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5월호 <도덕의 상대성과 지구화>
보편적 도덕은 존재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범람하는 도덕의 상대성 속에서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플라톤 철학에 근거하여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 답해본 어느 대학생의 주장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모순: 보편성 속의 상대성
문명이 시작된 이래로 세계는 상당히 세분화되었으며, 사람들의 사고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다양해졌다. 이는 당연한 현상이다. 역사의 흐름에서, 사람이 발전해오면서 과학적 지식과 기술적 지식 또한 굉장한 진보를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 따른 반향도 명백했다. 도덕(윤리)적인 측면에서, 지적 의식이 아직 그만큼 진보되지 않은 듯하다. 분명 시기적으로 2500년의 차이가 있으나, 시민의식은 고대 그리스-특히 아테네-와 차이가 그다지 없다. 오히려 정치참여에 대한 의식은 그 당시 아테네인들이 훨씬 높았었다. 하지만 도덕적인 측면은 어떠할까? 헤로도토스가 역사를 저술하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지구에서 도덕적으로 완성을 이룬 국가는 결코 한 나라도 없었다. 즉 옛날과 지금 또한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적이길 위한 노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도되었다.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 그리스 3대 철학자도 마찬가지이고, 공자-맹자의 동양 유가 사상가들 또한 그러한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도덕적(윤리적)이라고 칭할까? 도덕이라는 표현을 한 마디로 정의(定義)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옛 성현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예컨대 공자는 도덕적인 것-물론 예(禮)를 뜻 한다-은 세상의 근원이며, 진실로 사람이 행해야 하는 도리라고 말했다. 따라서 임금 또한 도덕적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했으며, 백성들은 임금에게 도덕적으로 충성해야 했다. 여기서 공자의 정명(正名) 사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로 칭해지는 공자의 도덕 윤리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 다워야 한다”로 표현될 것이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 이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답게’라는 어휘는 상당히 심오하다. ~다워야 한다는 말의 저의는, 예컨대, 임금은 임금이기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임금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뜻과 임금이 아닌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된다. 임금이 신하다워서는 안 되고, 신하가 임금다워서는 안 된다. 자신의 이름(名)을 바르게(正) 해야 한다는 것이 진정한 정명(正名)이다.
이 글에서는 위와 같은 도덕관 혹은 윤리관을 지니고 플라톤에 대해서 생각해보려 한다. 굉장히 상대적으로 되어버린 현대의 도덕관은 복잡하고 세분화된 현대 사회에 잘 스며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하지만 무엇이 아버지답고, 무엇이 아들다운 것일까? 만일 개개인들에 대한 상대성만 존재한다면-극단적 비약이긴 하지만-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것은 누군가에겐 아버지다운 것일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 도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사라지게 된다. 누구에게나 도덕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굉장한 논쟁을 불러올 것이다. 그것이 진정으로 도덕인가? 에 대한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말할 것이고,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상대적일 수 없는가? 그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도덕은 상대적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보편적이기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에는 상반되는 부분이 존재한다. 이성적 부분과 비이성적 부분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상적인 인간은 이성적 부분만, 혹은 비이성적 부분만 존재하는 인간이 아니라, 이성적 부분과 비이성적 부분이 각자 ‘제 기능(ergon)에 맞게’ ‘서로의 부분에 참견하지 않고’ ‘조화를 이룰 때’ 이상적인 개인(혹은 올바른 개인)이 형성된다. 서로의 부분에 참견하고 간섭하지 않지만 조화를 이루는 것-이것이야 말로 이 글에서 밝히고자 하는, ‘보편성 속의 상대성’이다.
2. 왜 플라톤인가?
