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
정년을 마친 낙타가 한가로이 오수(午睡)에 빠져 있다. 두 무릎을 꿇고 엎드린 늙은 낙타의 등으로 누더기가 된 햇살이 쏟아진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살포시 눈을 뜨는데 웬만한 일은 눈감아주고 살아왔다는 듯, 아래로 오긋이 내려 깐 두 눈이 무덤덤해 보인다.
휘어지도록 많은 짐을 지고 걷는 낙타는 지치고 허기지면 등이 낮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체념하고 살아온 세월이 길었다는 듯 성숙한 여인의 젖무덤 같던 봉우리가 겨우 흔적만 남았다. 동병상련의 마음 때문일까. 사막을 벗어나 조락(凋落)의 시간에 든 그의 굽은 등과 야윈 발에 자꾸 눈길이 머문다.
사막에 길을 내느라 만신창이가 된 낙타의 발가락을 보면서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잃어 꼼짝달싹할 수 없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우리도 별빛을 의지해 걷는 낙타의 운명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남편의 실수로 떠안은 빚물이 하느라 우리 부부도 서로의 등에 혹을 짊어지고 아득한 사막을 걸어야만 했으니까.
남편은 사람이 좋아 친구가 많다. 측은지심이 강해 어려운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는 것도 남편의 복병이다. 사람은 다 자기 마음 같은 줄 알고 지내다가 뒤퉁수를 맞는 일도 잦았다. 남편의 중학교 동창한테 빚보증을 서주었는데 그 친구가 자취를 감춘 것이다. 친구들 사이에는 그 친구 공장이 부도났다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정작 빚을 내준 남편만 모르고 있었다.
적은 돈도 아니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것 인지. 모래알처럼 서걱거리는 분노로 남편을 바라보는 것도 힘들었다. 눈앞에 놓인 그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남편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사실, 며칠 전부터 날아오는 독촉장과 최고장에 불안했지만, 남편은 친구가 갚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남편 친구도 가끔 얼굴을 보이면서 나를 안심시켜서 잘 해결될 줄만 알았다.
어느 날, 우리 집에 절대 피해 주지 않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했던 그 사람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남편 친구가 사라지자 은행에서는 바로 남편의 급여를 차압하고 아파트를 압류하겠다고 최고장을 보내왔다. 헛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마련한 내 집인데. 빚보증으로 집을 내놓게 될 지경에 놓이니 남편 친구보다 남편이 더 용서되지 않았다. 그날부터 우리는 낙타처럼 등을 갉아먹으며 빚 갚느라 얼굴 한 번 환하게 펴지 못하고 산 것 같다.
어떻게든 위기를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던 남편은 궁리가 많아졌다. 은행의 독촉에 시달리며 내 눈치도 살펴야 하는 남편의 습자지 같이 얇은 귀를 주식이 덥석 물어버렸다. 더구나 한창 주식 열풍이 불던 때라, 직원 중 누구는 주식이 올라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소문도 공공연히 떠돌았다.
하나, 주식이라는 것이 어디 하루아침에 수익이 나는 구조이든가. 쌓았다가 파도가 밀려오면 속절없이 사라져 버리는 모래성처럼 허탈해지는 것이 주식이 아니던가. 내가 팔면 올라가고 내가 사면 떨어진다는 징크스가 남편한테도 예외는 아니었다. 빨간불이 들어올 땐 당장 돈방석에 앉는 것처럼 흥분되었다가 하락장에서 한숨 쉬기를 반복하던 남편은 서서히 판단력도 잃어갔다. 자기 딴에는 은행 이자라도 갚아보려고 시작했을 텐데, 결국 주식 빚까지 덤으로 떠안게 되었다.
암막 커튼이 드리워진 것처럼 하루하루가 암담했다. 업보 같은 혹을 지고 끝이 없는 사막을 터벅터벅 걷는 낙타의 심정이 딱 그랬을 성싶다.
사람이 부리고 길들이는 짐승 중 낙타만큼 슬픈 운명을 지닌 동물이 또 있을까. 집채 만 한 짐을 지고 사막을 걸어갈 때 치근덕대는 모래바람을 따돌리느라 얼마나 지치고 힘들었을까.
낙타는 가슴으로 운다. 인조 속눈썹처럼 긴 속눈썹이 눈을 덮어 눈물을 가리지만, 눈망울에는 항상 눈물이 촉촉이 맺혀있다. 누가 낙타를 사막에 최적화된 동물이라고, 사막의 배라고 명명했던가. 우물 하나 없는 사막에 던져진 낙타한테 정작 닻을 내릴 항구는 어디에도 없었을 성싶다.
사막처럼 불구덩이 같은 그 시간은 아주 느리고 무겁게 흘렀다. 남편 친구한테 삶을 저당 잡혔던 그때, 사실상 우리 부부의 시간도 멈춰 버렸다. 어쩌면 내 등에 실린 짐을 평생 내려놓지 못할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도 했었다. 물 한 모금 못 먹고 모래 폭풍 속을 걷는 낙타에 비하면 포시럽다고 하겠지만, 그때가 우리에겐 바야흐로 낙타의 시간이었지 싶다.
오래도록 맞벌이하면서 허리를 졸라맨 덕에 빚 청산을 할 수 있었지만, 그 일로 암울한 시간을 보내면서 세상을 마주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아픔이 사람을 철들게 하는 것처럼 작은 일에도 각을 세우던 마음이 둥글어지면서 포용력이 생긴 것 같다. 뭐랄까. 마음이 순두부처럼 몽글몽글해졌다고나 할까. 나한테 닥친 불행이 억울해서 남의 탓으로만 돌렸던 원망을 거두고 나니 비로소 다른 사람들의 아픔도 눈에 들어왔다. 저마다의 통증을 가슴에 매달고 살 듯. 고통의 무게가 다를 뿐이지 살면서 누구나 사막을 만나는 시기가 한 번씩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갑을 넘기고 나니 늙은 낙타처럼 웬만한 일에는 동요되지 않는다. 걷다가 뜻밖의 오아시스를 발견하는 횡재를 만난다 해도 유난스러워할 일이 없다. 흔들리는 인생길에서 부유하던 잡념들을 가라앉히고 마음에 단단한 근육을 불어 넣었기 때문이리라.
인생은 사막을 걷는 낙타처럼 고독하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삶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것 같다. 발이 푹푹 빠지는 사막을 잘 빠져나온 사람만이 삶을 반추할 수 있듯이 머리에 희끗희끗한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남편은 다시 그 친구를 만난다. 마음이 여물지 못한 남편은 어느 한 시절은 그와 함께 울고 웃던 막역한 친구였다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단다. 그런 남편한테 나는 속도 없는 사람이라며 핀잔을 주고 싶지만, 이제 와서 그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다. 남편의 말처럼 살면서 어느 한 시절은 행복했다는 위안이 있기에 우리는 또 오늘을 살아갈 힘을 낼 수 있으리라.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걷다 보면 분명 오아시스가 나올 것이라고 믿는 낙타처럼, 더 낮고 겸손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늙음을 맞이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