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 학교공간 개선
공간은 단순히 머무는 장소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생각입니다. 멋진 공간은 기능상의 편리함은 물론이고, 정신적 가치로서의 자유와 행복감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북한산에 있는 포인트빌 카페에 자주 가는데, 석양 무렵에 아름다운 정원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북한산 봉우리를 바라보면 뭉클한 감동으로 마냥 행복합니다. 나라가 발전하면서 멋진 공간이 많아져 정신적으로도 많이 여유롭고 풍요로워졌다는 느낌입니다.
최근 여러 해에 걸쳐 학교 예산에 여유가 생겨, 학교시설 측면에서 많은 개선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학교장이 조금만 관심과 의욕이 있다면, 학교 시설 개선 예산을 확보하기가 어렵지 않은 시절입니다. 제 학교장 임기가 이런 상황과 맞물려 마음껏 학교 시설 구축 및 개선 사업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첫 학교 4년 임기를 마치며 생각해 보니, 어마어마한 예산들 들여 여러 학교 시설 구축 및 개선 사업을 벌였더군요. 이제 두 학교에서 추진했던 「학교공간 개선」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첫 학교는 ‘日’자 구조의 건물이었는데, 중앙통로에 교무실이 있고 그 밖으로는 약간 버려진 느낌의 실내정원이 있었습니다. 이런 공간 활용을 위해 ‘실내외 통합 학습공간’이란 이름으로 교육청 공모사업을 지원하였더니 당선되었습니다(짐작하시겠지만, 제가 지원서를 직접 작성했습니다. 제가 예술적 감각이 있나 봐요! 제 정신상태가 좀 걱정스럽지요?). 예산 확정 후 교직원들에게 사업 추진 관련 의견을 내달라 부탁했지만, 그걸 누가 내겠습니까? 다들 바쁜데. 바야흐로 물 만난 고기처럼 저의 생각을 펼칠 기회가 온 것이지요! 얏...호! 이 맛에 학교장을 합니다! 기본구상으로 몇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하나, 통로에 있는 사무실에 스터디 카페를 만들어 학생들이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한다. 둘, 앞쪽 야외정원은 햇빛을 받으며 토론이나 독서를 하는 공간으로 구축한다. 셋, 뒤쪽 야외정원은 햇빛을 받으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약간은 은밀한 공간으로 구축한다. 넷, 건축 관련 진로 희망 학생의 경력을 관리해 준다. 그렇게 했냐고요? 당연하지요! 관련된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통합공간의 이름을 정하는 것을 학생과 교직원의 투표로 정하고자 했습니다. 상금으로 10만 원을 걸고요. 저도 현장(賢場)이란 이름으로 응모를 했습니다. 그림에서 보시는 것처럼 참패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야속해요! 교장의 제안에 지지를 보내줘도 좋으련만! 1등으로 뽑힌 까멜리아는 당시 인기드리마에 나오는 이름인데, 이 이름이 갖는 성적인 함의를 얘기하는 분이 있어 할 수 없이 2등인 휴담(休談)으로 정했습니다. 1등 제안한 분이 많이 서운해해서 상금은 그분께 드렸습니다. 나중에 제 제안인 현장(賢場)이 왜 선택되지 않았는가를 알아보니, ‘노가다’란 이미지가 떠올라 싫었다 하더군요. 사실, 저는 그런 이유로 이 이름을 선정하고 싶었었는데…. 또 이미 교사용 휴게공간 이름을 현담(賢談)으로 정하고 있어, 현담이란 이름의 대응으로서도 현장(賢場)이 더 타당한데… ㅠㅠㅠ...
건축 분야 진로 희망 학생을 대상으로 학생설계참여단을 구성하여 5시간의 활동을 한 후 아래와 같은 내용을 생기부에 기재해 주었습니다. 참여단 중에 그해 서울대 건축학과에 진학한 학생이 있어 다들 놀랐습니다. 재미있는 상황이 있더군요. 담임교사는 담임 지도를 잘하여, 동아리 지도교사는 동아리 지도를 잘하여, 하다못해 1학년 때 담임은 1학년 때 기초를 다지도록 하여 서울대에 진학했다 주장을 하더군요. 제 생각은 학생설계참여단 활동을 조직하고 활동 내역을 생기부에 기재한 것이 합격의 큰 이유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주장은 안 했습니다!). 글쎄… 건축학과 지원자 중에 이런 내용이 생기부에 기재된 학생이 있기 힘들겠지요.
