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호모 모탈리스, 인간은 죽는다

by 이강혁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 파괴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지속적인 확신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 프란츠 카프카




살아있는 모든 것이 그렇듯 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죽음을 아는 존재는 인간 밖에 없으며, 그 인식이 죽음의 공포를 일으키고, 또 그 공포가 인간 행위의 핵심적 원인이 된다—이 책은 죽음에 대한 이러한 이해와 관점을 바탕에 둔다. 문화인류학자 어네스트 베커(Ernest Becker)는 자신의 책 <죽음의 부정(Denial of Death)> 서문에서 선언하듯 죽음을 정의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 즉 죽음에 대한 두려움만큼 인간이라는 동물을 더 사로잡는 것은 없다. 그 두려움은 인간행위의 주된 원인이며, 그 행위는 죽음의 불가피성을 피해보려는, 즉 죽음이 인간의 최종적 운명이라는 사실을 어떻게든 부인함으로써 죽음을 극복해 보려는 기도(企圖)에 다름 아니다.[1]

베커는 죽음의 공포가 보편적 인간조건이며, 그 공포가 인간의 심리적 구조체가 담고 있는 핵심적 내용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이 공포를 없애 죽음을 극복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한다—베커는 그것을 ‘불멸 프로젝트(Immortality Project)’라고 불렀다. 베커에게는 인간의 삶 자체가 불멸 프로젝트이며,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이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남는다.


아래에 있는 두 장의 낡은 사진은 ‘사후(死後, Post Mortem) 사진’으로 불리는 것이다. 이미 죽은 사람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가족의 요청이나 사진사의 제안으로 연출한 것이라 짐작되지만, 의자에 앉아 얼굴에 팔을 괴고 사색에 잠긴 듯한 정장차림의 남성, 드레스를 입고 잠자듯 누워있는 여인의 사진이 표현하려는 것은 망자의 살아있는 듯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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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도 마찬가지다. 사진 속의 아기 역시 잠자는 것이 아니다. 죽은 아기가 잠자고 있다는 듯 어미가 안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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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사후사진들은 개발자의 이름을 따라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으로 불리는 은판 사진술로 촬영한 것이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개발된 이 사진촬영 방식은, 새로운 기술에 의해 태어나는 제품이나 서비스가 으레 그렇듯 비쌌다. 그래서 사후사진은 망자와 그 집안의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역할도 했다. 그러나 서민의 경우는 달랐다. 그들에게 사후사진은 가족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진이었다. 인간의 기억을 ‘확장’시키는 당시의 신기술이 즐거운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서민은 지갑을 털어 차마 떠나보낼 수 없는 가족의 모습을 기록하여 영원히, 아니 자신이 죽기 전까지 만이라도 기억 속에 담아두려 했을 것이다. 짐작대로 사람들은 이 사진을 집안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기도 했다고 한다.


신기술이 가져다준 새로운 애도 방식으로만 여겨도 되겠지만, 사후사진은 복잡한 감정을 일으킨다. 기괴한 느낌도 들지만, 사후사진이 불러일으키는 일차적인 감정은 슬픔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다—모든 죽음이 그렇다. 한편 이 사진은, 무력하긴 하지만, 죽음에 대한 저항을 나타낸다고 할 수도 있을까? 사진이 현실일 수 있다면 아기는 여전히 죽지 않고 포근한 엄마의 품에서 잠자고 있는 것일 테다. 유아 사망률(infant mortality)이 높았던 시대였음을 감안하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엄마들이 아기의 죽음으로 상상하기 힘든 심리적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엄마는 아기를 떠나보낼 수 없다. 그래서 현실이 아님을 알지만, 그리고 그 허망함을 모를 리 없지만 그렇게 사진을 찍고, 그래서 또 더 슬프지만 그것이 우리 인간의 한 모습임을 본다. 인간은 죽음이 삶의 끝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존재다. 죽음은 받아들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데, 인간은 그걸 인정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아마도 자연계의 유일한 종(種)이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그러나 그 불가피성이 또렷이 인식되는 죽음은 인간만의 것이다.


