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죽음의 진화론—죽음이 만들어지다

by 이강혁

죽음은 아마도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다.

— 스티브 잡스




우주적 스케일로 죽음을 사색한다는 것은 생각의 장난, 올드한 표현으론 사고의 유희에 가깝다. 억겁의 시간은 우리의 머리에는 있지만 우리의 마음에는 없다. 인간의 마음이 다룰 수 있는 시간은 100년 남짓이고, 그 시간 축 내 어느 지점에서 인간은 죽는다. 그리고 인간의 죽음은 생명체로서의 죽음이고, 그에 따른 자의식의 소멸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본질적으로 죽는 존재인가? 죽음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죽음은 본능인가?


삶과 죽음은 서로 떼어낼 수 없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인가?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자신의 후기 이론에서 삶의 본능인 리비도(Libido)와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Thanatos)가 서로 투쟁한다고 보았다. 프로이트의 이런 생각은 난삽하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지만, ‘죽음 본능(Death Instinct)’이란 개념이 도입되는 그의 책 <쾌락원리를 넘어서(Beyond the Pleasure Principle)>을 중심으로 요약을 시도해 보면 이렇다.[1]


프로이트가 주창한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의 요체는 ‘성애(sexuality)’다. 우리의 무의식(Unconscious)에는 맹목적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리비도가 있으며, 리비도는 좌고우면 하는 법이 없다. 쾌락을 추구하는 이 성적 에너지의 억압이 온갖 정신질환의 근원이다. 따라서 불쾌 또는 고통을 향한 욕동(慾動, drive)이 존재한다면, 이는 프로이트의 쾌락원리와 모순을 일으킨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프로이트가 관찰한 것은 이런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의 참전군인들은 그들의 꿈속에서 끊임없이 전쟁의 고통을 피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손자가 보이는 Fort/Da(가버린/거기에) 놀이의 행동 속에서도 이것을 보았다. 몇 시간 동안 지속되는 어머니의 부재에 대해 울음조차 보이지 않았던 손자는 어머니가 없는 동안 실패를 구석으로 던지고(어머니의 부재) 다시 실을 당겨 실패를 가져오는(어머니의 현존) 놀이를 하면서 ‘오~오’하는 고통과 쾌락의 소리를 반복적으로 냈던 것이다. 이런 고통의 반복적 소환을 프로이트는 ‘반복-강박(repetition-compulsion)‘이라고 불렀으며, 자기 이론의 틀 안에서 설명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존재(삶) 뿐만 아니라 비존재(죽음)에 대해서도 욕동을 가진다는…


만약 죽음에의 소망이 인간의 본능 중 하나라면 죽지 않으려는 노력은 무망한 노릇일 수도 있겠다. 어찌 보면 우리는 ‘본능 기계’ 같은 존재인데, 죽음이 본능이라면 죽음을 극복하겠다는 기도(企圖)가 자연의 논리와 충돌을 일으킨다. 프로이트는 더 이상 절대적 권위를 지니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의 글들은 울림이 있고, 아직도 그가 읽히는 이유라고 생각하게 된다.[2] 하지만 베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도 죽음은 그런 것이 아닌 것 같다.