흔히 보편주의 윤리의 계보는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된다. 소피스트의 상대주의적 정의(正義)관에 반하여, 진리는 절대적이라는 주장을 펼친 것이 소크라테스이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책을 남긴 적이 없다. 오롯이 플라톤 혹은 크세노폰의 저술로 알려질 뿐이다.) 플라톤 또한 그의 제자로서 보편주의 윤리관을 잇는다. 하지만 그가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또 다른 문제이다. 플라톤은 자신의 저술에서 역설(paradox)을 자주 이용한 철학가이다. 예컨대 그의 최대 역작인 『국가』에서 그는 철학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으로 변증법(dialektike)은, 한마디로 나눔과 모음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먼저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계속 질문하고 탐구함으로써 그 대상을 여타의 것으로부터 ‘나눈다.’ 그리고 이후 그 탐구에서 나온 것들을 총체적으로 ‘모은다.’ 그 둘이 적절히 조화되어야지 대상의 본질(이데아)을 알 수 있다. 모음과 나눔은 어떻게 보면 대비되는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은 그것의 대비 이상에 있는 화합을 발견했다. 즉 플라톤은 나눔에 있어서는-일종의 경험, 기능과 같은 것에 있어서는-상대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의 너머에는 그것을 총괄하고, 원리로써 작용하는 근본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본질, 형상(形相) 등으로 번역되는 이데아(idea)이다. 이러한 이데아는 결코 상대적이지 않고 보편적이다. 이것이 이 글의 핵심, 보편성 속의 상대성에 대한 설명이다.
이러한 생각은 기본적으로 플라톤의 철학을 구성한다. 플라톤이 국가의 구성원과 개인의 영혼을 세 부분으로 나눈 것 또한 궁극적으로 하나 된 나라(mia polis), 훌륭한 개인을 구성하기 위함이었다. 각 세 부분의 상대성이 충분히-그리고 훌륭히 보장된 후에야 비로소 하나 된 공동체로서 보편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국민 없는 나라는 존재할 수 없지만, 나라 없는 국민 또한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플라톤의 관점에서 우리는 도덕에 접근해야 한다. 그런데 도덕의 상대성과 플라톤의 보편성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우리는 지금 너무나도 많은 상대성 속에서 살고 있다. 르네상스 이후,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시대는 근대에 들어섰다. 합리주의와 개인에 대한 고찰이 시작되면서, 개인주의가 부각되었고, 이는 분명 근대의 크나큰 발전이다. 신만이 존재하던 세상에 개인이 들어갈 여지가 생긴 것은 정치적으로 물론이고, 경제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진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생겨난 자본주의, 개인주의 등에 의하여 개인은 원자화되어, 더 이상 개인을 묶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고대에는 도덕(혹은 윤리, 철학), 중세에는 신이었으나, 근대인 지금은 개인을 묶을 수 있는 것이 없다. 이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개인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는, 철학을 영혼으로부터 시작했다는 점에서 개인적이면서도, 이것을 국가의 차원으로까지 확장하여 공동체에 대한 논의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전체적인 플라톤의 철학에서 영감을 받을 수 있다. 개인의 존재감이 극도로 거대해진 근대의 행태에-마치 아테네의 ‘등에’처럼-성찰하게끔 하는 긴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3. 플라톤의 철학
플라톤은 그의 대화편인 『국가』에서 국가와 개인을 유비시키고 있다. 이때 플라톤이 이상 국가라고 칭하지는 않았지만, 올바른 국가 내지 아름다운 국가로 표현되는 국가가 존재하는데, 이러한 나라에 플라톤은 ‘하나 된 나라(mia polis)’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이유는, 플라톤이 말하는 나라는 ‘모든 구성원이 제 기능(ergon)을 훌륭히 수행하고, 여타 구성원에게는 참견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조화를 이루는 진정으로 하나 된 나라’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나라란 나라를 구성하는 세 부분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천성에 맞는 일을 하나씩 가지고 그 일을 잘 해내며 상호 간에 침범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433a~e) 나라이다. 이때 계층은 생산자 부류-수호자 부류-(수호자 중에서 특출난) 통치자 부류-의 세 부류로 나뉘는데 각각에 해당하는 천성이 다르므로 그들이 하는 일(기능: ergon)도 다르게 되며, 그 일을 잘하게끔 하는 것 즉 훌륭함(훌륭한 상태: arete)도 다르게 된다.
