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텔 침대가 피로 물들다
“악!!!!!!!!!!”
한 여성의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호스텔 뒷마당에서. 그리고 몇 초 후,
“경비원!!!!!!!!! 도와줘요!!!!!!!!!!!”
잠귀가 어두운 나도 눈이 번쩍 뜨였다. 누군가가 숙소를 가로질러 뛰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봤다. 새벽 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어……?”
낯익은 얼굴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어수룩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차갑지는 않은 인상. 한 손엔 오토바이 헬멧을 쥔 사내.
“맞아요. 저 지난주에 왔었어요. 저 방에서 잤는데. 기억력 좋으시네요.”
리셉션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방에 침대가 여섯 개가 놓인 도미토리를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오늘도 저 방, 제가 잤던 같은 침대에서 자면 좋겠네요. 예약은 안 했어요.”
그제야 나는 모든 게 생생히 기억이 났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토요일 밤, 그는 우주 비행사를 연상시키는 두꺼운 방수복을 입고 숙소에 들어섰다. 나는 그의 이름까지 외우고 있다. 후안. 그를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조용히 머물다 호스텔 평점 테러를 하고 떠난 요주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지난주 토요일 단 하루를 자고 간 그는 부킹닷컴에 평점 6점을 남겼다. 방이 너무 단출하다, 침대가 편하지 않다 등 잠자리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말이다. 적나라한 댓글에 그날 직원 채팅방이 한껏 달아올랐다. 평점은 호스텔의 얼굴이자 밥줄이다. 어느 나라 애국심 못지않은 애사심으로 동료들이 똘똘 뭉쳤다.
“저번에도 과테말라 사람 와서 골치 아픈 일 있지 않았어? 그때 본인들이 물건 놔두고 갔으면서 그게 다 우리 직원 잘못이라고 몇 날 며칠 따지고 들었잖아. 변호사라고 연락 왔던 사람은 알고 보니 그 사람 여자 친구였고. 내가 그 창의적인 거짓말에 시달렸던 거 생각하면 정말. 어우.”
그간 현지인의 별난 행태에 진절머리 난 매니저가 전두지휘를 했다. 이에 쌓인 게 많은 듯한 현지 동료들이 공격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아 정말 한 두 번도 아니고. 앞으로 과테말라 사람들은 방을 예약 못하게 막아야 한다니까.’
같은 과테말라 국민인 숙소 주인도 차별적 발언을 내뱉는 데 거리낌 없었다. 8점대를 유지하고 있던 호스텔의 평점이 더 내려갈 것이란 불안감이 그 바탕이었다. 7점대의 숙소로 전락하면 앞으로의 예약률에 큰 파장을 가져올 게 분명했다.
후안, 그렇게 한창 우리의 입방아에 오르던 그 인물이 일주일 만에 다시 돌아왔다. 악평을 남겼던 지난번과 같은 방, 같은 침대를 달라고 말이다. 이번 주도 역시 토요일 밤 근무를 서고 있던 내가 다시 그를 맞이했다. 이번엔 그가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고 오지 않았다. 최소한 또 다른 평점 6점을 막게 된 것에 나는 안심했다. 그가 요청한 침대로 체크인을 마치고 결제를 진행하던 참이었다.
“어떻게 이번엔 미리 예약도 안 하고 오셨어요? 많이 바쁘셨나 봐요?”
카드 결제 기기가 영수증을 내뱉는데 뜸을 들이자 어색한 침묵을 막고자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가 평점 테러를 했건 말건 그는 여전히 내가 친절하게 모셔야 할 고객이었다. 그렇다고 별다른 대답을 기대하고 건넨 질문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인사치레’였다.
“아, 제 친구가 여기 미리 와있어요. 개인실로 방을 잡았을 텐데. 엘린이라고.”
엘린. 그녀도 그와 마찬가지로 요 몇 주간 동료들 사이에서 자주 언급되던 인물이었다. 그녀는 여느 현지인처럼 메신저로 방을 알아봤는데, 변덕이 심한 건지 진짜 남모를 사정이 있는 것인지 예약을 3번이나 바꿨기 때문이다. 한 번은 도미토리에서 개인실로, 나머지 2번은 나타나야 할 당일 날 아침에 갑자기 일정을 변경했다. 막판에는 변심 수수료까지 물어야 했다. 그녀는 이 모든 걸 계좌 송금으로 해결했다. 우리나라처럼 손쉽게 폰뱅킹이 되지 않는 이곳에선 송금을 위해 일일이 은행을 방문해야 한다. 매번 그 번거로운 일을 해낸 그녀를 보고 한편으론 난 그녀가 휴가에 참 열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 그 친구가 있는 방이 3인실이거든요. 그럼 거기 같이 묵는 게 나으시겠어요?”