당신이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아우구스트 바이스만(August Weismann)이란 학자의 노화이론은 ‘늙으면 죽어야지…’라는 우리의 가치체계에 부합한다(사실은 노인들이 거짓말하는 것이다).[3] 바이스만에게 자연적인 죽음은 노화(aging, senescence)의 결과이다. 오래 살아남아 젊은이와 먹거리와 같은 생존자원을 두고 경쟁하는, 민폐만 끼치는 늙은이를 차단하기 위해 자연선택은 ‘프로그래밍 된 죽음(programmed death)’에 손을 들어주었다는 주장이다. 늙은 세대에서 젊은 세대로 삶이라는 권력의 이양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우리의 사회심리학적 태도와 일치하고, 우리의 마음도 어느 정도는 흔쾌하다. 개체가 아니라 종의 존속을 유리하게 하는 자연선택의 현명함이고, 아름다운 죽음의 진화론이다. 그런데 정말 노화는 늙고 쓸모없는 개체들을 제거함으로써 종의 존속에 복무하는 것인가?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노화는 기능이 아니라, 기능의 파괴다”[4]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바이스만의 주장은 체세포(somatic cell)와 생식세포(germ cell)의 이분법에 기반하고 있으며, 프로이트도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프로이트는 <쾌락원리를 넘어서>에서 꽤 긴 부분을 할애하여 바이스만을 인용하며 주장한다—‘유기체는 무기체로 돌아가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죽음 본능’이다. 바이스만에 따르면 고등동물의 체세포 분열은 그 횟수에 한계가 있어 결국 노화와 죽음에 이르게 되며, 생식세포는 자손에 유전정보를 전달하여 다음 세대의 생식세포와 체세포로 이어지는 생명의 지속성을 확보한다.[5] 인간과 같은 고등동물의 불멸성은 생식세포에 의해 획득된다. 프로이트는 생물학자처럼 말한다.


… 성 충동이 유기체의 원시적 상태를 재생하는 것은 맞지만, 성 충동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도달하려는 목표는 특정한 방식으로 차별화된 두 생식세포의 결합이다. 만일 이와 같은 결합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생식세포들은 다세포 유기체의 다른 모든 구성 요소들과 함께 죽어 버린다. 오로지 이러한 조건 하에서만 성적 기능은 세포의 생명을 연장시키며 불멸성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다.[6]


프로이트가 자신의 이론이 바이스만의 이론과 유비(類比) 관계가 있다고 본 생각의 내용은 이런 것이다—죽음을 맞이하는 체세포는 죽음 본능, 생명을 재생산하는 생식세포는 생명 본능.


… 체세포(soma)와 생식질(germ-plasm)에 대한 바이스만의 구분과 죽음 본능과 생명 본능에 대한 우리의 구분 사이에는 현저한 유사성이 성립하며, 그 유사성의 의미도 유지된다.[7]


바이스만으로부터 피터 메데워(Peter Medawar), 그리고 닉 레인(Nick Lane)으로 이어지는 노화와 죽음의 생물학을 알게 되고, 그러던 중 바이스만을 프로이트의 책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공부가 주는 즐거움이지만, 거기까지다. 죽음의 생물학에 고개를 끄덕여도 그것이 심리문제로서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해줄 수 없다—죽음의 기원을 알아도 죽음의 공포는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진화적 과정이 있었든 프로이트의 ‘죽음 본능’보다는 베커의 ‘죽음의 공포’가 인간이 느끼는 죽음의 실체에 더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이 책이 동조하는 논지이다. 생식세포에 의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불멸성은 ‘자의식’의 불멸성이 아니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나의 자의식이 죽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베커와 우리의 고민이다.