오른쪽 사진은 휴담 실내 사진입니다. 사진에서 러닝머신이 특이하죠. 독서 또는 스터디를 하다 운동도 하라고 비치해 놓았습니다. 약간 부끄러운 에피소드도 소개합니다. 앞쪽 야외정원에 조그만 모래사장과 발을 씻을 수 있도록 수도꼭지를 설치했습니다. 엥? 웬 모래사장 이냐고요? 그게... 제가 시골에서 자랄 때, 개울가 모래톱에서 놀면서 발바닥을 간지럽히던 모래의 감촉을 학생들도 느껴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설치했지요. 그런데 제가 떠날 때까지 그 모래사장에서 맨발로 있는 학생을 한 명도 못 보았습니다.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제가 맨발로 모래사장에서 독서를 하는 모습을 연출했는데도, 아무도 따라 하지 않더군요. 에구구구… 쪽팔려! 저와 애들은 다른 세계 사람이란 사실을 깜박했습니다!
두 번째 학교에 부임하여 보니 도서관 개축 사업으로 수 억원이 책정되어 있더군요. 물 만난 고기 2탄이 된 거죠! 서가와 열람실 외에도 자습실을 확충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고기를 방해하는 흐름이 있더군요. 선생님들 의견을 수렴했는데, 자습실을 최소화 하자는 의견이 강했습니다. 학생들이 방과후에는 자습실에 남지 않고 학원이나 사설 스터디 카페를 간다는 이유로요. 이미 자기주도학습도전단(4화 참조) 운영 노하우가 있고, 중심 지역 학교에서도 성공할 수 있으며 필요한 사업이라 생각하여 이전보다 확대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진행시켰습니다. 결과가 어찌 되었냐고요? 당연히 성공적이지요! 저는 거의 학교의 마이다스의 손입니다(이 시리즈가 거의 끝나가니 제가 점점 이상해지고 있나요? ㅎㅎㅎ...)!
잘난 체 하나 더요! 학교 중앙정원에 해먹을 설치하고자 했습니다. 학생들이 점심시간이나 방과후에 해먹에 누워 독서를 하든가 멍때리며 쉬게 하고 싶어서요. 쫌 어색하지요? 주위의 반대에 부딪혀 일단 2개를 설치하는 것으로 타협을 했습니다. 저는 일단 설치하고 나면 학생들이 좋아하여 더 설치할 수밖에 없을 거란 예상을 하고요(물론 반대하는 분들은 사용자가 없어 학교장이 창피해 할 거라고 예상했겠지요.). 난리가 나더군요! 학생들이 쉬는 시간마다 서로 해먹에 누워보려고 정원에 뛰쳐 내려와서요. 두 달쯤 후에 2개를 추가로 설치했습니다. 짜식들! 처음부터 학교장 말을 듣지! ㅎㅎㅎ… 사진에 문구가 들어있는 것은 홈피 대문사진에 올리면서, 본교는 여유와 멋을 지향한다는 메시지를 알리기 위해 넣은 것입니다.
도서관 실훈을 ‘독서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로 정했습니다. 제가요! 왜 이런 실훈을 정했는가를 알릴 필요가 있어 아래와 같은 글을 인쇄하여 실훈 밑에 부착하고 학교를 떠났습니다. 대게 이런 실훈은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그냥 잊혀지고 아무도 유래를 모르는 경우가 많지요. 아직도 제가 붙인 안내글이 붙어있나 모르겠습니다. 본드로 붙일 걸 그랬나?
최근 교부금(정확한 용어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으로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현행법상 내국세의 20.79%를 지방교육청 예산으로 강제 배정하여 초중등교육에 사용됩니다. 이런 이유로 학교에 투입되는 예산이 넉넉한 것 같습니다. 제가 학교시설 개선 사업을 멋지게 해낸 것도 교육청 지원 예산이 큰 몫을 했습니다. 또한, 행정구청에서도 관내 학교에 대한 예산 지원을 확대하는 경우가 많아, 학교가 의욕만 있으면 시설과 프로그램 면에서 예산에 구애받지 않고 교육을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국가예산 규모가 커지고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이 교부금이 과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습니다. 물론 초중등교육 관계자로서는 여전히 해야 할 사업이 많아 현 제도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제 경험을 바탕으로 두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는, 학교에서 바라볼 때 교육예산이 다소 방만하게 운영되는 측면이 있지 않느냐는 염려입니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바는 알지만, 그래도 재정적 여유가 있으면 다소 불요불급하고 교육적 효과성이 떨어지는 사업도 하고 싶은 것이 학교 특히 저 같은 스타일의 학교장이 갖게되는 성향이 아닐까 합니다. 교육청 차원에서도 비슷한 측면이 있는 듯합니다. 개인적으로 전체 학생에게 스마트기기를 나누어 주는 것은 타당한 사업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필요한 학생에게만 나누어 주면 충분하지요. 둘은, 대학을 방문하여 살펴보면 시설 면에서 대학은 고등학교에 비해 너무 낙후되어 있더군요. 고등학교와 대학교 중 어느 곳이 더 중요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예산을 교육 영역 전체에 걸쳐 균형 있게 사용하고, 시급하게 사용해야 하는 분야에 예산을 투입하는 것이 예산의 대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혹시 마시던 우물에 침을 뱉는다고 생각하는 분이 없기를 바라며, 이제는 액터가 아닌 납세자로서의 입장임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