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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들 Oct 08. 2024

외롭네,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말이야.

우산에 대하여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불가마 같은 날씨가 종적을 감추었다.  스산한 바람이 닭살을 돋게 하고 건조함 버튼을 누른다. '쓸쓸하다'라는 단어의 유래가 '쌀쌀하다'라는 말에서 왔다는 썰이 있다고 한다. 기온과 습도의 변화가 감정에도 영향을 미치나보다. 난 그 클리셰에 해당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추녀' 대열에 합류하고야 말았다. 별안간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리더니 가을바람이 숭숭 넘나 든다.

당분간 내 이름에 앞에 '작가'라는 명사를 붙일 수 있도록 거기에만 집중하겠다 다짐했고, 자신 있었다. 다른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혼자서 당당하게 설 수 있도록 경제적, 정서적으로 독립하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하지만 계절이 떠먹여 준 싱숭생숭함은 이성적으로 조절할 수가 없다. 반팔을 입고 자다가 연이은 재채기에 휴지로 코를 풀고 긴 잠옷을 꺼내 입는 내 모습처럼 마음이 부산스럽다.


집에서는 집중이 되지 않아 집 근처 도서관에 갔다. '총 맞은 것처럼' '구멍 난 가슴'도 데리고 갔다. 아들과 아빠가 한 테이블에서 함께 책을 읽고 문제집을 푸는 모습이 다정해 보였다. 가슴 구멍에 바람이 또 불었다. 담요에 파묻힌 신생아가 있었다. 도서관과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울지도 않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바라만 봐도 마음이 깨끗해졌다. 하, 그때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나한테 콩깍지 였던 아무개가 있었는데 말이야. 아무것도 모를 때 결혼하고 애도 낳고 할 걸 그랬나? 그리고 지지고 볶는 게 맞는 건가?


몸도 마음도 이기적이고 나약하기 그지없는 나에게 '깊은 관계 맺기'는 사치라고 판단했다. 깊은 관계의 끝판왕인 '결혼'은 내게 어불성설이었다. 내 한 몸도 걸리적거리고 감당하기 힘든데 누가 누구를 책임진다는 거야. 이미 나이가 결혼 적령기에 차고 넘쳤지만, 날 바로 세우기 전에 내 삶에 타인을 깊이 끌어들이는 게 꺼려졌다. 가까워지며 각자의 심연에 있는 진흙탕을 보여주고 실망하는 것도 지쳤다. 특히, 내 것을 보여주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그러니까, 이걸 간단하게 말하면 '자존감이 낮다'겠지.


다른 사람에게 기대하고 실망하는 기분, 버림받는 것 같아서 정말 싫어.

차라리 처음부터 혼자 있는 게 낫잖아. 기대도 희망도 없이 말이야.


그런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질문을 또 반복한다.


이렇게 스스로 고립시키는 게 맞는 건가?

내가 정해놓은 기준에 맞게 스스로 선다는 게 가능한가?

나는 정말 혼자 다 할 수 있나?

언제까지 세상과 거리를 둔 채 살 건가?  


비가 온다. 도서관 창밖 벤치에 빗방울이 떨어져 동심원을 그린다. 우산 없는데... 비 오는 날, 우산을 가지고 데리러 와 줄 사람이 없다는 건 참 씁쓸한 일이구나. 집까지 가는 버스도 마땅치 않고 걸어가면 30분 넘게 걸린다. 비가 그치면 걸어가려고 날씨 앱을 봤더니, 저녁 7시는 되어서야 그친단다. 주말이라 6시에 도서관 문을 닫는데  곤란하다.


'아빠에게 연락하기 싫어. 혼자 비 안 맞고 갈 방법이 없을까?' 무의식적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지 않으려는, 그리고 다른 사람도 나에게 기대하지 않았으면 하는 알고리즘이 자동적으로 작동했다. 하지만, 6시가 다 되어가도 내리는 비에 하는 수없이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비와 함께 떨어졌다.


-딸깍

"아부지."

-어, 아빠 여기 와있다.

"와 있다고요?"

-어, 여기 예전에 우리 왔던 건물에 와있다.


마음속에 뜨끈한 빗물이 밀려온다. 그간 불편하고 어색했던 부모님에 대한 마음이 사그라든다. 연락도 안 했는데 미리 나와 계시네. 게다가 생색도 내지 않으시네. 무뚝뚝하지만 우직한 우리 아부지. 신기하다. 그 순간 타인, 세상과 연결되는 싶은 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래, 이제 혼자 있기 싫어. 혼자서 다 잘 해내려고 하는 건 지쳤어. 비가 오면 우산을 가지고 데리러 와줄 사람, 비가 오면 내가 데리러 가야 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걸 인정하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마음속에 조그만 창문이 하나 열렸다. 안 보는 척, 빼꼼 밖을 내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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