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순리대로

곶감용 감을 깎으며

by 작은거인



이른 아침, 이웃 마을로 감을 깎으러 간다.
벌써 여섯 해째 이어지는 늦가을의 일이다.
삼십여 분 달려 도착하니 하늘엔 물비누를 푼 듯 구름 거품이 몽글거리고, 산 능선 너머 햇살은 감나무 잎에 내려앉아 반짝인다.

이 집은 지난봄 산청 산불에 피해를 입은 농가다. 계곡 너머에서 시작된 불이 계곡을 타고 넘어와 감나무 밭을 덮치고 산자락까지 태웠다. 다행히 나무들은 여름 내내 다시 푸른 잎을 틔웠지만, 감은 예년만큼 달리지 않았다.

수확량이 줄어 마음이 상할 법도 한데, 부부는 “농사는 욕심대로 되는 게 아니니
자연이 주는 만큼만 받으면 되지.” 하며 웃는다.


주인 부부와 나, 셋이서 말랭이용 감부터 깎기 시작했다. 기계는 씽씽씽 돌며 맨도롱 하게 깎인 감을 쉼 없이 쏟아낸다.
그 감을 반으로 가르고 하얀 속심지를 파낸다. 저장고에서 꺼낸 감이라 면장갑 위에 위생장갑을 껴도 손끝이 시리다.
그러나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그 시림도 어느새 녹아내린다.
작년까지만 해도 사흘 걸리던 일을 올해는 하루 만에 마쳤다.
날이 더우면 마르는 과정에서 홍시가 되고 초로 변질되기에 곶감용 감은 천천히 깎기로 했다. 설 대목까지는 시간의 여유가 있기에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곶감의 맛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쌍둥이 과자 맛이 아니다.
낮에는 햇살에 녹고 밤에는 찬바람 속에서 얼며 숙성되는, 자연이 만들어내는 맛이다.
손으로만 깎을 수 있는 시간, 바람과 온도에 맡겨야 하는 기다림, 그 느린 순환이 곶감의 맛을 만든다.
자연의 순리에 따를 때만 얻을 수 있는 달콤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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