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텔리어의 삶이 제게 이런 변화를 안겨줬습니다
어느덧 한두 달에 한 번씩 도시를 옮겨가며 호스텔에서 일하는 게 제 일상이 됐습니다. 예전 한국에서의 제 모습과 호스텔에서 지내는 지금의 저를 비교해보면 확실히 많은 게 달라졌습니다. 호스텔리어로서 일을 시작하기로 했을 때는 미처 계산하지 못한 소득 혹은 혜택이라고 할까요. 아마 어떤 강의나 처방전도 저를 이렇게까지 바꾸지는 못했을 겁니다. 여행 경비 절약, 언어 학습, 관광업 경력 개발 등 표면적인 이점 외에도 호스텔에서 일하면서 여행을 하면 어떤 내면 변화를 맞이할 수 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1. 처음 보는 사람과의 대화를 ‘이끄는 게’ 어색하지 않아 졌다
리셉션에서 일하다 보면 의외로 가장 난감한 순간이 언제 인지 아시나요. 바로 손님이 처음 숙소 문을 열고 리셉션으로 다가올 때입니다. 제가 ‘안녕하세요’와 같은 간단한 인사말을 마치고, 때로는 조금 과장을 더해 ‘환영합니다’를 우렁차게 외친 후에도, 본격적으로 체크인을 진행하기까지 시간이 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숙소로 들어와서 한참 본인 짐 정리를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얼굴만 빤히 쳐다보며 웃고 기다리기엔 그 순간이 너무 깁니다. 이때, 일면식도 없던 사람에게 말을 붙여 대화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 압박이 찾아옵니다.
항상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데 익숙했던 제가 갑자기 누군가에게 이런저런 말을 건네는 게 쉬울 리가 없었습니다. 자연스럽지도 않았습니다. 대체 무슨 소재로 대화의 물꼬를 터야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방금 제 삶에 나타난 데다 인종도, 문화도, 생김새도 모든 게 다른 이방인에게 말입니다.
근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밑도 끝도 없이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부터 묻고 봤습니다. 잠시 후면 여권을 통해 뻔히 알 수 있는 사실인데 말입니다. 게다가 출신을 묻는 질문은 단답으로 금방 맥이 끊길 확률이 높습니다. 더 뻘쭘한 분위기로 직행하는 지름길이지요. 그때마다 괜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책상 서랍을 여닫으면서 시간을 벌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는 다릅니다. 손님과 마주하는 시간이나 그 순간의 상황을 고려하여 적절한 멘트를 건네는 센스가 제게도 생겼습니다. 아침 일찍 도착하는 사람에겐 야간 버스를 타고 왔는지, 어디서 오길래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오는지 등을 물어봅니다. 그 사람이 멘 가방의 크기를 잘 관찰하여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합니다. “아니 대체 이렇게 작은 가방으로 어떻게 여행을 하는 거예요?” 예전엔 꽁꽁 얼어붙어 있기만 했던 리셉션이 이제는 게스트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웃음소리로 시끌벅적해집니다.
요즘은 ‘능청스러움’이라는 새로운 무기도 장착한 기분이 듭니다. 저는 더 이상 누군가와의 말문을 먼저 열 때 머뭇거리거나 수줍어하지 않습니다. 손님 앞에서 이런저런 말을 던져가며 대화를 이어가는 연습을 거치다 보니 이제 길거리에서도 낯선 사람과 친해지는 데 문제가 없어졌습니다. 저는 누군가가 제게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제가 타인에게 스스로 접근할 줄도 아는 사람이 됐습니다.
2. 혼자 쓸데없는 사색에 빠지는 습관이 사라졌다
숙소에서 직원으로 살면 그냥 일반 게스트 일 때와는 느낌이 다릅니다. 웬만한 숙박객 모두가 제 얼굴을 알고 저와 말을 튼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즉,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있지 않은 이상 제가 건물 어딜 가든 ‘지인’과 마주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배낭여행객의 특징인지 유난히 성격이 활발한 손님이 참 많습니다. 그들은 오고 가며 인사는 기본이고,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뭘 먹고 있는지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세심하게 관심을 가져줍니다.