‘생식질 이론’으로 일컬어지는 바이스만의 이론은 영국의 생화학자 닉 레인의 진화론적 사생관에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바이스만의 ‘프로그래밍된 죽음’이란 개념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았고, 해서 바이스만도 폐기하였다. 바이스만의 이론을 비판하여 그 오류를 지적한 것은 피터 메데워란 생물학자였다. 메데워에 따르면 우리는 늙어서 당연히 죽거나 죽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몸은 우리가 늙어 죽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다. 메데워는 밝힌다—종에는 크기, 대사율(代謝率, metabolic rate), 천적 등의 신체적/환경적 요인에 의한 통계적 수명이 있다. 닉 레인에 따르면, 젊은 시절 생식에 몰두하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그래서 자연선택으로 걸러지지 않는 어떤 유전자들은 나이가 들면 특정 질환을 일으킨다—젊은 시절 이 유전자들은 어쩌면 이롭게 작용했을 수도 있다. 각 개체가 자신에게 할당된 통계적 수명을 넘기지 않는다면, 즉 제때 죽을 수 있다면, 나이가 들어 생기는 비정상적인 유전자의 부정적 효과, 즉 ‘변이 축적(mutation accumulation)’으로 생기는 위험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모든 유기체는 질병, 사고, 포식자 등에 의해 결국 죽임을 당한다. 늙은이에게 이로운 유전자보다 젊은이에게 이로운 유전자를 자연선택이 선호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고, 그래야 다음 세대가 건강하게 유지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메데워의 변이축적 이론에서 노화는 자연선택의 부산물일 뿐이다. 노화는 적응과 무관하고, 따라서 그것을 회피하기 위한 ‘선택압력(selection pressure)’이 없다. 한마디로 늙은이의 몸속에서 해만 끼치는 변이를 제거하는 진화적 메커니즘은 필요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 노화를 인정하기 싫은 우리가 보기에는 진화의 비극적 요소이지만, 이건 진화의 명령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죽음에 저항하는 인간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의료기술에 의한 인위적 수명연장을 포기하지 않는다.[8] 그러나 저러나 어차피 우리는 통계적 수명 아래 살다 죽거나 또는 노화를 겪어 고통스럽게 죽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죽음은 삶의 당위가 아니다. 삶과 죽음에는 논리적 함축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삶이 있다(p)’면 ‘죽음이 있다(q)’, 즉 [ p -> q ](p이면, q이다)와 같은 명제논리의 함축은 삶과 죽음에 적용되지 않는다. 죽음이 있어 삶의 의미가 드러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우리는 그 심리적 거짓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긴 하지만. 죽음은 삶의 관심사가 아니다. 아니, 본래 생명체는 죽음이 존재하는지, 죽음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프로이트의 생각을 옮기며 베커는 말한다.


무의식은 죽음이나 시간을 알지 못한다. 생리화학적, 유기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기저(基底)에는 불멸성이 존재한다.[9]


죽음의 진화론


2012년 2월 말 국내외 언론들은 영국 노팅엄대학의 연구팀이 발표한 편형동물 플라나리아(Planaria)에 대한 연구결과를 앞다투어 보도하고 있었다—이 생명체는 죽지 않는다.[10] 보도기사들은 이 생명체의 항노화(anti-aging) 메커니즘에 영감을 받아 ‘무병장수의 가능성’에 방점을 두고 있었지만, 죽음은 생명체의 본질적 속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도 이어졌다. 죽음이 필연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가지게 되었나?


같은 해 11월 말 뉴욕타임즈는 해파리가 체득한 불멸성의 원리를 장문의 과학기사로 내보내고 있었다.[11] 1988년 독일 해양생물학자 크리스티안 좀머(Christian Sommer)는 리비에라 해안지역 이탈리아 방면 피한지에서 히드로충(hydrozoan)을 연구하고 있었다. 이곳은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구상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공교롭게도 니체는 이 책에서 모든 것은 소멸하고 다시 소생한다는 영원회귀 사상을 설파했다. 좀머가 채집한 것은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유명세를 타 ‘불멸의 해파리(Immortal Jellyfish)’로 불리는 생명체였다. 한마디로 이 생명체는 죽음을 거부했다. 어떻게? 나이를 거꾸로 먹음으로써. 즉, 이 생명체는 언제라도 개체발생의 가장 초기 단계인 폴립(polyp) 상태로 회귀해 다시 새로운 생명활동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죽어서 환생한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이제는 죽지도 않고 늙었다 젊어졌다 하면서 영생하는 희한한 경우가 관찰된 것이다. 다시 한번, 드물긴 하지만 죽음은 모든 생명체에 있어 필연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죽음은 도대체 무엇인가? 왜 (거의) 모든 생명체는 죽는가? 왜 죽는 것이 당연한가?