오랜 인간진화의 과정에서 일어난 일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우리가 언제부터, 어떻게 자의식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자의식을 가진 이상 인간의 죽음은 식물이나 동물의 죽음과 같을 수는 없어졌고, 불행하게도 이것이 인간만이 가지는 불안과 고통(어쩌면 모든 불안과 고통)의 근원이 되었다. 없는 것도 생각해 내는 추상적 사고가 가능해진 인간은 종교적 영생, 이데올로기의 영원성 같은 것에 기대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도 했지만, 역사는 그런 시도가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증언한다. 해결은커녕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하는 극심한 부작용을 낳았다—그런 생각을 믿고 무도하게 행동했던 사람들에게는 심리적 해결책이 됐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목격한 것은 지하세계가 아니라 땅 위에 펼쳐진 지옥이었다. 죽음을 피하려는 시도가 죽음을 부르게 되는 역설을 역사는 말해 준다. 죽음이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라는 인식 자체가 비판받을 수도 있지만, 문제로 받아들여도 우리에게 해결책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네스트 베커는 죽음의 절망적 성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동물들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즉 맥동(脈動)이 없는 세계에 산다. 이것이 물소나 코끼리 무리를 향해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총질을 해댈 수 있는 이유이다. 동물들은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다른 동물들이 옆에서 쓰러져 나가는 동안에도 한가로이 계속 풀을 뜯는다. 죽음을 안다는 것은 사색적이고 개념적인 것이며, 동물은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동물들은 그냥 살아가다가 여전히 어떤 생각도 가지지 못한 채 사라질 따름이다— 몇 분간의 공포, 몇 초간의 고통,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다. 그러나 평생을 우리의 꿈속에, 그리고 햇빛 가득한 찬란한 날까지도 악귀처럼 출몰하는 죽음의 운명과 함께 살아야 한다면, 그건 전혀 다른 문제다.[2]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은 공포다.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다. 내 몸이 죽으면 그 안에 있던 나의 기억과 의식도 없어진다. ‘나’를 읽어버린 몸은 물질로만 잠시 더 머물겠지만, 결국 부패의 과정 속에서 주위와의 경계도 흐릿해질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권유받지만 우리의 마음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삶은 한 권의 책이고 죽음은 그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것이다, 죽음이 없다면 삶은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 현명한 삶을 살았다면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이런 생각과 말들에 힘입어 죽음의 문제가 해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것만으로 죽음에 대한 우리의 근원적 공포가 제거되지는 않는다. 현자들의 말을 받아들여 우리가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존재였다면 죽음의 문제는 이미 오래전에 해결이 되었어야 한다(베커의 생각을 빌려 더 논의하겠지만, 죽음은 너무나 심대한 ‘심리역학(Psycho-Mechanics)’의 문제여서 이런 식의 지혜가 통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 사회주의 철학자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죽음을 향한 존재(Being-Towards-Death)’로서의 인간과 그 사태의 심리적 수용은 인간의 억압을 위한 ‘죽음의 이데올로기(Ideology of Death)’라고까지 주장했다. [3] 마르쿠제를 깊이 논할 처지는 못되지만, 이 표현의 파형이 내 생각과 공명(共鳴)하며 증폭되었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죽음을 학습하는 것이다”라는 고대 그리스의 현자들과 철학자 몽테뉴의 잠언은 ‘죽음’을 화두로 삼아 깊이 사색하면 죽음, 즉 삶의 유한성(finitude)에 의해 오히려 삶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난다는 정도로 해석할 수도 있겠고, 무엇을 ‘학습한다’는 것은 이해를 위한 것이니 이해하게 되면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죽음이란 학습의 대상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단 한 번의 사건이고 ‘존재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한다. 죽음까지 혁명적 톤으로 논하는 것에는 거부감도 일지만, 마르쿠제의 말에 일정 부분 공감하게 된다—“죽음에 대한 이런 전통적인 개념은 끔찍한 경험적 사실을 이데올로기로 변형시키는 사회정치학적 개념이다.”[4] 이런 마음은 ‘죽음의 불가피성을 믿지 못하면서 그 불가피성 앞에 굴복하는 것’[5]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SENS[6]라는 수명연장 연구기관을 운영하고 있는 노화학자 오브리 드 그레이(Aubrey De Grey)는 “죽음은 우리를 사로잡고 고문하고 있는 존재이지만,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을 겪고 있다”고 주장한다.[7] 스톡홀름 증후군이 무엇이던가? 테러리스트에 포획된 인질이 그의 생각에 동화되어 가는 증세이다. 일종의 자기기만이다. 죽음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공포와 불안이 어떤 평온한 마음에 의해 다스려질 수 있다는 위무(慰撫)의 언어에 힘입어 우리는 죽음에 대해 성숙하고 현명한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테러리스트의 기만적 언어에 넘어가듯 현자들의 언어에 홀리어 동화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죽음에 대해 깊이 사색한 이들은 무책임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그런 식의 표현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마르쿠제처럼 죽음에 저항하는 혁명가적 어조는 아니지만, 철학자 우나무노(Miguel De Unamuno)도 죽음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한 사람들 중 하나로 보인다. 우나무노의 탄식은 우리의 탄식이기도 하다.