근무 초반에는 이런 관심과 사교적인 분위기가 귀찮게 느껴졌습니다. 침대 밖에서 나만의 공간을 빼앗긴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전형적인 내향인인 저에게 불편한 환경이었습니다. 특히나 숙소 자체에서 진행하는 행사가 있는 날이면 더 괴로웠습니다. 직원인 제가 말없이 사라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매번 행사에 참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근무 시간만 끝나면 제 침대로 도망가기는 싫었습니다. 우습지만 주인도 아니면서 괜한 애착에 휩싸여 숙소 분위기를 책임지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저 혼자 반강제적으로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시간을 늘리고 보니 자연스레 제 나쁜 습관이 자리를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 걱정, 현실에 대한 불평, 뭘 해야만 한다는 압박 등 혼자 생각에 빠질 틈이 안 생겼습니다. 가만히 앉아 제 머릿속 상상의 구렁텅이로 발을 담그려 하면 누군가가 제게 말을 건넸습니다. 직원을 향한 질문이 됐던, 같은 여행자로서의 안부가 됐던 말입니다. 센티해지기 쉬운 밤 시간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같이 영화를 보자, 게임을 하자, 맥주를 마시자 등 저 혼자 남아있을 시간이 잘 없었습니다. 그간 저를 저 세상 끝까지 몰고 가던 어두운 생각의 꼬리들이 모습을 드러낼 틈조차 없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잠을 잘 시간이 됐습니다. 하루 종일 사교 활동에 모든 에너지를 잃은 저는 무엇을 떠올릴 여유 없이 바로 곯아떨어졌습니다.
이런 나날이 지속되자 제 머리에도 드디어 긍정의 기운만이 가득 차게 됐습니다. 요즘 홀로 카페에 가거나 침대에 드러누워 혼자 있는 시간을 늘렸는데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3. 어떤 일에도 도전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책상 앞에 앉아 글자만 쳐다보는 게 평생 과업인 줄만 알았던 제가 지금은 관광 서비스업에서 잘만 적응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호스텔에서 일하며 여행하는 방법을 처음 들었을 때도 저는 당장에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내 성격상 나는 절대 못할 거야.’라고 단정 짓고 ‘이런 일이 생기면 어쩌지, 저런 일이 생기면 어쩌지’하고 두려움에 떨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게 도움이 되는 일이 분명했는데도 행동에 옮기는 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직접 해보니 저는 이 일도 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심지어 제 이전 직업보다 제게 훨씬 더 잘 맞는다는 것도요.
여러 호스텔을 전전하며 저처럼 일을 하며 돌아다니는 여행자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정답’이라고 듣고 자랐던 방식이 사실은 하나의 선택지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했습니다. 동료들이 삶을 살아가는 색깔 있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제 뺨을 때리는 것 같았습니다.
짧게는 2년, 길게는 8년 넘는 세월 동안 이 나라 저 나라 호스텔에서 근무하며 여행을 지속하고 있는 2-30대 젊은이들, 여행지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을 조명하는 인터뷰를 4년 동안 꾸준히 진행해 어느덧 유명 기자가 된 30대 남성, 가는 곳마다 요가를 가르치며, 자기 나라 간식을 만들어 팔며 여행 경비를 충당하는 20대 여성 등이 제게 일깨워줬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길은 참 다양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간 두려움을 느끼고 도전하지 못했던 일을 지금의 내가 잘 해내고 있고, 직장 생활에서 안정적인 월급을 받으며 한 곳에 정착하는 게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목격한 지금. 저는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강한 자존감을 갖게 됐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며 살아갈 용기가 생겼다고 해야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조금은 별난 길을 걷더라도 그것이 틀린 게 아니며 제가 결국에는 잘 적응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한국에서 저와 비슷한 사람에게 둘러싸여 똑같은 일상에 파묻혀 있을 때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발상이지요.
앞으로 호스텔리어로서 경험을 이어가며 제가 또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 갈지 기대가 됩니다. 훗날 새롭게 탈바꿈한 저를 다시 설명드릴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
Photo by Lesly Juarez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