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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둘셋 Jul 01. 2024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 다시 길을 나서야만 한다

  정신분석에 흥미를 가졌던 적이 있다. 과거 어느 순간의 경험이 지금의 나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설명한 가설들이 그럴듯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책 몇 권을 읽고 나니 ‘유아기’, ‘결핍’, ‘트라우마’, ‘애착 관계’ 같은 몇 개의 키워드로 세상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게 무슨 수학 공식도 아니고, 기억도 가물가물한 수십 년 전 유아기의 결핍이나 애착관계를 따져 지금의 나를 설명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  마음속의 아홉 살 소녀에게 “괜찮아, 그때를 잘 견딘 네가 자랑스러워”라는 위로를 보낸다고 없던 용기가 솟아난다는 것도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이런 종류의 의심이 있을 것을 예견했는지 보는 책마다 ‘정신분석을 통한 치유는 몇 번으로는 안 된다. 길게는 10년 이상 걸릴 수도 있’다는 설명이 빠지지 않았다. 가만히 뜯어보면 ‘믿거나 말거나’에 다름 아니었다.     


  이러한 의문은 거부감으로 변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정신분석이 교묘하게 또는 은연중에 '정상성'의 범위를 좁혀 버리는 것 같아서였다. 결핍과 불안이 없는 삶이 건강한 삶이라는 왜곡을 만드는 것으로 보이는 거다. 

  예컨대 부모님 중 어느 한 분이 안 계셔도,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어도, 부모님이 맞벌이여도, 심지어 전업주부인 엄마라도 그 엄마에게 유년기 상처가 있다고 한다면 아이는 무조건 애착형성 과정에 문제가 있는 존재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결론이 내려지는 식이다. 이런 식이면 누가 정상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과장하는 것이 아니다. 군대의 배려병사 기준표의 일부가 공개됐을 때 한부모가정 자녀나 기초생활수급 가전 자녀는 무조건 배려병사로 분류되고 있었다. 이러한 기준은 누가 만들었겠나. 국방부가 정신분석 내지 심리분석 전문가들에게 의뢰해 만든 것일 터다. 이처럼 정신분석은 그 의도가 어떻든 결과적으로 다수를 비정상으로 모는 것 같아서 정신분석에 대한 거부감은 더욱 커졌다. 

  ‘정상성’의 범위를 좁히는데 또 한몫을 하는 것이 감정표현에 대한 강박적인 시선이다. 불안장애, 분노조절장애, 반항장애, 품행장애 등등 감정표현 한번 잘못했다가는 순식간에 비정상으로 몰릴 판이다. 심지어 기쁨도 적당히 드러내지 않으면 ‘조증’이라는 병이 되기 십상이다. 정신분석이 인간이 자연스럽게 겪는 희로애락을 전부 병증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 비해 훨씬 협소해진 ‘정상성’의 범주 안에 들기 위해 가면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하기사, 가면을 쓴 모습도 자칫 ‘인격장애’로 몰릴 수 있으니 그 마저도 조심해야 할 일일지 모르겠다. 

  결핍과 불안, 희로애락은 인간이 성장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이다. 어찌 보면 이들은 평생의 친구 같은 것이다. 폭풍 같은 불안과 희로애락을 겪으며 어른이 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품고 가야 할 무엇인 것이다. 그 속에서 어떻게 나를 키워낼 것인지 끝없이 고민하는 것이 우리가 진짜로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정신분석 내지 심리분석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그러고도 한참 후에 만난 책이 고미숙의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였다. 사실 이 책은 정신분석과는 전혀 상관없는 책이지만 그간 내가 품었던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지점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저자는 ‘어린 시절의 애정결핍과 그로 인한 상처로 현재의 내 삶이 우울하다는 논리는 상당히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가짜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인간은 본래 현재를 살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었더라도, 지금을 사는 순간 그것은 이미 과거가 된다는 것이다. 현재를 살면서 또 다른 원수를 만나기도 하고 은인을 만나기도 하면서 과거는 과거가 되는 것이 삶의 마땅한 이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과거를 어느 한 방식으로 계속해서 곱씹는 것이 사실은 무척이나 부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사람들은 과거 어느 시점의 상처를 부각해 자신을 이해한다는 명목으로 대서사를 만들어 내고는 하는데,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그 장엄한 서사에 정작 나 자신은 철저히 사라져 있다며 유년기의 결핍이나 상처로 현재를 이해하는 방식의 한계를 지적한다. 대서사를 듣다 보면, 모두가 주체적으로 움직일 때 나는 아무 한 것 없이 상처받은 피해자로 덩그러니 있더라는 것이다. 저자는 ‘상처라는 담론 안에는 자신에 대한 관찰이 놀라울 만큼 빠져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소개한다. 나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오이디푸스가 예언대로 결국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것이 끝인 줄 알았다. 한데 그게 아니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자기 눈을 찌르고 궁을 나선다’. 저자는 이것을 ‘더 이상 이전의 방식대로 세상을 보지 않겠다는 실존적 결단’의 의미라고 정의한다. 결국,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것은 예언이 들어맞은 것이 아니라 버림받은 것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가 계속해서 그 시점에 머문 결과라고 진단한다. 그러한 삶의 태도가 지금의 상황을 만든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신화의 절정은 이 부분인 것 같다! "오이디푸스는 눈을 찌르고 궁을 나서 길을 떠난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눈을 찌르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럴 때에만 비로소 내가 나답게 살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시 길을 떠나는 것이다. 낯선 삶을 향하여, 새로운 길을 열기 위하여. 그것만이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천지만물과 부모에 대한 유일한 보답이다.” 


  지금 이 순간을 최선을 다 해 잘 살아내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겠다.


  *정신의학에 관한 허상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해 주는 책은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다. 혼자 오랫동안 의문을 품었던 내용이 <광기의 역사>에 너무나 잘 지적돼 있어서 큰 위안을 얻었다. <광기의 역사>에 대해서도 언젠가 브런치에 글을 쓸 수 있기를.


Pixabay로부터 입수된 LOBS Arts님의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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