통치자 부류가 가져야 하는 훌륭함은 지혜이다. 마찬가지로 수호자 계급이 가져야 하는 훌륭함은 용기이다. 그리고 절제는 생산자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들이 가져야 하는 아레테이다. 왜냐하면, 절제라는 의미는 플라톤에게 적도, 균형, 질서 등으로 해석되는데, 이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참된 것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는 것을 지양했다. 따라서 아레테들이 훌륭한 것은 적도와 질서를 따르기 때문이고, 나라가 훌륭하고 올바른 것 또한 피지배 계층과 지배자 계층이 균형과 질서를 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지배 계층(생산자 계층)이 아레테를 지닌다는 것은 더 우월한 계층(통치자 계층)의 통치를 합의한 것이라 볼 수 있으며, 나라의 세 계급 모두에 절제라는 아레테가 존재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리고 이러한 절제, 용기, 지혜의 아레테가 각 구성원에 나타나고, 각 계층이 천성에 부합하는 일에 종사하고 상호 참견하지 않으면서, 절제에 근거한 협업과 균형, 적도로 인해 조화를 이룬다면 비로소 올바름(dikaiosyne)이 나라에 나타나게 된다. 즉 올바름이란 각자가 ‘자기 나라’와 관련된 일 중 천성으로-즉 성향상 가장 적합한 한 가지 일(ergon)에 종사한다는 것을 뜻하며, 그 일을 잘(eu) 해내는 것이 올바름이고, 그런 자들이 국가를 구성하는-예컨대 통치자는 잘 다스리고, 수호자는 잘 지키며, 생산자는 잘 생산하는-나라가 바로 올바른 나라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올바른 나라란 위의 ‘절제’를 설명할 때 말했듯이 양쪽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는 나라이면서, 서로의 분야를 침범하지 않는 나라(433a)이다.
이제 비로소 올바름에 대한 논의가 나타나게 된다. 제 일을 하는 것(to ta hautou prattein)이 실현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상태’(433b)이다. 통치자가 지배를 훌륭히 한다는 것은 수호자나 생산자를 그들이 그들의 천성에 맞는 일(ergon)을 하도록 배치하도록 하며, 궁극적으로 그들을 유익하게끔 한다. 이는 정치를 훌륭히 하는 것(기술은 대상의 유익에 관심을 가지므로)을 뜻하므로, 올바른 상태에 있는 나라의 진정한 통치자들이야말로 자신도 구하고 나라를 구하는 자들이다(417a). 그런데 이런 나라에서의 구성원들(생산자, 수호자)은 통치자의 지배에 반목할 필요도 없으며, 지배로 인해 훌륭하게 되므로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 훌륭한 나라의 행복은 집단 전체의 행복으로 공유되며, 이 나라의 구성원들은 서로의 일(ergon)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되므로 분열과 대립, 반목(stasis)이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나라는 ‘훌륭한 나라’이자 시민 전체의 훌륭함(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나라이며, 남의 것에 참견하지 않고 나의 것이나 남의 것을 ‘공동체의 것’으로 인식하고, 각 계층이 조화(harmonia)를 이루게 되는-단결하는 ‘하나 된 나라(mia polis)’이다. 이러한 논의는 개인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개인의 영혼에도 생산자-수호자-통치자 계층처럼 욕구적-기개적-이성적 부분이 존재하고, 마찬가지로 그들 각각에도 절제-용기-지혜의 아레테가 존재하다. 이때 국가가 지혜로운 통치자 계층에 의해 지배되어야 하는 것처럼, 개인 또한 이성적 부분에 의해서 지배되어야 한다. 그렇게 지혜에 의해 지배되는 개인 또한 올바른 개인이다.
