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한테 사과해 줘"
그 말은 뜻밖이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학생이 되고 첫여름 방학 때 화장도 하고 제법 어여뻐진 딸아이가 집으로 내려왔다.
오래간 만에 온 딸을 위해 저녁을 준비하는 내 손은 바빴다.
그동안 꼭꼭 닫혀 있었던 딸의 방안에 먼지도 털어내고 손님을 맞이하는 것처럼 요란법석을 떨었다.
공주님 모시듯 남편과 껴안고 팔딱팔딱 뛰면서 한바탕 웃고, 밀렸던 폭풍 수다와 함께 그동안 대학생활의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듣고, 남편과 나는 흐뭇한 미소로 "잘 지냈나 보네". "부럽다 빛나는 청춘" 하고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딸은 큰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엄마! 나 실컷 놀고, 푹 쉬고 늦잠 잘 거야" "절대 깨우지 마" 하면서 선포를 하고 자기 방으로 휙 들어갔다.
"아 집이 최고다"를 여러 번 외치면서 오래간만에 집안에서 음악소리도 들렸다.
며칠을 조용히 집에서 지내더니 어는 날이었다.
딸은 남편과 나를 불러놓고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워낙 수다쟁이 애교쟁이 딸이라 아무런 의심 없이 식탁을 차렸다.
와인도 꺼내고 치즈랑 과일도 예쁜 접시에 담았다.
워낙 애교가 많은 딸이라 어떤 말을 할까 기대하며 의자에 앉았다.
와인잔이 오가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딸아이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엄마 나한테 사과해 줘". 딸은 아무 이유도 설명도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순간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안 그런 척 딴청을 피웠다.
복잡해진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서로 마주 보고 너무 어이가 없고 화가 나서 딸아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왜? "너 좀 건방지다".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엄마한테 꼭 사과를 받고 싶어". 딸은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심장이 도둑맞은 것처럼 두근거렸다.
딸의 그 한마디는 나의 마음도 행동도 멈추게 했다. 엄마가 딸에게 사과라니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을까? 돌이켜보면 나의 말과 행동엔 늘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고 믿었다.
솔직히 따지고 싶었다. 당돌한 녀석 싹수없는 녀석. 이 나쁜 계집아이라고 욕하고 싶었다. 마음의 요동이 파도를 타고 멀미가 날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내 눈에는 어느새 섭섭함이 눈물로 왈칵 쏟아져 버릴까 봐 인정하게 될까 봐 두 손을 꽉 쥐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잠시동안 흘렀던 침묵은 깨지지 않았고 나는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그만해. 너 다시 서울로 가". 꼭꼭 씹어 삼킨 말들이 목구멍을 가득 채웠다. 그때부터였다. 가슴 위에 돌덩이 하나가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 걸까. 나는 평생을 부정당한 것만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염없이 눈물이 새어 나왔다. 나쁜 년.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