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ichmann in Jerusalem : 악의 평범성에 대하여
나는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Ich bin Adolf Eichmann.)
당당한 이 남성은 차가운 바다에 흩뿌려진 채 아직도 1962년에 머물러 있다. 인과응보因果應報, 악인을 향한 이 격언은 생전 그가 벌인 인류에 대한 도전을 적극적으로 맞받아친 결과이기도 하다. 한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1960년, 이스라엘에서 벌어진 희대의 재판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모습을 보였다.
유대인 출신이기도 한 그녀가 유대인들을 학살한 아이히만을 보았을 때의 그 감정이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피고는 일말의 죄의식을 내비치지 않은 채 꿋꿋하게 항변한 것이 아니던가. 무엇이 그를 저렇게 만들었을까, 아렌트는 이것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 명명하며 이 저서를 세상에 선보였다.
아렌트的 실존과 탄생
아렌트는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에게 실존주의를 배운 인물이다. 이에 인간의 실존과 그 탄생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아렌트에게 있어 인간의 탄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생물적 탄생이다. 다른 해석의 여지가 필요 없는 이 탄생은 말 그대로 인간이 세상 밖으로 나온 그 순간이자 자체를 의미한다. 시초始初가 있어야 실존이 가능하기에 생물의 탄생은 실존의 첫걸음이겠다. 그다음이 중요한데, 바로 사회적 탄생이다. 이것은 인간이 태어난 이후부터 작동되는 기제이며 사회적 작용을 통한 인간의 의미와 가치의 창출을 의미한다. 즉 개인은 사회 또는 환경과의 공존을 통해 자아를 이해해 나간다. 동시에 아렌트는 그 공존 수단으로써 언어와 언어에 기반한 사고체계를 강조한 바 있다.
따라서 타인과의 언어적 유리遊離는 타인을 공감하지 못하는 사고思考의 부재를 낳아 ’ 태어났으나 실존하지 못한 인간‘의 등장을 촉발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악의 평범성‘을 대하는 아렌트의 기본 아이디어인 셈이다.
나는 괴물이 아니다.
재판에 선 아이히만은 연거푸 자신의 행위를 ’명령‘에 의한 것임을 고백한다. 급기야 그는 칸트의 정언명령定言命令을 안다며, 명령은 절대적이며 의무이기에 자신의 유대인 이송과 그 행위가 유대인 학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강변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 그 명령의 주체자가 나치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였던 것을 그는 알지 못했을까? 아니, 그는 명확히 명령의 주체를 인지했다. 심지어 아이히만은 1942년 열린 반제회의(Wanseekonferenz)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최종해결책(Endlösung)‘이 승인되자, 나치의 고위 간부들도 이 방안에 찬성하는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정도였다.
더 이상 유대인 학살에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었던 아이히만이었다. 오히려 자신의 행위는 국가와 총통에 의해 ’승인된‘ 결과였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의 발언은 결코 가볍지 않았으며 신념에 가득 찬 것이었다.
사고의 결여(Unthinkingness)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아렌트는 그가 지속적으로 언어적 속임수를 쓰고 있다고 봤다. 예컨대 유대인 학살을 ’최종해결책‘이라 부른 것은 유대인에 대한 절멸을 기획한 사실과 일련의 과정 그리고 실제 행위를 에둘러 표현해 유대인 학살의 진상을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의도적인 언어 사용이었다.
실제 나치의 슈츠슈타펠(Schutzstaffel)의 간부들은 이 유대인 학살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직접적인 언어 사용을 금기시했는데, 이것은 언어에 기반한 공존적 사고에서 멀어지는 결정적 순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사고를 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의 행동은 거침이 없다. 무국적자가 된 유대인들이 머나먼 타국으로 이송되는 것을 보며 아이히만은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그의 과거 행적을 고려한다면, “나는 유대인 이송과 그들의 심정心情에 대해서는 전문가이며, 이 명령은 나의 전문성을 잘 반영한 결과이다.”라 말하지 않았을까. 유대인은 그저 아이히만의 승진과 성과의 전유물이었다.
인류의 정의正義를 위해
이 세기의 재판은 아이히만에게 사형을 선고하며 종결되었다. 적잖은 파장을 일으킨 이 재판의 현장에서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란 철학적 화두를 내세우며 20세기의 가장 잔혹한 역사적 사건에 질문을 던졌다. “과연 악이란 무엇인가? 그 기원은 무엇인가?”, 아이히만과 같은 평범한 인물도 악인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하자?
글쎄, 그러면 우리는 모두 아이히만인가? 그 당시 제3제국에서는 전체주의적 물결이 전국을 휩쓸었다. 독일인들은 혐오와 배척에 사로잡힌 이들로 만연한 환경에서 ’탄생‘한 것이다. 생물적·사회적 탄생을 모두 그 시절의 독일에서 마주한 이들은 사고할 틈이 없었던 걸까. 그럼 이들에게 면죄부를 던져주어야 할 것인가, 그저 그런 사회에서 태어났고 모두 그렇게 하고 있었으니 유대인들의 죽음을 그저 안타까워하면 그만일까.
아렌트는 이 지점을 두고 ’사고의 결여 또는 무사고無思考‘ 자체가 악이라 정의하며 아이히만과 독일인들에게 책임을 요구한 것이다. 그래서 아렌트는 단순 전범戰犯의 차원을 넘어, 인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자 상처받은 인류의 정의를 구현하는 상징적 순간으로써 아이히만의 사형에 찬성한다.
다른 민족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하지 않는 정책을 피고가 지지하고 수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즉 인류 구성원 가운데 어느 누구도 피고와 이 세계를 공유하기를 바란다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교수형에 처해져야 하는 이유, 유일한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