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나둘셋 Jun 12. 2024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_여전히 노동이 신성한가요?

기본소득, 당신의 의문에 답하다

노동은 언제부터 '신성한 것'으로 취급되기 시작한 걸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100년 전 정도로만 거슬러 올라가도 수 천년 동안 노동은 귀족이나 양반이 아닌 하층 계급이 수행하던 것이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노동'에 부여하는 가치가 엄청나다. 일하는 사람이 아름답고, 열심히 일한 사람이 걸맞은 보상을 받는 게 정의이고, 일하지 않는 사람은 무용하다는 믿음이 사회에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환상'은 대체 누가 심은 걸까. 오늘도 어제처럼 일하던 노비들이 불현듯 영감을 받아 깨달은 것일까, 귀족자본 계급이 세상의 변화에 발맞춰 노동자들을 구슬리기 위해 만들어낸 것일까. 한 발 더 들어가면, 우리는 노동 그 자체를 신성하다고 믿는 걸까 아니면, '돈을 가져다주는 노동'에 한정해서만 그 신성함을 믿는 걸까? 

               

우리 대부분은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은 신성하고, 돈이 되지 않는 '노동'은 쓸모없다는 명제를 받아들이고 살고 있다. 그런데, 인공지능(AI) 앞에서도 이러한 명제가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10년 차 숙련된 의사의 전문지식과 경험을 습득해 1초 만에 진단 결과를 출력하고, 10년 차 변호사가 대략 기억하는 법조항이나 판례를 학습해 1초 만에 관련 판례 등을 정확히 인용한 변론서를 작성하고, 주식의 매도와 매수 타이밍을 0.1초마다 새로 계산해 손익 확률을 따져 이익을 실현하고, 연설문이며, 보고서며, 디자인까지 모든 것을 수 초만에 해내는 인공지능과 '신성한 노동'을 구호로 삼아 인간이 경쟁을 한다는 게 승산이 있어 보이는가?           


<사피엔스>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석학 유발 하라리는 2019년 출간한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의 '일'이라는 챕터에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땐 일이 없을지도 몰라'라는 부제를 달았다. 유발 하라리는 설사 인간과 AI가 상호협력하고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난다고 해도 대규모 '무용계급'의 등장은 불가피할 거라고 전망했다. 그리고, 이를 위한 대안으로 '기본소득제'를 제안하고 있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도 기본소득제의 기반이 되는 철학과 역사, 전 세계적으로 꾸준히 진행돼 온 기본소득 실험을 소개하고는 있지만, 본격적으로 기본소득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이 있다. 오준호의 저서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가 그것이다.               


사실, 우리가 신봉해 온 '노동윤리'에 기초하면 '기본소득'에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코로나19로 '재난기본소득'을 경험한 후 약간 마음이 열렸다 해도, 일상적으로 지급되는 '기본소득'에 대한 회의나 의문은 남아 있을 터다.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는 '기본소득'에 대해 가질 법한 의문을 하나씩 정리해 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었던 때가 2017년인데, 그때만 해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기본소득이 사회적 의제라도 되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는데, 곧바로 경기도와 서울시에서 '청년기본소득' 실험을 진행했고 이후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정치권에서 앞다퉈 공약으로 내놓는 등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 의제가 되었다. 

              

그래서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의 일부를 정리해 소개하고자 한다. 의문을 넘어 기본소득제 도입의 불가피성을 이해하는 시작이 되기를 희망하며...                         


1. 기본소득? 그게 뭔데?     

국가나 정치공동체가 그 구성원에게 조건 없이 지급하는 일정한 생활비를 말한다. 기본소득을 규정하는 원칙은 다음 다섯 가지이다. △모든 개인에게, △어떠한 자격심사 없이, △어떠한 조건이나 의무를 달지 않고, △정기적으로, △현금 형태로 지급한다.                


2. 그게 말이 돼? 그 세금 다 어떻게 할 건데?     

어느 나라나 세원은 부족하지 않다. 분배의 문제다. 다만, 처음에는 적은 금액으로 시작하더라도 기본소득의 액수를 점차 높여가는 과정에서는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정책이 필요할 것이다. 그 해법 중 하나로 '소수가 사유하고 있는 자연재산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는 제도'를 소개한다. 석유자원으로 먹고사는 알래스카는 이미 '알래스카 영구 기금 배당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고 한다. 석유자원이 공동체의 자산이므로 채굴권을 기업에 '대여'하고 그 수입을 기금으로 적립해 주민들에게 현금으로 지급하고 있는데, 1982년 첫 지급을 시작한 이래 매 년 1인당 1천 달러 이상을 지급하고 있으며 2015년에는 1인당 2천 달러가 지급됐다고 한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석유 채굴 대여 기금으로만 2015년 기준 1인당 약 200만 원이 지급된 셈이다. 저자는 이러한 제도의 근거가 되는 오랜 역사를 지닌 이론으로 18세기 미국의 정치사상가 토마스 페인의 '공유자원에서 나오는 이익은 공동체의 모든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라는 논문을 함께 소개하고 있다. 

