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서 없는 한밤의 잡생각
어느날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뒤척이다가 MMORPG에 대한 생각을 해봤습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파이널 판타지 14 등으로 대표되는 게임 장르를요. 한때는 게임 시장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파급력이 굉장한 장르였지만, 점차 쇠퇴하다가 현재는 종종 한물 간 장르 취급을 받는 경우까지 생겼죠.
물론 엄밀히 말해서 장르 자체가 힘을 잃었다고는 볼 수 없을 겁니다. 현재도 어마어마한 수익을 벌어들이고 있는 데다, 신작 역시 꾸준히 등장하고 있으니까요. 어떤 장르든 시대에 따라 유행하고 사그라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럼에도 온라인 게임의 상징과도 같았던 위치가 어느정도 흔들린 것은 부정하기 어려울 겁니다.
이유를 묻는다면 날이 갈수록 빠르고 즉각적인 흥미를 추구하게 된 시대에 매일매일 몇 시간의 접속이 사실상 강제되는 무거운 게임이 설 자리는 좁아졌다는 대답이 돌아오겠죠. 분명 정확한 이유입니다만, 그날 밤은 유독 더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생각을 좀 더 해보기로 했습니다.
RPG란 Role-Playing Game. 다시 말해 역할놀이입니다. 레벨을 올리고 더 좋은 아이템을 먹는 것 이상으로 근본적인 것이 바로 '또 다른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현대식 RPG의 원류는 TRPG(Tabletop Role-Playing Game)로부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죠.
이 TRPG가 무슨 게임인고 하니, 말 그대로 테이블에 모여 앉아 친구들끼리 하는 역할극입니다. 자신의 캐릭터를 스스로 설정하고 정해진 룰에 따라 가상의 모험을 떠나는 연기를 하는 놀이죠. 컴퓨터? 없어. 마우스? 키보드? 종이랑 주사위뿐이야. 그래픽? 그냥 눈앞에 무서운 용이 있다고 상상하면 그만이야.
이런 게임을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즐기게 된다면 더할나위 없이 재미있겠으나, 역시 복잡하고 번거로운 게임 진행 방식 탓에 어느 수준 이상으로 보편화되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장 저도 직접 TRPG를 경험해본 적은 없었기에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20세기 후반 개인용 컴퓨터의 발달에 따라 RPG가 컴퓨터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CRPG(Computer Role-Playing Game)라고 불리는 장르가 탄생한 거죠. 그 유명한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나, 폴아웃 시리즈 등이 이 CRPG에 속합니다.
시작점이 상상력만 받쳐준다면 뭐든지 할 수 있는 TRPG였던 만큼, 이 장르는 문제 해결의 자유도, 동료들과의 풍부한 상호작용 등을 기조로 발달합니다. 하지만 역시 직접 사람들끼리 얼굴을 맞대고 하던 게임에 비해 컴퓨터 게임에 넣을 수 있는 경우의 수는 한계가 있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이제 인터넷의 발전에 따라 MMORPG가 보편화되기 시작합니다. 한눈에 담기도 어려운 거대한 세계가 모니터 속에 있습니다. 테이블 하나엔 다 둘러앉지도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그 세계로 접속합니다.
혼자서 세계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닐 수 있었던 싱글 CRPG에 비해 직접적인 자유 자체는 줄어들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눈에 보이는 수많은 다른 유저들이 바로 무한한 상호작용 자체라고 할 수 있죠.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동료도, 적도 될 수 있는 진짜 사람들이 컴퓨터 속 세계로 들어오게 된 겁니다.
사실상 테이블에서부터 RPG가 꿈꿔왔던 이상이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현재에 들어서는 결국 조금씩 힘을 잃어가고 있는 듯하죠. 왜일까요.
이쯤 되어서 잠자기는 글러먹은 것 같았기 때문에 계속 생각을 이어나가 보기로 했습니다.
MMORPG의 태동기에는 인터넷 역시 새로운 것이었죠. 방 안에 앉아서 겨우 기계 하나로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경험 자체가 신선했을 것 같습니다. 하물며 가상 세계 안의 또 다른 내가 되어서 겪는 경험이라면 오죽 특별했겠죠.
당시에는 게임에 컨텐츠가 부족하다고 해도 단순히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요. 정 할 게 없으면 그냥 마을 안에서 점프만 연타하며 경치 구경을 할지언정 게임을 끄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죠.
조금 조심스럽습니다만 이제 사람들은 그런 연결을 굳이 게임에서 찾을 필요가 없어진 것 같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연결들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SNS를 확인하고, 유튜브에선 따라가기도 벅찰 정도로 엄청난 양의 컨텐츠가 쏟아지죠.
오히려 이제는 너무 많은 연결이 부담이 될 때도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시대에는 게임에서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별 감흥이 없습니다. 저기 움직이는 저 캐릭터가 사람이라고? 그게 뭐?
결국 익숙함이 RPG 특유의 역할놀이를 희석시키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제 사람들에게 게임 속 세계는 모험이 펼쳐지는 무대라기보다는 빠르게 정복해야 할 대상이 된 게 아닐까요. 예전엔 퀘스트를 수행하고, 레벨을 올리고, 점점 강해져서 엔드 컨텐츠를 정복해 '내가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라는 성취감이 있었다면, 이제 엔드 컨텐츠는 기본값입니다.
여기까지 오면 굳이 MMORPG를 하게 될 이유가 없어진 듯합니다. 몬스터를 잡고 싶거나, 다른 사람들과 대전을 하고 싶으면 지루한 레벨업 과정 없어도 바로 시작할 수 있는 게임이 쏟아지는 시대입니다. 물론 다른 게임을 하러 간다고 완전히 동일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되는 건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예전만큼 유일무이한 재미까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와중, 2023년 출시된 CRPG 발더스 게이트 3가 공전의 히트를 쳤죠.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CRPG는 물론 사멸한 적도 없지만 전성기를 보낸 이후로는 알음알음 매니아들 위주로 유지되어 오던 장르인데, 평소 여기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까지 집중을 하게 될 정도로 대단한 성과를 냈으니까요. 슬프게도 저는 컴퓨터 사양이 따라주지 않아 아직 못해봤습니다만......
아무튼 역시 사람들은 RPG가 줄 수 있는 근본적인 재미를 아직 외면하지 않는 게 아닐까요? 발더스 게이트 3는 싱글 플레이라는 환경에서 TRPG에서 느낄 수 있는 자유도를 극한까지 끌어내 극찬받은 작품입니다. 동료는 진짜가 아니지만 기술과 시스템의 발전으로 더욱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온라인 게임이 아니기에 세계는 온전히 나만의 것입니다.
실제로 살아있는 동료를 원해 온라인 환경에 거대한 세계를 꾸렸는데, 날이 갈수록 역설적으로 너무 과도한 연결이 스트레스로 다가온 세계를 이제 등지고 싶어진 게 아닐까요? 스킬 한 번 잘못 쓰면 욕부터 먹는 삭막한 세계를 벗어나 협력과 이야기를 즐길 수 있는 옛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 걸까요? 만약 그렇다면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물론 앞으로 MMORPG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전만큼의 힘은 못 쓴다고 해도 여전히 잘 자리잡은 MMORPG의 산업 규모는 어마어마한 수준이니까요. 하지만 미래의 MMORPG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변하게 될 것도 같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너무 익숙해졌고, 모험가보단 정복자가 되기를 원하니까요. 어쩌면 어딘가에서 상상도 못할 혁신이 터져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나갈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다 해도 우리가 알던 옛 모습이 돌아오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고, 옛 시절에만 안주할 수는 없는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