 닥터후는 1989년 당시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2005년까지 무려 16년 동안이나 기나긴 휴방기를 맞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엔 미래에 부활하게 될 거란 보장도 없는 시기였으니, 그냥 옛날에 끝난 시리즈라는 인식이 전부였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힘겹게 부활한 시리즈가 21세기에는 과거 전성기를 뛰어넘은 거대 글로벌 프랜차이즈로 거듭났으니, 역사를 되짚어 보면 상당히 놀라운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심지어 아예 새로운 판에서 시작한 리부트가 아니라 기존 닥터후의 내용을 이어가는 단일한 시리즈로서 부활에 성공했죠.


물론 시대에 맞기 여러 설정과 배경에 많은 수정이 가해지긴 했습니다만, 이때마저도 '닥터'라는 캐릭터는 하나의 정체성을 유지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재생성이란 단순히 배우가 바뀌는 것을 넘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다시 부활하는 드라마 그 자체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닥터후는 계속해서 새 시리즈가 나오고 있긴 하지만 이제 다시금 침체기에 들어섰다는 평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회의 분위기가 다시금 격변하고 있는 시기에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게 우연은 아니지 싶습니다.


본래 닥터의 재생성 횟수는 12번이 마지막이라는 설정이 있었는데, 최근 시리즈를 이어가기 위해 재생성의 한계를 아예 없애버리는 변경이 이뤄졌죠. 그런데 제한이 있었던 시절에는 활기가 넘쳤던 시리즈가 오히려 동력을 잃었다는 건 매우 역설적인 일이 아닌가 합니다.


과연 닥터후라는 프랜차이즈는 이번에도 위기를 견뎌내고 부활할 수 있을지, 아니면 결국 닥터도 영원히 되살아날 수는 없는 것인지......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되는군요.






아, 저기 있군. 바보 같고 늙은 우주. 구해줄수록 더 구해달라고 하는. 마치 쳇바퀴 같아.

그래, 알아. 내가 없으면 전부 다 큰일나겠지. 내가 한 번 더 산다고 해도... 누가 죽지는 않을 거야. 뭐, 나만 빼고.

잠깐 기다려, 닥터. 이건 명확히 해두자고. 몇 가지 말해둘 게 있으니까. 기초적인 것부터 해보자. 절대 잔인해지지 말고, 절대 겁쟁이가 되지 말아. 그리고 절대, 절대 배는 먹지 마!

기억해, 증오는 언제나 어리석고, 사랑은 언제나 현명하다는걸. 항상 친절해지도록 노력하고, 선해지는 걸 포기해선 안 돼.

아! 그리고 절대 누구에게도 네 이름은 말해선 안 돼. 어차피 알아들을 사람도 없을 거야. 아이들... 아이들만 빼고. 아이들은 들을 수 있어. 가끔, 그들의 마음이 올바르고, 별들도 그렇다면, 아이들은 네 이름을 들을 수 있어.

그렇지만 아무도. 아무도 모를 거야. 영원히.

크게 웃고, 빨리 뛰고, 친절해야 해. 닥터, 이제 가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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