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음
세상의 사람들은 너무나 다양하다. 내 유전자를 만든 부모도 내 유전자를 물려받은 자녀도 닮은 부분이 너무 많지만 생각은 너무 다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던가? 나랑 죽이 너무 잘 맞는 사람이 뱉은 말 한마디가 나랑 너무 달라서 입을 꾹 다문 적이 있는가? 유전학 적으로 같은 쌍둥이마저도 다른 부분이 너무 많다.
나는 생각한다. 과연 진리란 있는 것인가? 변하지 않는 진리, 어떤 이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가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 나에겐 항상 큰 관심사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의 결론은 '절대 불변의 진리는 없다.'이다. 그렇다면, 부모나 교사처럼 누군가를 키워내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지금까지는 당대의 철학과 가르침 본인의 경험을 가르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나에게 가르치는 자가 가르침을 받는 자에게 가장 중요하고 선행하여 가르쳐야 할 것은 태도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 말이다. 다름을 인정한다는 말에는 많은 것들을 내포하고 있다. '너와 나는 다른 존재이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속에는 우리는 절대 위가 없고 아래가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 상황에서 교사는 부모는 어떻게 자식을 가르쳐야 할까?
훈육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어찌 인간이 훈육하지 않고 어린이를 키워낸단 말인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전제가 다르다. 나는 훈육할 수 있다는 당위성을 버리고 필요에 의해 행하는 훈육과 나는 부모기에, 교사이기에 당연시하는 훈육은 다르다. 전자는 아동과 나는 다름을 인정하는 훈육이고, 후자는 아동과 나를 수직적인 관계에서 바라보는 훈육이다. 전자는 아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훈육보다는 대화를 통해 나아갈 테지만, 후자는 훈육을 통해 나의 생각과 가치관에 맞는 아동이 빚어지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지속될 것이다.
미묘한 차이 같지만 천지차이가 나는 행위가 될 것이다. 사실 과거에는 당대의 지식과 가치관을 공동체가 공유하고 그 가치대로 사람을 키워내야겠다는 공동의 합의가 존재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는 이러저러한 과정을 통하여 다양성이 필연적이 사회가 되었고, 그로 인해 다름을 인정하는 것 또한 필연적이 사회가 되었다. 그래서 부모나 교사, 다양한 교육을 하는 인사들의 가장 첫째 되는 덕목은 권위를 내려놓는 것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에서 위아래가 있다면 사회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너와 내가 다른데 누군 옳고 누군 그르다? 누구의 이야기를 진리로 받아 드릴 것인가.
너와 나는 다를 수 있는 평등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합의를 통한 나아감이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변혁적 리더십, 안정적인 공간, 심리적 안정감, 경청, 등등 요즘 중요하게 이야기되는 가치들은 이것을 역설하기 위해 이야기되는 것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한다면 나아감을 위해 합의를 해야 한다. 나아감의 과정에서는 항상 실패가 수반된다. 수반된 실패를 받아들여야 하고 서로를 인정하며 다시 합의해야 한다. 다시 나아가야 한다. 이런 것들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권위의 내려놓음이다. 나를 지지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고, 그것을 바탕으로 타인을 지지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것, 그것을 통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 부모와 교사가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