내 삶의 통일성과 연속성이 파괴되는 것은 나의 존재가 중단된다는 것, 즉 그냥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럴 수가! 그것만 아니라면 무엇이라도 좋으련만![8]


죽음에 대한 관념이 시대에 따라 변해왔으며 그에 따른 대처방식 역시 다양하게 변화해 왔지만, 죽음에 대한 느낌을 즉각적으로 표현하라면 ‘공포’ 보다 더 적절한 단어는 찾을 수 없다.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알기에 인간은 어떻게든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또는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종교나 철학을 발전시켜 왔으리라 생각하게 되지만, 죽음의 불안과 공포는 여전히 마음의 형벌처럼 남아 우리를 괴롭힌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폭력은 무엇일까? 처형이나 살인이다. 자기 자신에게 가하게 된다면 자살이 될 것이다. 죽음만이 인간을 절멸시키는 궁극의 도구이다.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 우리나라 통계청 자료를 통해 확인해 보면, 2020년 총 사망자 수 304,948명 중 67.9%는 상위 10대 사망원인인 암, 심장 질환, 폐렴, 뇌혈관 질환, 자살, 당뇨병, 알츠하이머병, 간 질환, 고혈압성 질환, 패혈증으로 사망했다.[9] 이 중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의 수가 13,195명(인구 10만 명 당 25.7명)이다—즉, 매일 36명이 자살한다. 10대 사망원인만 봐도 우리가 아무 고통 없이 ‘자는 잠에 조용히 가는’ 죽음을 맞이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런 죽음을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천복(天福)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하늘의 복은 우리 것이 되기 쉽지 않고, 죽음은 살아서는 공포이며 그것에 이르는 마지막 과정은 고통이다. 세포자살설로 유명한 마틴 래프Martin Raff는 작가 조너던 와이너(Jonathan Weiner)와의 인터뷰에서 말한다—“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끔찍하게’ 죽어가는 것이다.”[10] 7개의 상을 받을 만큼 잘 만들어진—삶의 긍정으로 갈무리하긴 하지만 시종 침울한 분위기를 풍기는—다큐멘터리 <죽음으로부터의 탈출: 불멸을 향한 원정(Flight from Death: A Quest for Immortality)>은 이렇게 시작된다—시점은 2003년이다.


기적의 치료를 위한 우리의 기술과 소망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올해에만 약 1,800만 명이 전염병과 기생병으로 사망할 것이고, 심장병과 순환계 질환은 1,6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또 500만 명은 교통사고로 사망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총 5,400만 명의 사람들은 12개월 후 모두 망자가 되어있을 것이다.[11]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이렇게 끔찍한 것이라면 ‘잘 죽는(well-dying)’ 방법은 없을까? 죽음이 삶의 한 과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고통을 최소화하고, 존엄을 지키며 삶을 마감하려는 노력은 있어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논쟁도 여전하다. 바로 안락사다.[12] 안락사는 euthanasia(행복한 죽음), mercy killing(자비로운 살인) 등으로도 표현된다. 죽음을 잘 맞이하려는 노력을 묘사하려니 형용모순이 생긴다. 안락사의 현실적 필요성과 그 정신적 태도에 공감하는 바 적지 않지만 죽음에 대해 ‘아름다운 얼굴’ 같은 꾸밈말은 있을 수 없다.