               

(나는 생수를 사 마실 때 가끔씩 궁금했다. 땅 밑에 고이는 물을 생수회사가 퍼서 팔아도 된다고 누가 허락한 거지? 지하수의 소유권이 애초 누구에게 있는 거야? 꼭대기에서 물을 다 퍼올리니 아래쪽 농지가 가물잖아! 공동 자산인데 생수회사가 독점적 권리를 갖는다는 게 어불성설 아닌가? 공기청정기 광고를 볼 때도 그렇다. 저걸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환경오염물질이 나올 것이며 저걸 폐기할 때는 또 얼마나 많은 환경파괴가 있을 거야. 그 비용을 기업에 제대로 물리고 있나? 무려 18세기에 나온 토마스 페인의 논문을 보고 나의 의문이 정당하다는 위로를 받았다.)             


3. 그럼 일은 누가 해?     

인공지능이 일의 상당 부분을 맡게 될 수밖에 없다. 이제 '노동윤리'는 생명을 다했다고 보는 게 맞다. 다만, 기본소득제가 도입된다 해도 임금노동을 전혀 안 해도 될 정도의 금액이 지급되는 것은 아닐 것이므로 여전히 소득 원천으로서의 일자리는 의미를 가질 것이다. 다만, 인공지능이 차지하고 남은 일자리는 힘들고 위험한 일일 확률이 높다. 앞으로는 그런 일들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식으로 변화가 필요하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TV 프로그램 '비정상회담' 출연자들이 기본소득에 대해 나눴던 대화 일부를 소개한다. 

    

자히드(파키스탄): 정부가 돈을 나눠주는 것보다는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오헬리엉(프랑스): 자히드 말은 과거에는 옳았지만 앞으로는 옳지 않아요. 프랑스는 이미 지하철이 전부 무인으로 바뀌었어요. 인공지능이 일자리도 대체하게 돼요.               


4. 그럼 전 국민이 게을러지는 거 아냐?     

기본소득제에 대한 설문을 해 보면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나는 게으르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20% 정도가 '그렇다'라고 답한 반면,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다른 사람들이 게을러질 것으로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는 80%가 '그렇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기본소득이 사람들을 나태하게 만들 거라는 생각은 나에게 관대하고 타인에게 엄격한 데서 오는 착각일 수 있다. 더구나 1970년 전후로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실험한 기본소득 지급의 결과를 보면 게을러지는 경우는 찾기 어려웠고, 여유시간을 배움, 봉사활동, 공동체돌봄, 협업 등에 사용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울컥했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5. 기본소득 지급하면 막 인플레이션 오는 거 아니야?     

기본소득은 돈을 새로 찍어내서 지급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재원을 재분배하는 것이다. 이미 많은 나라에서 시행하고 있거나 시행을 준비 중인데 잘 알려지지 않아 모르는 것뿐이다. 핀란드,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캐나다, 미국, 인도 등의 국가에서 지자체 차원의 기본소득제도가 시행 중이고 고용지표, 정신건강지표, 부채상환율 등이 크게 오르는 등 성공적인 결과가 보고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2023년 현재 경기도와 충청남도 지자체에서 '농민기본소득제도'를 시행 중이다.    

         

6. 스위스 국민투표에서 국민들도 반대했다는데?     

스위스에서 실시한 국민투표는 기본소득제 도입에 대한 찬반을 묻는 것이 아니라, 스위스 헌법에 기본소득 보장을 명문화할 것인지를 묻는 투표였다. 더욱이 스위스는 이러한 국민투표를 1년에 몇 번씩 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앞으로 언제든 다시 투표에 부칠 수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국민투표 결과는 23%만이 찬성하면서 부결되었다. 그러나 스위스의 기본소득 활동가들은 투표 결과를 긍정적으로 봤다. 왜냐하면, 투표 이전의 여론조사를 보면 9~10%만이 찬성 의견이었는데 국민투표로 다양한 캠페인이 진행되고 사회적 이해가 높아지자 단기간에 찬성이 23%까지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18세~29세 젊은 층의 찬성률은 36%로 더 높았고, 반대표를 던진 사람의 67%, 찬성표를 던진 사람의 87%는 이 논의를 계속해야 한다는 데 찬성했다. 또한, 약 44%의 국민들은 헌법 명시는 이르지만 지자체 차원에서 실험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즉, 스위스 국민들은 기본소득을 헌법으로 보장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나 지속적인 논의와 실험이 필요하다고 본다는 결론이다.     

 

글의 마무리는 무려 헌법으로 기본소득을 보장할지를 물었던 스위스 국민투표 당시, 기본소득 활동가들이 광장 바닥에 펼쳤던 대형 현수막에 쓰인 글귀로 대신하고자 한다. 돈 버느라 정신없어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에 대한 질문이다.               

"What would you do if your income were taken care of?"     

"소득이 보장된다면 당신을 무엇을 하고 싶은가요?"



pixabay로부터 입수된 QYang님의 이미지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