플라나리아와 해파리의 예에서 보듯이 죽음이 반드시 생명체의 본질적 속성이 아닐 수도 있다. 생명유지를 위한 자원만 있다면 이런 생명체들은 영원히 살 것이다. 사실 외부환경에 의하지 않고는 아메바나 짚신벌레 같은 단세포 생물은 자연사하지 않는다—그것들은 죽을 수 없다. 생명과 죽음은 쌍생아가 아니다. 그러나 모든 고등생물은 늦든 빠르든 죽음을 맞이한다. 만일 죽음이 생명체의 본질이 아니라 진화의 단계에서 출현한 것이라면 죽음은 언제부터 어떤 필요에 의해 삶의 한 요소로서 수용되게 되었을까?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죽음은 귀결이 아니라 삶을 위한 기제일 수 있다. 즉, 죽음은 생명체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죽음이 진화의 과정에서 습득된 형질(形質, trait)이라는 바이스만의 이론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좀 더 최근에 와서 이런 방식의 사고를 강화시켜 준 것은 생물학, 특히 세포생물학과 분자생물학의 공이 크다. 전공 영역을 이탈한 주제넘은 평가지만 관심으로 읽다 보니 그렇더라는 얘기다. 복잡한 얘기를 좀 줄이면, 오늘날 지구에 이렇게 다양한 생명체가 번성하는 근본적 이유는 진핵세포(eukaryotic cell)의 출현과 깊은 관계가 있다. 진핵세포는 박테리아와 같은 원핵세포(prokaryotic cell)와 달리 세포핵이 있으며, 그 안에—다른 세포소기관(organelle)들도 있지만—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가 있는 복잡한 세포다. 문제는 독립된 세포 같이 보이는 미토콘드리아다. 그 증거 중 하나는 미토콘드리아가 고유의 DNA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주 먼 옛날 미토콘드리아의 조상이 더 큰 세포의 포로가 되지만, 그 안에서 지금 우리가 ‘에너지 공장’이라고 알고 있는 미토콘드리아로 진화하게 된다. 지금 모든 생명체에 있는 미토콘드리아는 심지어 자신의 DNA 일부를 세포핵에 양도한 상태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세포가 결합하여 공생하게 되면서 복잡한 생물체로 발전하는 새로운 진화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이런저런 정황을 종합하여 지금은 거의 정설로 자리 잡은 이 ‘세 내공생설(Endosymbiosis)’은—그 이전에 다양한 논의가 있었지만—불세출의 여걸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에 의해 세상에 뚜렷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고, 우리에게 생명, 그리고 죽음에 대해 깊은 성찰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세포내공생설의 가장 큰 의미 중 하나는 진핵세포가 그렇게 출현했다는 것이고, 진핵세포의 출현 없이는 우리와 같은 복잡한—지금 이 책에서처럼 삶과 죽음을 논하는—생명체의 출현도 불가능했을 거라는 점이다. 더 나아가 섹스, 자살, 죽음조차도 이 생물학적 진화과정에서 출현했다는 생각을 가능하게 해 준다. 이런 신박한 지식을 전달해 주는 학자 중 하나가 닉 레인이다. 죽음에 대한 그의 진화생물학적 관점은 여러 책과 논문을 통해 전개되어 있다.[12] 진핵생물은 유성생식을 하고 성은 항상 두 가지다. 미토콘드리아를 듬뿍 품은 덩치가 큰 난자와 미토콘드리아가 없는 정자가 만나 부모의 염색체를 반반 씩 받은 새 생명은 배아 발생 초기에 새로운 생식세포를 가지게 되고 그것은 세대를 통해 이어진다. 그리고 자연선택에 의해 우리는 살아남는다. 불멸의 생식세포가 담보되므로 체세포는 생식세포와 분리되고, 이제 불멸의 줄기세포를 유지해야 하는 제약으로부터 해방된다. 이런 연유로 죽음을 고뇌하는 그러나 스스로 재생할 수 없는 뇌세포도 나타났다. 체세포는 일회용품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는다. 자연은 원핵생물의 세포 내 공생, 양성생식, 생식세포의 진화를 선택했고, 죽음은 생식세포를 위한 환승역 같은 것이다. ‘죽음을 고뇌하는 인간’은 진화의 의미론(semantics)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 캄브리아기 대폭발 직전에 일어났던 대양의 산화(酸化)는 활동적인 좌우대칭 동물의 진화를 선호했다. 활동성이 증가하면서 미토콘드리아의 돌연변이율이 증가한 동물들에서는 생식세포주의 분리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불멸의 생식세포주와 소멸되는 체세포의 기원, 계획에 의해서 종착점이 예정된 죽음의 기원이었다. 생식세포는 늙거나 죽지 않는다. 세대마다 발생 초기에 하나의 생식세포주를 분리해서 다음 세대의 씨앗이 될 세포를 만든다. 개개의 배우자는 손상될지 몰라도, 새 생명은 태어난다.[13]


