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인사동 浪人

위파사나와 外面

by 갑비

인사동 백작 M은 20년 넘게 집도 절도 없이 살았던 노숙자였다. 겨울철 혹한에 새벽이 오면 지하철을 타고 종로에서 의정부를 오가며 밤새 얼었던 한기를 녹였다. 여름에는 우정국고목(古木) 나무의자가 침상이었고 조계사 박물관에서 면도를 했다. 장마가 내리치면 빌딩옥상의 아지트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쏘주를 마셨다.

그는 중절모를 쓰고 중고명품 가방을 메고 오전과 오후의 스케줄에 맞춰 출근한다. 간혹 점심은 롯데에서, 간식은 프레스센터 그리고 저녁은 포시즌에서 했다. 종로 광화문 시청이 그의 나와바리였고 지금은 어느 학회를 가던지 애숭이였던 조교들이 학회장을 하고 있다며 쪽팔려서 못 간다고 한다.

그가 반쯤 은퇴한 건 2년 전이다. 코로나 검문에서 주민증이 말소된 실종자로 조사받다 중구청에서 중림동의 독거주택에 입주시켰다. 기관도 민폐 노숙자와 다른 멀쩡한 품위에 꺄우뚱했다. 일각에서는 좌익분자라는 소문도 있으나 노짜출신은 아니다. 정규대 나와 엘지에서 일했던 화이트 칼라로 몰락한 부르조아지 집안의 막내였다.


그는 어릴 적 꿈이 시인이었다. 그 말을 하며 비장하면서도 슬프고 분노스런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주말 인사동 사거리에 자가용이 못 다니잖아... 세단차가 막음 돌에 탁 걸리는 거야. 순간 운전자와 눈이 마주쳤거든 그런데 못 본 척 외면 하드라고"

"에이 그럴 리가 있소. 20년 만에 만난 실종 동생인데 봤다면 그럴 수가 있겠소. 피차 못 알아 본거겠지..."

"아냐... 형은 내가 알아, 눈빛으로 서로 알아봤어..."

그의 형은 불문(佛門)의 재가불자로 위파사나 책도 저술하고 탑골공원에서 노숙자들 밥먹이는 밥퍼 봉사단체를 주관했던 신촌출신의 인텔리였다. 웃기는 건 파고다 공원의 현장에 두 형제가 스치면서도 조우하지 않았다. M에게 "혹시 먹튀 했나 베" 물으니 "내가 그럴 간뎅이나 되는감" 웃는다. 이제 늙어서 노숙자 동생을 다시 본들 이득이 없기 때문일 거라 한다. M은 마음먹으면 20년 전 자신의 몫 잠실 5단지 독채를 재판으로 되찾을 수 있다고 했다. 당시 신혼을 꾸렸던 그 형은 이웃 현대에 살았고 가끔 가면 관악출신의 닥터인 형수가 밥을 차려줬다. 옆에 있던 친정 엄마가 사돈총각 식사 많이 하세요 하고 인사했다. 그 아주머니가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의 저자인 박작가다. 박작가의 아들이 혜화동 병원에서 수련의 당직으로 일하다 급서 할 무렵이었다고 한다.


위파사나는 남방불교의 행법으로 알아차림이다. 알아차린다는 건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남을 보듯이 촘촘히 객관화하는 방법이다. 가방끈으로 득의 하고 닥터마누라를 만나 덧칠하고 재가불자로서 저술과 유사선행으로 소문을 얻었고, 장모의 문단에서 누구 사위라는 선물까지 누리면서도, 실종된 노숙자 동생을 피하는 건 위파사나가 아니다. 참선은 부처의 심장에 빨대꼽고 위파사나는 부처의 불알을 까먹는 기술이다. 지식인들은 위파사나가 아니라 위장(爲裝)사나를 즐긴다. 그런 위파사나로는 불알(佛卵)을 훔치지 못하고 지 물건을 흔드는 용두질에 그친다. 위파사나는 모국 미얀마에서도 식자층의 자위수법이었다.

리버럴리스트 M은 인연에 개의치 않고 詩 한 자락은 남기고 소풍을 끝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자신을 노숙자가 아니라 낭인(浪人)이었다고 불러달라고 한다. 인사동 위파사나의 흔적이 귀천(歸天)에 남아 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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