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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인연을 싣고

by 박종희


오랜만에 기차를 탄다는 설렘에 서둘러 플랫폼으로 나갔다. 이게 얼마만인지. 후욱, 콧속으로 들어오는 그리운 냄새를 맡으면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고속열차라 그런지 기차가 바람처럼 달린다. 기차가 지날 때마다 차창밖은 그림엽서로 채워진다. 이상 기후로 일주일이나 더디 핀 봄꽃들도 서둘러 엽서를 완성하느라 바쁘다.


오송역을 떠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휙휙, 달리던 기차가 눈에 익은 도시를 지나고 있었다. 고향인 제천을 지나 단양으로 향하는 순간, 오래된 풍경들이 하나둘 눈에 어른거렸다.


꿈에도 그립던 철길이다. 내 유년 시절의 기억 대부분을 차지하던 철길은 시멘트 회사 앞에 있었다. 나는 어릴 때 시멘트 회사 앞에서 상점을 운영하던 친할머니집에서 자랐다. 1960년 대 중후반, 할머니집에는 기차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그때는, 산업화의 시작과 함께 시멘트 회사가 꿈틀거리던 시절이었다.


당시 대여섯 살이었던 나는 맨드라미가 줄지어 핀 철길 앞 길가에 앉아 시멘트를 실은 화물열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는 것이 낙이었다. 종일 철길 앞 공터에서 기차를 세면서 놀다 보면 할머니가 나를 부르러 오시곤 했다.


회억해 보니, 내가 매일 기차를 기다린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일 년에 서너 번 명절 때나 할머니 생신이 되면 부모님이 오셨다. 어린 마음에도 기차가 지나가면 엄마가 온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열차에 새끼처럼 매달린 칸을 세며 꿈을 키우던 내가 언젠가부터 기차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외할머니다. 아마도 초등학교 이삼 학년 때의 일이었지 싶다. 여름방학이었는데 외가에 가 있던 남동생과 외할머니가 오셨다. 외할머니는 옥수수와 감자떡을 해오셨는데 이상하게도 집안 공기가 냉랭했다. 느낌에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다투신 것처럼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친할머니가 저녁을 준비하시는데 외할머니가 갑자기 일어나시더니 집에 가시겠다고 했다. 저녁이라도 드시고 가라고 말렸지만, 외할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나섰고 남동생이 따라가겠다고 떼를 썼다. 외할머니는 치맛자락을 붙잡는 남동생을 뿌리치며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


남동생이 울면서 외할머니를 쫓아가는 바람에 친할머니와 나도 도담역까지 따라갔다. 외할머니는 울며 매달리는 남동생을 내동댕이 치고 홀연히 기차에 올랐다. 외할머니를 태운 기차가 떠나자 마구 울면서 기적소리를 따라가던 남동생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외할머니가 왜 그렇게 분노하시는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손에 물 한번 안 묻히고 키운 딸한테 시집살이를 시킨다고 다투신 듯했다. 그날 친할머니는 남동생을 매정하게 내치고 가버린 외할머니를 다시는 안 보겠다고 했다.


외가와 친가 할머니들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꼭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인연들이기 때문이다. 외할머니와 친할머니는 기차 안에서 만났는데 서로 등을 보이며 돌아선 곳도 기차에서였다.


외가는 단양에서 마늘 농사와 벼농사를 지었다. 단양은 논마늘이 유명했다. 마늘 농사가 끝나면 외할머니는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마늘 장사를 했다. 단양 육쪽마늘은 알이 단단하고 매운맛이 일품이라 인기가 많았다. 외할머니는 마늘 보따리를 이고 친할머니는 물건 살 보따리를 안고 기차에 올랐다. 그때만 해도 기차는 양쪽으로 마주 보고 앉는 긴 좌석이었는데 인연이 되려고 했는지 두 분이 항상 마주 보고 앉았다. 연세도 비슷한 두 할머니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식들의 중매까지 서게 되었다. 외할머니의 장녀와 친할머니의 장남을 서로 선보게 했는데 결혼까지 이어졌다. 기차가 두 할머니는 물론이고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엮어준 셈이다.


강원도 화천에서 직업군인으로 근무하던 아버지는 휴가 때가 되면 기차를 타고 단양으로 가서 엄마를 만나곤 했다. 덜컹거리면서 연착도 자주 되던 기차를 타고 엄마를 만나고 다시 화천까지 돌아가려면 꼬리가 긴 열차만큼이나 기다림의 시간도 길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여곡절 끝에 부부가 되었고 두 할머니는 더없이 사이좋은 사돈이 되었다. 사돈이 된 이후에도 마늘이며 쌀을 더 나눠주지 못해 안달을 하던 할머니들은 10여 년만에 남남처럼 돌아섰다.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 줄 알았지만, 두 할머니들은 후진을 하지 않는 기차처럼 서로 앞만 보고 달렸다. 자식을 나눈 사람끼리 서로의 뒷모습을 측은하게 여겨야 하는데 물기 없는 말로 속을 헤집었다.


비록 양가 어르신들의 인연은 금이갔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칙칙폭폭 서로의 보폭을 맞추며 금슬 좋은 부부로 사셨다. 친정부모님은 삼남삼녀, 육 남매를 두었는데 자식들이 모두 출가해 제 앞가림을 하는 것을 보고 몇 년 전에 나란히 세상을 뜨셨다,


부모님의 기차를 생각하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나보다도 훨씬 어렸던 나이에 양가 부모님 모시랴, 자식들 키우랴 얼마나 고단하고 막막했을까. 돌이켜보면 육 남매가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도 믿음직한 기관사가 이끄는 열차에 편승해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설령, 실패하는 일이 있더라도 연연하지 말고 기차처럼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신 부모님 때문이리라.


기차가 맺어준 할머니들을 만나고 그분들이 이어준 친정부모님을 만나는 동안 어느덧 열차가 부산역에 도착했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나를 내려놓고 기차는 또 어디로 떠나는 걸까. 어느 인연을 만나러 달리는 걸까.


( 한국산문 6월호 산문로에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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