‘죽음이란 씨앗에 의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생명이 만들어졌다’[14]는 것이 닉 레인의 생각이다. 그런데 진화의 과정에서 필요했던 죽음과 의식으로 인해 우리는 전혀 비생물학적인 고통과 절망을 떠안게 되었다. 다시 베커 식으로 말하면, 자의식을 가지게 된 생명체의 고통과 절망이다. 물리학과 생물학이 이루어낸 과학적 발견은 우리가 처한 상황을 시리도록 정확하게 알려주지만, 그냥 그뿐이다. 물리학이나 생물학은 인간의 죽음에 대해 철학적인 해결책을 약속한 바 없으며, 그럴 책임도 없다. 닉 레인의 진화적 사생관은 울림이 크고, 그것을 바탕으로 죽음에 대해 좀 더 성숙한 태도를 가지는 것도 가능할 수 있겠지만, 그게 말처럼 쉬울 수는 없는 일이다. 죽음의 문제는 그렇게 해결될 수 없다—죽음의 기원을 알게 되어도, 결국 죽음은 생물학적 문제가 아니라 심리학적 문제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자연선택에는 계획이 없으며, 도킨스(Richard Dawkins)의 표현을 빌리면, 진화는 ‘눈먼 시계공(The Blind Watchmaker)’ 같은 것이다. 진화는 단지 복잡한 생물체이기만 한 인간이 아니라 죽음을 인식하는 존재까지 만들어 냈지만, 진화가 인간을 불안하고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 작업을 칠 수는 없다. 진화는 ‘의도’가 아니라 ‘우연’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살면서 알게 되지만, ‘뜻대로’가 아니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는 일이 더 많지 않은가. 진화는 망막의 맹점이 없는 것처럼 시각정보를 땜질하는 뇌의 트릭은 허용했지만 죽음의 공포에는 어떤 진화적 트릭도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이 시계공의 잘못은 아니다.


프로이트는 생명 본능과 죽음 본능을 논하면서 심리학 용어들이 주는 혼란, 생물학의 내용들을 차용하면서 생기는 불확실성을 우려한 것 같다. 그리고 훗날 궁극적으로는 과학에 의해 자신의 생각들이 분명해지리라는 것을 기대한 것 같기도 하다.


생물학은 진정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 찬 영토이다. 우리는 생물학이 가장 놀라운 정보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으며, 수십 년 후 우리가 던졌던 질문들에 어떤 답을 들려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15]


죽음에 대한 닉 레인 류의 생물학적 설명이 프로이트가 원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프로이트는 훌륭하지만, 삶과 죽음에 대한 해석은 다시 한번 베커 이상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단순한 세포분열을 통해 불멸을 성취하는 단세포 생물과는 달리 자연은 결국 인간이라는 종을 만들어내고 ‘생식(섹스)’과 ‘죽음’을 통해 종의 불멸을 선사했다. 과학은 여기까지 설명하고 이것을 지혜롭게 받아들이기를 권하지만, 이미 자의식을 가진 인간에게 이것은 궁극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베커는 오토 랑크의 통찰과 자신의 생각을 버무려 죽음을 해석한다.