말하고 나서 나는 아차 싶었다. 괜한 오지랖이었다. 엘린은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어떤 한 남성과 함께였다. 사실 그 남자가 엘린의 삼촌뻘은 돼 보였기 때문에 그들이 가족인지도 몰랐다.
“아니에요. 제가 잤던 도미토리, 2번 방 맞죠? 오늘도 거기에서 잘게요.”
“경비원!!!!!!!!! 도와줘요!!!!!!!!!!!”
같은 방에 있던 다른 동료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우리는 같이 침대를 빠져나왔다. 눈도 제대로 떠지지 않는 상태였지만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명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여자가 밤 보초를 서는 직원과 함께 서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연신 머리를 뒤로 넘기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뭔가 급박한 상황이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주말이라 숙소에 적지 않은 손님들이 있었지만 나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봤다. 엘린이었다.
지난주에 한번 본 사이라고 후안과 나는 제법 편안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체크인 과정을 끝내고 출입 팔찌를 내가 그의 손목에 채워주고 있을 때, 그는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다소 숫기가 없어 보였던 그였기에 나는 생각지 못한 만담에 제법 놀랐다. 앞면을 튼 내가 그새 편해졌나 보다 생각했다.
“엘린이 숙소로 여러 번 연락했었죠? 아니 부킹닷컴 놔두고 왜 직접 메시지를 보냈는지 몰라요. 그럼 미리 송금해야 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그거 제가 다 해줬잖아요.”
“네? 이제까지 돈 보낸 게 엘린이 아니라 당신이었어요? 어유, 예약을 여러 번 바꿔서 돈도 꽤나 자주 보냈어야 했는데. 제가 그때 근무 서고 있어서 엘린한테 답장해줬거든요.”
“네 그러니까요. 한 번은 같이 오기로 한 친구가 약속을 취소해버렸고, 그다음은 엘린이 아팠고, 지난주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못 왔어요. 사실 제가 대신 내 준 돈도 아직 못 돌려받았어요. 지금 전화나 한번 해봐야겠네요.”
온갖 사정을 다 꿰뚫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꽤나 친한 사이 같았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던 그의 얼굴에도 짜증은 보이지 않았다. 약간은 뿌듯함까지 서려 보였다. 나는 그를 방에 안내해준 뒤 같이 수다를 떨고 있던 동료에게 다시 돌아갔다.
“야,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저 사람 기억 안 나?”
“응? 누군데?”
“왜 그, 평점 테러! 지난주에 왔던 과테말라 사람!”
“아 저 사람이 그 사람이야? 야 당장 단체방에 올려. 맘에 안 든다고 점수도 짜게 줘 놓고 일주일 만에 다시 돌아왔다고? 제정신으로 할 일이야?”
우리는 그 사내에 대해 신나게 떠들었다. 가십 파티였다. 다시 올 거면서 왜 점수는 그 따위로 줬냐, 대체 둘은 무슨 사이냐, 그럼 아까 그 여자랑 같이 왔던 남자는 누구냐. 말 그대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전화가 울렸을 때 겨우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참에 어지럽게 깔린 노트들과 출입증을 정리했다. 리셉션 구석엔 웬 낯선 신용카드가 눈에 띄었다. 이름을 보기 위해 카드를 뒤집었다. ‘후안’. 결제 중 엘린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다 그걸 놓고 간 것으로 보였다. 친절히 카드를 집어 들고 후안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나 지금 그 돈 필요해. 밖에 나가야 하는데 돈이 없단 말이야!”
침대가 아닌 해먹에 앉아 그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내 짧은 스페인어로 들은 내용에 의하면 상대는 엘린인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카드를 흔들어 보였다. 나를 보고도 그는 여전히 전화를 이어갔다. 고맙다는 눈인사와 함께 카드를 건네받았다. 그의 통화는 쉽사리 끝날 줄을 몰랐다. 이후 내가 다른 손님을 안내해주기 위해 그 방 근처를 지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전히 해먹에서 휴대폰을 쥐고 있었다. 근무가 끝난 후 주변 정돈을 할 때도 그는 누군가와 전화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게 엘린인지 다른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 크지 않았다. 다른 손님에게도 크게 방해가 되는 통화가 아니었기에 나는 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밤 10시가 돼 경비원과 교대를 한 후 나는 평소처럼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경비원!!!!!!!!! 도와줘요!!!!!!!!!!!”
