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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리오페 Nov 17. 2023

길 위의 길

"비범한 삶은 없다"

산티아고 가는 길의 종착점이 하루하루 가까워지고 있다. 날은 저물었다. 잠잘 곳을 찾아야 한다. 피곤에 지친 나그네들이 ’알베르게’ 도미토리에서 고단한 하루를 누인다. 침대 위에 배낭 짐을 풀고 마당으로 나가면 와인 파티가 열리고 있다. 낯선 곳에서 만나는 낯선 얼굴들이지만 금세 친구가 된다. 한쪽 테이블에는 8명이나 되는 펠레그리노(순례자)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저는 덴마크에서 왔습니다. 

저는 프랑스, 저는 스웨덴, 

독일, 리투아니아, 체코, 잉글랜드, 일본..”     


남녀노소, 국적도 다양하다. 저녁은 직접 해 먹을 수도 있고 옆에 딸린 식당에서 사 먹을 수도 있다. 시골 마을의 작은 레스토랑에서 스페인 토속 음식과 와인을 저렴하게,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것도 까미노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잠자리는 불편하다. 2층으로 된 벙크 침대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그래도 무거운 짐 내려놓고, 힘겨운 걸음도 쉬게 할수 있다. 모두들, 몸에는 강행군의 상흔이 남아 있다. 옆자리의 지아니는 이탈리아에서 왔다. 고통스런 표정으로 침대에 걸쳐 앉아 발바닥에 잡힌 물집을 터트리고 약을 바르고 있다. 오직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먼 길을 견딘단다.     


“어제는 33킬로, 오늘은 29킬로 걸었고 내일은 23킬로 걸을 예정이에요. 각자 나름대로 목표가 있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약속한 것이 있어요.”     


물집은 살갗에 극심한 마찰로 인해 생기지만 피부 내부를 보호하려는 생명의 보호막이다. 죽은 세포를 부풀려 떨어져 나가게 하고 새살을 돋게 한다. 우리 인생에도 새살을 돋게 할 수 있을까?           


나 자신과의 대화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걷는 데는 슬기로운 원칙이 있다. 무엇보다 모국어로 대화하지 않는 게 좋다. 안타깝지만 한국인을 되도록 만나지 않는 게 좋다는 얘기다. 외롭고 심심하지만 나 자신과 대화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오롯이 나의 영혼을 마주하는 길이다. 집을 떠나와 길 위에서 마음의 자유를 얻어야 한다.      


“나는 길 위의 모든 것과 대화하기 시작했다. 나무 그루터기, 물웅덩이, 낙엽, 그리고 근사한 덩굴 식물과도.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훈련이었다. 어릴 적에 배웠지만 어른이 되어 잊어버리고만. 그런데 신비하게도 사물들이 나에게 응답하고 있었다” <순례자 중에서>     


엊그제 아침, 알베르게 식당에서 만났던 프랑스 여성, 이사벨을 오늘 아침엔 여기서 또 마주쳤다. 직장에 다니다가 모든 걸 훌훌 던져버리고 온 이사벨은 이 길을 걸으면서 마음을 비우고 버리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여기서는 휴대전화가 없고 SNS도, 이메일을 확인할 필요도 없어요. 버스나 기차로 빨리 갈수도 없지요, 혼자입니다. 저는 혼자 있는 것입니다.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매우 적다는 것을 느꼈지요."     


맞다. 그동안 무얼 그리 집착하고, 무얼 가지려고 애썼는지, 갖은 욕심에 매달렸던 분주한 일상은 이제 성찰의 시간으로 채워진다.     


"사실 내 삶에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어요. 이 길을 걸으면서 제 길을 찾았지요. 앞으로 갈수 있는 길을 찾았습니다."     


토스트를 구워 아침 식사를 하고 다시 신발 끈을 조인다. 아침이면 날마다 길은 새롭게 시작된다. 하루 20, 30킬로미터씩 걷는 고난의 여정은 한달이 넘게 계속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곳에서 와서 다른 생각을 하며 길을 걷는다. 하지만 모두에게 똑같이 고행의 길이며 새로운 깨달음의 길이다. 이 험난한 여정 속에 걸음을 떼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도 늘어간다.     


나의 여정은 끝나간다. 몬테 델 고소(Monte del Gozo)에 왔다. ’기쁨의 언덕’이라는 이름처럼 멀리 산티아고 시내가 손에 잡힐 듯 눈에 들어온다. 커다란 석상으로 서 있는 옛 성자들이 손짓을 하며 먼 길 온 사람들을 반긴다. 그리고 다시 한 시간 만에, 마침내 여행의 종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Santiago de Compostela)에 닿는다.      


한 달이 넘는 여정을 마친 사람들이 성당앞 광장에 몰려든다. 몸은 지치고 힘들지만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기쁨과 감격에 겨워 서로를 포옹한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감싼 채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보인다. 코엘류의 말대로, 결국 순례길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길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자연과 선한 사람들, 그들은 무엇을 위해, 무엇을 찾아 길을 떠났을까. 저마다 길을 걸으며 무엇을 얻었을까,      


“비범한 삶은 언제나 평범한 사람들의 길 위에 있습니다” 

<순례자 중에서>     


특별한 길은 애초에 없다. 누구나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만 애초에 특별한 사람은 없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수없이 만나는 ‘스스로 특별한’ 사람들은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함’에도 미치지 못했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느 순간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면 특별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긴 여정의 끝에 도착한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이 길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길의 시작임을...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는 곳에 가야할 순간을 거스리지 못하고 결국 제때에 그곳에 이르게 된다”

 <순례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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