4. 이데아: 모방의 다양성을 포괄하는 본질
플라톤의 철학 중 가장 중요한 개념이 바로 이데아이다. 만물의 본질, ~다움을 뜻하는 개념이다. 예컨대, 우리는 소나무, 잣나무, 대나무 등의 품종을 바라보고 ‘나무’라고 칭한다. 그런데 ‘나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위의 나무들을 ‘나무’라고 부르는 것일까? 나무가 나무이기 위해선 어떤 구성요소, 혹은 본질이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그것을 나무의 이데아라고 칭한다. 이는 만물에 해당된다. 개의 이데아, 인간의 이데아,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없는 용기, 절제, 지혜, 절제, 올바름, 아름다움, 그리고 좋음에도 이데아가 존재한다. 플라톤은 이러한 이데아는 현실계에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좋음의 이데아를 알기 위해선 좋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의 훌륭한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해왔듯이 이러한 본질을 추구하는 행위는 굉장히 형이상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형이상적 논의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플라톤은 생각하는 행위를 굉장히 중요시했다. 즉, 철학하는 삶을 굉장히 강조했다. 당시 아테네인들은 『변론』에서도 언급되듯이 “훌륭한 상태(아레테)에 대해서보다도 재물이나 그 밖의 것에 대해서 먼저 마음을 쓰는” 자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회의 사람들은 소피스트의 상대주의에 혹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개인의 능력을 너무나 맹신하여, 세상을 인간 중심으로만 바라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초월적 영역이 있다. 바로 생각하는 능력, ‘이성’의 존재이다. 플라톤은 이를 ‘신적인 요소’라고 부른다.
따라서 본질을 알려고 하는 것은 오롯이 이성의 역할이다. 현실계에 여러 현상들로 흩어져있는 것들의 본질-이데아를 알려고 할 수 있다. 소나무, 대나무, 잣나무를 통해 ‘나무’란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게 한다. 이것이 이데아의 진정한 이유이다. 이데아라는 보편적 존재는, 현실에서 굉장히 다양하게 나눠진다. 도덕이라고 하는 것도 동일하다. 도덕에 대한 이데아도 존재할 터이다. 예컨대, 선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겸손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등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질문을 통해서도, 선(善)의 이데아, 겸손의 이데아, 양보의 이데아 등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현실계에서 굉장히 다양하게 수행된다. 무엇이 좋음인가에 대한 논의도 동서양, 시기와 상관없이 수없이 많이 존재해왔다. 하지만 ‘좋음’이 훌륭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따라서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그것이 실현되는 방법은 다양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다양하게 실현된 현상을 보고, 그것의 진정한 본질까지 알려고 하는 것, 그리고 이것을 알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이성을 통한 나눔과 모음의 통찰인 것이다.
5. 지금 우리에게는 이성이 있는가?
인간은 신적인 이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이데아를 탐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신적일 뿐, 자연을 무시한다거나 본인의 의견이 진리라는 생각은 결코 신적인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인간적이어서 거부해야 하는 것이다. 잘못된 의견을 지식인양 맹신하며, 진리인양 떠벌리고 다니는 이들은 오류를 저질렀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지식조차 없이 그것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 세태는 점점 보편성에 대한 의구심을 제기하였다. 고대 아테네와 마찬가지로 근대의 ‘개인’들에게 윤리나 도덕은 결코 보편적인 것이 아니었다. 마키아벨리를 거쳐 홉스에 이르게 되면, 정치는 윤리와 아예 분리되어 버린다. 혹자는 이에 마키아벨리를 정치학을 천상에서 지상으로 떨어뜨린 사상가라고 칭한다. 누구나 다 알 수 있었지만,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무엇이 진정으로 이데아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안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에 근거한 오만이다. 