죽음은 인간이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그리고 반드시 직접 겪게 될 보편적 현상이지만, 죽음의 회피를 갈구하는 심리작용도 그만큼이나 보편적이다. 그래서 죽음의 불가피성과 그 인식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글로 남길 수 있게 된 이후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인간은 한사코 죽지 않으려는, 즉 불멸의 꿈을 포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거의 본능적으로 죽음을 거부하고 어떻게든 넘어서려 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모두 불멸주의자일지도 모르겠다. 언급했듯이, 어네스트 베커는 인간의 삶 자체가 죽음을 이겨보려는 ‘불멸 프로젝트’라고 말한다—실패할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이긴 하지만. 과거에는—지금도 여전히 강력하지만—종교가 가장 가까이 있는 해결책이었던 것인데, 이제는 선택지가 다양해지고 있다. 일단의 현대 의학자들은 노화(aging)를 질병으로 분류하고 이 질병의 극복을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제안하고 있다. 노화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고, 이 길을 차단하면 죽음을 막을 수 있다는 논리다. 미국 식품의약청은 2016년부터 당뇨병 치료제 등으로 사용되어 온 메트포르민(Metformin)을 노화방지 의약품 용도로 인체실험을 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13] 노화를 질병으로 일정 부분 인정했다는 말이다. 한 치의 의심 없이 노화가 질병임을 주장하면서 수명연장의 방편을 상세하고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하버드 의대 데이비드 싱클레어(David A. Synclair) 교수도 자신의 책 <노화의 종말>에서 메트포르민과 함께 NMN, NAD+ 같은 이름도 생소한 물질의 항노화 기능을 진지하게 소개한다.[14] 이 외에도 여러 물질을 소개하며 자신이 이 물질들의 복용으로 나이를 거스르는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일정 수준의 건강을 유지하면서 수명을 연장하는 일은 늦든 빠르든 과학자들이 기필코 이루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일단, 수명연장은, 나쁠 것은 없겠으나, 죽음을 극복하는 방식이 아니다. 죽음의 지연에 불과하다(뒤에서 언급되겠지만, 수명연장은 영생의 방도를 마련할 때까지 우리가 살아남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수명연장은 차라리 의료복지 개념에 더 가깝다(물론 돈도 못 벌면서 국민건강보험 재정만 갉아먹는 노인들을 젊은 세대들이 흔쾌한 마음으로 수발해 주리라는 보장은 없다). 수명연장이 무의미한 것일 수는 없지만 죽음을 피하고자 한다면 죽음을 연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끊어내려는 노력이 차라리 담백한 것이겠다. 불멸의 궁극적 의미는 ‘죽음의 무효화’다. 이런 관점이나 주장에 대해 개인적 경험이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때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그리고 ‘영생의 공학’이란 용어를 써가며 불멸의 방편을 소개하던 나는 죽지 않으려고 노욕을 부리는 노인이 된 느낌이었다. 정말 우리는 죽음에 순응하도록 선동하는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된 것일까?


불멸을 향한 인간의 시도와 노력은 역사 속에서 단 한 번의 휴지기도 없었지만, ‘영생의 성배(聖杯)’를 찾았다는 소식은 없다. 사실 답이 없을지도 모른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우리는 영생의 실현가능성 따위는 믿지 않는다. 그게 정상적인 인간이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동시대 불멸주의자들의 책과 논문을 찾아 읽었다. 2020년 미국에서 창간된 월간지 ‘불멸주의자(Immortalist)’가 창간기념으로 1년 무료 온라인 구독권을 주었을 때도 반가운 마음으로 신청했다. 나는 읽고 생각했다. 컴퓨터가 관련된 공부를 한 탓도 있겠지만, 인간의식이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변환되어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불멸주의자들의 주장을 읽으면서, 시체어로 마음이 웅장해졌고 그런 미래를 마음속에서 그려보게 되었다. 먼 미래의 컴퓨터 환경 속에서 어쩌면 순수의식으로 남아 있을, 그러나 상상하기조차 힘든 지력(智力)과 무한의 시간을 가지게 될 우리는 죽음을 초월하는 경지의 불법(佛法)을 득할 수 있을 것인가? 미래의 컴퓨터는 모든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미륵(彌勒)-컴퓨터’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직업 상의 습관일 수 있지만, 이런저런 자료들을 습득하게 되면서 머릿속에 흩어져 저장되어 있는 내용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처음 계획은 나름 원대해서 지금 이 책의 모습보다는 더 많은 장들이 구상되고 일정 부분 내용이 채워지기도 했지만, 무책임한 인간들이 늘 그렇듯 시간과 능력의 부족을 그 탓으로 돌리고 이 정도의 내용을 담는 선에서 정리하기로 했고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이 책 보다 넓고 깊은 내용을 담은 확장판을 머릿속에 그려보긴 하지만, 올 것 같지 않은 예감은 있다—불멸은 내 것이 아니고, 나는 이미 많이 늙었다. 프랑스 소설가 장폴 뒤부아(Jean-Paul Dubois)는 <프랑스적인 삶>에서 교수를 ‘분류하고 삭제하고 모욕하는 광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냉소적으로 묘사한다(나는 움찔했다). 남을 ‘모욕’하는 것도 실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라, 이 책의 주된 작업은 관련 주제와 인물들을 ‘분류’하여 설명을 붙이고,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하는 것이었다. 그런 부류의 선생 밖에 안되지만, 그래도 그동안 접한 책과 논문, 기타 자료의 내용을 질서 있게 정리해 책이라는 그릇 안에 담아보기로 했다—내 생각도 조금 담기는 했다. 당연히 담대한 주장을 담은 책이 아니다. 그래도 읽기에 그리 나쁜 글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 책이 다루려는 내용과 그 논리적 흐름은 대강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유한한 존재, 즉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불멸을 욕망한다. 어쩌면 이 양립 불가능성이 인간의 불행과 야만의 원인이다.