섹스는 몸의 것이며 몸은 죽음의 것이다. 랑크가 상기시켜 주듯이, 이것이 섹스의 발견으로 죽음을 세상에 불러들이게 되는 낙원의 종말과 관련된 성경 이야기의 진정한 의미다. 그리스 신화에서 보듯 에로스(Eros)와 타나토스(Thanatos)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다. 죽음과 섹스는 쌍둥이 형제다. [… 중략…] 섹스와 죽음이 쌍둥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 수준에서의 이해를 수반한다. 첫 번째 수준은 철학적·생물학적이다. 생식하는 동물은 죽는다. 이런 동물의 수명이 비교적 짧은 것은 생식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 자연이 죽음을 정복하는 것은 영생하는 생물의 창조가 아니라 단명하는 생물의 생식을 통해서다. 진화적으로 볼 때 단순한—그리고 거의 문자 그대로 영생하는—자가분열 생물 대신 정말로 복잡한 생물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이 이제는 인간에게 난제가 되었다. 섹스가 종에 속한 동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이 전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사슬을 이루는 고리에 불과하며 다른 고리로 교체될 수 있고 자신 안에서 완전히 소모될 수 있음을 일깨운다. 그렇다면 섹스는 종으로서의 의식(species consciousness)을 나타내며 그리하여 개별성의 패배, 즉 인격의 패배를 나타낸다. 하지만 인간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이 인격의 발달이다. 인간은 그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교미하는 동물이 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인간의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에서의 삶에 진정으로 고유하게 이바지하는 것이다.[16]


진핵세포에서 비롯된, 그리고 ‘이기적 유전자’의 운반체로서 섹스를 하는 인간은 자신의 몸에 내장된 죽음의 장치를 피할 수 없지만, 이미 인격을 가지게 되고 그것의 무한한 확장을 원하는 인간은 죽음을 부정하며, 불멸을 원한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쓰던 인간이 추진하는 불멸 프로젝트는 근본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절망은 인간의 운명이 된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1] Freud, Sigmund, Beyond the Pleasure Principle, The Hogarth Press, 1920.

[‘죽음본능’에 천착한 프로이트의 후기 저작. 이 책에서 참고한 것은 1961년 제임스 스트래치(James Strachey)가 번역한 영어본이다. 베커가 존경하는 정신분석학자 질부르크(Gregory Zilbroog)의 빼어난 소개글도 실린 버전이다.]

[2]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심리현상의 분석에 의한 ‘사후판단(a posteriori judgement)’은 할 수 있으나, 이론에 근거한 ‘예측가능성(predictability)’을 제공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유사과학(pseudo-science)은 될지 언정 진정한 과학이 될 수는 없다는 비판이 많다. 정신분석학은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이 예견하고, 관측으로 검증되는 블랙홀이나 중력파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 없다. 잘 알려져 있듯, 대표적인 이가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 개념으로 유명한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다. 반증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 이론은 과학이 아니라는 게 요지다. 과학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 맹목적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 반증가능성의 열린 정신 때문일 것이다. 신경과학과 정신분석학을 연결하려는 실증적 연구가 전무한 것은 아니지만(Mark Solms and Oliver Turnbull, The Brain and the Inner World, Other Press, 2002. 이 책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신경과학의 영역에서 과학적으로 검증해 보려는 노력을 담은 것이지만, 두 영역의 상관관계를 명쾌하게 밝힌 것이라 볼 수는 없으며,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과학적 접근범의 초기 연구쯤으로 여기는 것이 좋을 듯하다), 글로 살펴본 신경과학자들은 프로이트에 대해 대체적으로 비판적인 것 같았다. 정신분석학은 사실 반박가능하지 않다. 그에 따른 비난과 비판은 피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3] 바이스만과 아래에 이어지는 피터 메데워(Peter Medawar)는 원저작물을 접하지는 못했으며, 그들의 기본적인 이론과 주장은 노화에 대한 진화 이론들의 자세한 소개와 미래연구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다음 논문을 참고하였다: Predrag Ljubuncic and Abraham Z. Reznick, “The Evolutionary Theories of Aging Revisited—A Mini-Review,” Gerontology, Vol. 55, 205-216, 2009.