내가 아는 진리와 남이 아는 진리가 다르더라도, 그것에 대해 탐구할 기회조차 박탈해갔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말이 모두 옳다고 말하며, 자신의 말에 반박하는 이들에 대한 수많은 공격을 퍼부으며 살아갔다. 이때부터 우리는 ‘정치적이다’라는 말을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부정적 이미지로 인식하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치적이다’라는 단어는 플라톤에게는 일종의 자아실현의 의미였다. 자신을 수양하여 국가의 단위까지 확장시키는 것, 즉 자기 계발의 의미가 컸다. 이는 정치가 윤리와 분리되지 않았음에 가능했을 것이다. 근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자신만을 바라보면서 살고 있다. 하지만 어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 아닐 수 있겠는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을 사회로부터 분리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모순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는 직업적으로도 그리고 존재로서도 굉장히 다양하다. 따라서 자신의-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려면 개인을 사회에서 분리해야 한다-즉 개인마다의 상대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또한 그것이 근대 사상의 경향이었다. 다만, 어쨌든,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김 군이나, 미국에 살아가는 A 양이나, 우리는 개인으로서 묶여 있다. 선생님이든, 학생이든, 자영업자든, 정치인이든, 목사든, 부모든, 자식이든 우리는 모두 ‘인간’이다. 인간이라는 이데아 속에서 우리는 현실적으로 다양한 현상들에 불과하다. 인간만이 지니는 인류애, 감정, 언어, 그리고 이성이 우리 개인들을 인간으로서-인간의 이데아로서 묶고 있음을 증명한다. 우리는 모두 이성을 가진 인간이니까.
근대의 사상들도 이성을 중요시한다. 근대 사상의 선구자라 불리는 임마누엘 칸트 또한 이성을 굉장히 중요시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만큼 포기한 것도 많다. 성찰하는 능력, 탐구하는 능력, 철학하는 능력을 지닌 신적인 이성은 근대에서는 자취를 감추고, 오직 인간적인-물질적인, 이해타산적인 이성만이 존재한다. “너 참 이성적이구나!”라는 말은 감정을 배제하고 계산적인 모습을 보일 때 사용된다. 철학하려는 사람에게 이성적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근대에 들어서 본 적이 없다. 도리어 “쓸 데 없다,” “힘들게 산다,” “부적응자다,” “먹고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등의 표현이 주를 이루는 현실이다. 본질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 쓸 데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먹고사는 게 중요한 일이긴 하다. 그런데 왜 먹어야 되는지, 왜 살아야 되는지 알려 고나 해봤는지 모르겠다. 진정으로 쓸 데 없는 일은, 왜 추구해야 하는지 혹은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일말의 고찰조차 없이 맹목적으로 하는 일이다. 짐승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인간이기에 우월하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전혀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지 못하다. 사라져 버린 신적 이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6. 탐구의 대상은 상대적이고, 탐구의 목표는 보편적이어야 한다
짐승과 인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성의 유무, 존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가능한지 불가능한지에 대한 논의는 필요 없다. 그 과정 자체가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을 이행하는 행위이니 말이다. 그러나 근대의 역설은 정반대이다. 인간의 우월성, 인간의 위대함을 외치는 이들이 정작 정말로 인간이 위대한 점은 무시하니 말이다. 지혜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위대한 점이다. 그것의 대상은 결코 상대적일 수 없다. 다만, 현실에서는 굉장히 다양할 것이다. 따라서 그것에 대해서는 옳고 그름을 확단 내릴 수 없다. 내가 도덕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이상 상대방의 도덕에 대한 인식이 틀렸다고 감히 판정 내릴 수 있겠는가? 대신에 탐구할 수는 있다. 대화할 수는 있다. 그 사람은 왜 그렇게 생각하였고,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생각하였고, 나는 왜 이렇게 생각하였는지에 대한 ‘대화’와 고찰은 가능하다. 이것이야말로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젊은이들에게 했던 것, 그리고 플라톤이 2500년이 지난 우리에게 하려고 하는 것, 변증법에 대한 의미이다.