두 남자가 바닥에 서로 엉켜 붙어있었다. 이미 그들의 얼굴은 피투성이었다. 조명을 켜지 않아 시야가 분명하게 확보되지 않았지만 한 사내가 유독 입 주변으로 피범벅인 것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름 아닌 후안이었다. 불어오를 대로 불어 오른 눈을 움켜 잡고 있는, 또 다른 남자는 엘린과 같이 들어왔던 삼촌뻘 사내였다. 엘린이 묵던 방 근처에 있던 손님들은 다 밖으로 나온 듯했다. 경비원은 그들을 진정시키고 안으로 들여다 보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자리에서 엘린이 털어놓은 상황은 그랬다. 후안과 그녀는 연인 사이였다. 하지만 얼마 전에 끝이 난 상태. 후안이 그녀의 숙소 값을 지불할 때까지만 해도 그 둘이 만나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때 관계가 어찌 됐든 결론적으로 후안이 전 여자 친구와 새 남자 친구의 숙박비를 대준 셈이 된 게 문제가 아닐까. 여기에 제삼자의 상상력을 더한다면 새로 생긴 애인이 불륜의 관계였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있다. 그런 심오한 사연이 없고서야 왜 한밤중에 사투를 벌였겠는가. 그것도 휴가로 온 호스텔까지 쫓아와서 말이다.
경찰은 신고한 지 한 시간이 넘어서야 도착했다. 과테말라 공공 치안 관리의 현실이랄까. 경찰보다 그녀의 가족이 더 빨리 왔다. 부모님도 이미 후안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우리 딸한테 왜 이러냐며 울분을 토했다. 똑똑히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말이다. 둘은 가벼운 연인 관계가 아니었던 게 틀림없었다. 새하얗던 침대 시트가 여기저기 피로 얼룩진만큼, 현장은 그 둘의 싸움이 단순 ‘치정 싸움’을 넘어 꽤나 심각한 폭력에까지 이르렀다는 걸 보여줬다. 하지만 사건의 뒤처리는 생각보다 깔끔하게 진행됐다. 두 남성은 이미 그들 간의 싸움으로 전력을 다해서일까. 아무런 저항 없이 경찰의 말을 따랐다. 그때쯤 숙소 주인은 물론, 매니저까지 모두 호스텔에 모여 있었다.
매니저는 사건 현장 주변의 CCTV를 돌려봤다. 비디오 속에는 현장이 보여주지 못한 소름 끼치는 범죄의 진행 과정이 담겨있었다. 모든 것이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었던 것이다. 후안은 그녀와 그녀의 남자 친구가 묵고 있는 방 앞에서 오랜 시간을 서성였다. 비디오 스크롤이 길게 넘어가도록 말이다. 그는 문이 열리거나 혹은 남자 친구가 나오기까지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문에 귀를 대보기도 하다가 정신없이 방 근처를 왔다 갔다 걸어 다녔다. 그러다 드디어 방문이 열렸고, 그는 용수철처럼 그 안으로 튀어 들어갔다. 그 순간 빨리 감기를 한 착각을 느낄 정도의 속도였다. 그가 침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린이 허겁지겁 뛰쳐나오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그때 둘이 치고받고 싸움을 시작한 것으로 보였다.
애초에 그 범죄에는 후안의 용의주도한 계획이 수반되었다. 방이 피로 더럽혀지고 경찰이 들이닥쳐서야 우리는 수수께끼 같았던 정황이 하나둘씩 아귀를 맞춰가는 것을 느꼈다. 지난주에 엘린이 숙소에 올 줄 알았던 그는 장대 같은 비를 뚫고 오토바이를 타고 이곳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땐 이미 엘린은 일정을 변경하고 난 후. 헛걸음에 대한 분노였는 지 그는 호스텔 평점에 대신 분풀이를 하고 떠났다. 다음을 기약했다. 엘린이 그놈과 함께 방문하는 다음 주말을 말이다. 이곳 안티구아와 한 시간 거리의 과테말라시티에서 온 그는 별다른 관광을 하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고 다른 동료들도 입을 모아 말했다. 저녁 내내, 심지어 밤중에도 밖에서 그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분위기도 가볍지 않았다고 했다. 방에 짐을 던져두고 나가 놀기 바쁜 다른 투숙객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후안은 남자를 덮치기 위해 때를 엿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 경찰이 다녀간 뒤에는 호스텔에 더 이상 곤란하거나 귀찮은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현지 손님에 대한 동료들의 부정적인 선입견만 더 강해졌다. 졸지에 ‘사랑과 전쟁’의 중심이 돼 버린 호스텔은 곧 소문의 중심이 될 게 뻔했다. 우리는 사건 당일 함께 숙박했던 손님들이 말을 옮기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안 그래도 비수기로 텅텅 빈 방이 치정 싸움의 중심으로 부상하며 손님과 더 멀어지게 되었다. 차라리 막연하게 평점 앞자리가 바뀔까 걱정하던 그때를 모두 그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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