[4] Alan Harrington, The Immortalist, Random House, 1969, p. 262.

[오래된 책이지만 죽음의 문제에 대한 인문학적 사고와 그에 대한 비판과 함께 과학기술에 의한 불멸을 다루는 선구적 저작]

[5] 바이스만의 통찰을 과학적 실험과 관찰로 강화한 이가 레오나드 헤이플릭(Leonard Hayflick)이라는 미국 해부학자이다. 헤이플릭은 무한분열하는 세포는, 분자 수준에서 논하자면, 불멸의 존재라는 꽤 널리 받아들여진 당시 학계의 주장을 반박한다. 그는 배양액의 세포들이 40~60회까지 분열하면서 노화의 징후를 보이다가 분열을 멈춘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Hayflick L, Moorhead P. S. (1961), “The Serial Cultivation of Human Diploid Cell Strains,” Exp Cell Res, Vol. 25, No. 3, 585–621, 1961). 세포가 무한히 분열할 수 없다는 사실에 한 후배 학자가 ‘헤이플릭 한계(Hayflick Limit)’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제 일반인들에게도 생소하지 않지만, 염색체 말단의 텔로미어(Telomere)라는 부분이 DNA 복제 때마다 줄어들며, 이것이 소진되면 복제가 멈춘다는 것이 밝혀져 헤이플릭 한계와의 상관관계가 밝혀졌다.

[6] Freud, 1920, p. 38. [인용문의 ‘차별화된 두 생식세포’는 난자와 정자를 의미한다.]

[7] 같은 책, p. 43.

[8] Nick Lane, Life Ascending: The Great Inventions of Life, W. W. Norton & Company, 2009, ch. 10. (생명의 도약: 진화의 10대 발명, 김정은 역, 글항아리, 2011.)

[생명의 기원에서부터 섹스, 의식, 죽음에 이르기까지 진화가 만들어낸 10가지 생명현상을 다룬 닉 레인의 명저]

[9] Becker, 1974, p. 1.

[10] “Immortal Worms Defying Aging”, Feb. 27, 2012. (http://www.nottingham.ac.uk/news/pressreleases/2012/february/immortal-worms-defy-ageing.aspx)

[불멸의 편형동물 플라나리아 연구결과에 대한 노팅엄대학의 보도자료 웹사이트]

[11] Nathaniel Rich, “Can a Jellyfish Unlock the Secret of Immortality?” New York Times, Nov. 28, 2012.

[해파리의 불멸성에 대한 뉴욕타임즈 과학기사]

[12] Nick Lane, “Origins of Death,” Nature, Vol.453, 583-585. May 2008.

[죽음의 기원에 대해 닉 레인이 네이처에 기고한 에세이]

Nick Lane, The Vital Question: Energy, Evolution, and the Origins of Complex Life, W. W. Norton & Company, 2015. (바이털 퀘스천: 생명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김정은 역, 까치, 2016.)

[생명의 기원을 다루는 명저. 세포 내 공생이라는 우연한 사건에서 출발한 진핵세포의 출현,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진핵생물의 성, 죽음을 일으키게 되었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 준다.]

[13] Lane 2015, p. 293 (번역본 쪽번호)

[14] Lane 2008, p. 585.

[15] Freud, 1920, p. 54.

[16] Becker, 1974, p.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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