인간은 똑같은 인간들이 세상에 단 1명도 없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인간들 또한 1명도 없다. 따라서 탐구의 대상은 무궁무진하다. 마치 이데아의 모방이 굉장히 많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탐구의 목표는 단 하나-이데아의 추구이다. 궁극적인 목표는 진리가 되겠지만, 그것에 도달하기란 참으로 쉽지 않다. 아니, 오히려 불가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플라톤도 이를 인식하고 있다. 『국가』 9권에서는 자신이 생각한 이상국가인 올바른 국가는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본(本, paradeigma)’으로만 존재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장장 10권에 걸친 『국가』의 논의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대화편을 통해서 우리가 직접 스스로 ‘대화’하고, ‘본(本)-이데아’가 무엇인지를 탐구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철학하는 것이고, 다양성을 바라보면서 그 너머에 있는 단일성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상대성에 범람된 도덕에 대한 충고이다. 상대성의 물결에서 허우적대는 도덕을, 윤리를 발견해 끌어올려야 한다. 도덕은 보편적이다. 절대적이다. 이데아적이고, 형이상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에 존재하는 우리들-인간들에게 탐구될 때, 그것은 상대성을 지니게 된다. 모음 속의 나눔처럼 말이다.
7. 모순적이지만, 그렇기에 아름다운.
도덕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모두 다 다르다. 따라서 도덕은 굉장히 상대적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도덕에 대한 요구, 생각, 탐구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도덕에 보편성이 없다면 추구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본이 없는 모방은 존재할 수 없다. “도덕이란 무엇이다”에 대한 대답이 제각각으로 나온다는 것은, 결국 “도덕이란 무엇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어딘가에는-아마 초월적 세계(이데아계) 일 것이다-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이 아닌 인간으로는 그 초월적 세계에-이데아를 완벽하게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모순이다. 앎의 대상이지만, 알 수 없다. 도덕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다시금 생각한다면, 알 수 없기 때문에 영원히 그리고 끊임없이 알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이성이야말로 여기에 부합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발전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이 완전해진다는 것은-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며, 아마 그렇게 된다면 그건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신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듯하다. 인간은 모순적이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끊임없이 탐구하고 알아가려고, 완전해지려고 노력한다. 닿을 수 없는 목표지만, 계속 닿으려고 하는 과정 그 자체가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이성적 활동(noesis)이다.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끊임없이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덕에 대한 탐구 또한 마찬가지이다. 도덕의 본질을-절제의 이데아를, 착함의 이데아를, 겸손의 이데아를, 분별의 이데아를-우린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의 이데아는 어디엔가 존재한다. (즉 도덕의 이데아는 보편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도덕적으로 살려고 할 수 있으며, 도덕이 무엇인지에 대해 대화할 수 있고, 철학할 수 있다. (즉 우리들이 인식하는 도덕은 상대적이다.) 도덕은 상대적이기만 해서는 예컨대 실체 없는 콘크리트일 것이다. 알려고 하는 존재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알려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도덕은 상대적이지만, 보편적이기도 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너무나도 도덕에게 상대성만을 강요하는 것 같다. 경제논리에 의해서, 지배논리에 의해서 그러하다. 하지만 도덕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으로 도덕은 상대적일 수 있다. 헛된 상대성의 범람에서 도덕을 구제해야 한다. 보편성이라고 하는 아주 역설적인 그물로 말이다. 도덕에 있어, 보편성 속의 상대성이란 그런 것이다. 이데아적인 측면에서는 보편적이어야 하며, 현실적이고 기능적, 방법적인 측면에서는 상대적이어야 한다. 끊임없이 무엇이 도덕인가에 대한 본질적 탐구와 경험적 고찰이 동시에 필요하다. 보편적인 도덕은 상대성을 지니고 있으며, 상대성을 지니기 때문에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다. 모순적이지만, 그렇기에 도덕은 아름답다.
7월호 <과학기술과 유토피아> 투고글, 그림을 받고 있습니다.
_과학기술의 발전은 유토피아를 실현시키는가?
https://blog.naver.com/changmagazine/222348207818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