(2) 기왕의 영생론 또는 불멸주의는, 그것이 물리적인 것이든 상징적인 것이든, 진정한 해결책이 되기 어려워 보인다. 실패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3) 미래의 과학기술은 컴퓨터와 융합된 인간존재를 통해 불멸의 쟁취를 가능하게 해 줄지도 모른다. 그렇게 믿고 실행에 옮기려는 사람들이 있다.

(4) 컴퓨터와 결합한 인간은 불멸할 수 있지만, 이 결합이 가능하려면 인간의 마음을 ‘정보화’할 수 있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이것이 가능한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5) 만일 가능하다면, 불멸의 인간은 어떤 존재일 것인가?


(1)과 (2)는 죽음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태도가 만들어낸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것이어서 논쟁의 여지가 크지 않다. 불멸을 위한 인간의 시도는 인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지만, (3)과 (4)의 내용과 관련된 죽음의 극복과 불멸의 쟁취는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런 논리적 흐름을 따라 논의를 진행하고 주제 별로 반성적 논의도 함께 시도해 볼 것이다.


책 마지막 부분의 [부록]은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과 그 극단적 미래 모습이라 할 수 있는 초지능(Superintelligence)의 문제를 본문과의 주제 연관성을 염두에 두고 추가로 포함시킨 글이다.



[1] Ernest Becker, The Denial of Death, The Free Press, 1973, Preface. (죽음의 부정, 김재영 역, 인간사랑, 2008; 죽음의 부정, 노승영 역, 한빛비즈, 2019)

[다양한 정신분석학적 이론과 주장들을 논의하면서 죽음의 본질에 접근해 들어가 결국은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죽음학의 명저. 이 책은 2008년과 2019년 두 차례 번역본이 나왔다. 50년이 지나서도 번역이 된다는 것은 시간을 이기는 이 책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라 본다. 일반 도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읽기 까다로운 책이라 역자의 큰 노고는 짐작이 되지만, 2008년 번역서는 읽기가 불편하고, 오역도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2019년 번역서는 가독성이 개선된 것으로 판단된다. 베커는 내가 이해한 바대로 번역하여 인용하였다. 다른 책들도 그랬지만 특히 베케에 대해서는 내 이해와 책임 하에 다루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다.]

[2] 같은 책, p. 26.

[3] Herbert Marcuse, “The Ideology of Death,” in Herman Feifel, ed. The Meaning of Death, McGraw-Hill, 1959, Chapter 5.

[서구철학에서 면면히 이어져온 죽음 수용의 심리에 대항하여 죽음을 극복할 수 있으며, 극복해야만 하는 것으로 보는 마르쿠제의 에세이. 마르쿠제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염세적일 수밖에 없는 개념을 비판하기 위해 이러한 논지를 펼쳤다. 마르쿠제의 논지는 ‘죽음의 전망(anticipation of death)’과 ‘죽음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순응(ideological exhortation of death)'에 기반한 하이데거의 인간존재 해석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가스실을 위한 정치적 기반을 제공했다는 것에까지 이어지고 있다(p. 69). 하이데거의 친나치 행각은 알려져 있는 바다. 마르쿠제의 글이 실린 책은 인터넷 아카이브 사이트 (https://archive.org/details/in.ernet.dli.2015.49696/page/n7)에서 PDF 스캔본을 구할 수 있다.]

[4] 같은 책, p. 70.

[5] 같은 책, p. 72.

[6] SENS는 Strategies for Engineered Negligible Senescence의 머릿글자로 만든 단어이다. ‘무시해도 좋을만한 최소한의 노화만 허용하는 기술 전략’ 정도의 뜻을 가지는 이름이다.

[7] Mark O’Connel, To Be a Machine: Adventures Among Cyborgs, Utopians, Hackers, and the Futurists Solving the Modest Problem of Death, Anchor, 2017, p. 257 (번역본 쪽번호). (마크 오코널, 트랜스휴머니즘, 문학동네, 2018.)

[문학 전공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트랜스휴머니즘 운동과 관련된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 나눈 대화의 내용과 자신의 인문학적 소양을 버무린 교양서]

[8] Miguel de Unamuno, Tragic Sense of Life, Dover Publications, 1921/1954, p. 5.

[‘삶의 비극적 의미’라는 책 제목이 그 내용을 짐작케 해주는 우나무노의 철학 에세이. 불멸에 대한 갈망도 내용으로 담고 있다.]

[9] 통계자료는 암은 ‘악성신생물’, 자살은 ‘고의적 자해’란 용어와 병기해 사용하고 있다. 악성신생물의 의미는 알겠는데, 고의적 자해라는 표현에는 갸우뚱하게 된다. ‘자해’는 내가 나에게 해를 끼치는 것으로 보이는 타자의 관점을 반영할 뿐이다—인간은 자신을 해칠 수 없다. 공공기관에서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완곡어법임이 충분히 이해되지만, 자살은 자해라기 보다는 죽음의 공포도 덮어버리는 절망감으로 인해 자기존재의 지속성을 끊는 실존적 선택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10] Jonathan Weiner, Long for This World: A Strange Science of Immortality, Ecco, 2010, p. 299. (번역본 쪽번호) (과학, 죽음을 죽이다, 한세정 역, 21세기 북스, 2011.)

[급진적인 생명과학자이자 노화학자인 오브리 드 그레이와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죽음의 생물학적 및 진화론적 메카니즘, 생명연장의 과학을 살펴보는 책]

[11] Flight from Death: A Quest for Immortality, Directed by Patrick Shen, Produced by Greg Bennick, 2003.

[일곱 차례의 수상경력이 증명하듯이 죽음에 대해 깊은 성찰을 보여주는 웰메이드 다큐멘터리]

[12] Catherine Poter, “At His Own Wake, Celebrating Life and the Gift of Death,” New York Times, May 25, 2017.

[존 쉴즈John Shields라는 전직 신부, 사회복지사, 노동운동가는 2016년 6월 캐나다에서 합법화된 안락사를 택해 생을 마감한다. 그의 삶과 죽음을 담담하게 써 내려간 뉴욕타임즈 캐서린 포터(Catherine Porter) 기자의 르포 형식의 글이다. 참고자료 인용은 아니지만, 큰 울림을 주는 글이라 여겨져 독자께도 일독을 권하는 마음으로 포함시켰다.]

[13] Vittorio Hernandez, “US FDA gives OK for human trial of metformin as anti-ageing drug to prolong life until 120 years,” International Business Times, Dec. 1, 2015.

[2016년부터 메트포르민을 노화방지 용도로 인체실험을 허용하는 FDA의 승인 소식을 담은 기사]

[14] David A. Sinclair (with Mathew D. LaPlante), Lifespan: Why We Age - and Why We Don’t Have To, Atria Books, 2019 (노화의 종말, 이한음 역, 부키, 2020).

[노화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치료 가능한 질병임을 주장하는 책. 의료과학과 생활습관의 변화를 통해 노화를 지연시킬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역노화, 즉 회춘도 가능하리라는 주장이 전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