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씨 기상일기

by 에반 환 Evan H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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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바람 알림장


“창문을 두드린 건 빗방울일까, 아니면 바람씨일까?”

하린은 숨을 죽인 채 창밖을 바라봤다.

아침부터 창문이 덜컹거리고, 빗방울이 지붕을 후두둑 때리자 이불 끝을 꼭 잡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호우주의보, 등교 지연.”

가슴이 쿵 뛰었다. “오늘… 바람이 화난 걸까?”


부엌에서 할머니가 국을 데우며 말했다.

“하린아, 숨부터 해 볼까? 네 박자, 후—쉬—.”

하린이 따라 하자 참기름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번개 소리도 멀어지는 듯했다.


베란다 화분 잎에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바람이 스치자 방울이 흔들렸다.

그때 솜씨앗 같은 것이 팔랑 떠올라 낮게 속삭였다.

“안녕.”

하린은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금세 사라졌다.


“할머니, 방금 들었어요?”

“바람씨일 거야. 기분이 흔들리는 날엔 꼭 인사하더라.”


잠시 뒤 또 알림이 울렸다. “태풍 북상, 외출 주의.”

하린은 어깨를 웅크렸다.

“학교도 무섭고, 바람도 무서워요.”

“그럴 땐 기록을 해 보자. 이름을 붙이면 두려움이 작아져.”


할머니가 노트를 내밀었다. 표지엔 ‘기상일기’.

하린이 창문을 열자 바람이 슈우― 길게 노래했다.

“오늘의 바람은 ‘창문 닫아 주세요, 화분은 안으로’래요.”

하린은 또박또박 적었다.

[날짜] 큰비 소식. 창문 확인. 화분 이동. 기분: 콩콩두근.


글자를 쓰니 가슴 두근거림이 조금 가라앉았다.


2장. 옥상 관측소 개장


학교가 일찍 끝났다. 비는 잦아들었지만 회색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집에 오니 현관 앞 우산 자루에 메모지가 달려 있었다.

“하린아, 오늘 저녁 관측소 꾸미자. ―할머니”


하린의 가슴이 콩 뛰었다. 무서움보다 설렘이 먼저였다.


저녁이 되자 할머니가 종이상자, 빈 병, 빨래집게, 낡은 나침반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왔다.

“이게 다 뭐예요?”

“우리 관측 장비지. 빈 병은 빗물통, 나침반은 풍향깃 받침, 상자는 기록판.”


노을이 붉게 번진 하늘 아래, 바람에 구름이 길게 늘어졌다.

“깃발이 펄럭이는 것 같아요!”

“좋은 관찰이네. 새로 사지 말고 있는 걸 아껴 쓰자.”

할머니는 낡은 끈으로 풍향깃을 묶었다.


풍향깃이 바람을 받아 천천히 돌았다.

하린은 그 모양을 스케치북에 그리며 날짜를 적었다.

손이 바빠지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빗물통은 여기 두자. 내일 얼만큼 모였는지 재 보자.”

병 목에는 눈금이 그려지고 ‘빗물통 1호’라는 이름표도 붙었다.


밤바람이 살짝 불자 풍향깃이 남서쪽을 가리켰다.

그 순간 솜씨앗 같은 것이 팔랑 날아와 속삭였다.

“후―쉬― 오늘은 남서쪽 길이야.”

하린은 노트에 적었다.

[날짜] 남서풍. 빗물통 설치. 바람씨가 길 안내.


관측소 한쪽에 세운 상자에는 굵은 글씨가 쓰였다.

《바람 알림장》 오늘의 소식: 화분 물 주기, 창문 잠그기, 우산 챙기기.


3장. 바람의 목소리


다음 날 아침, 하린은 눈을 뜨자마자 옥상으로 달려갔다.

밤새 내린 빗물이 병에 반쯤 차 있어 은빛으로 반짝였다.

“와, 진짜 모였네! 어제보다 세 칸이나 올라갔어!”


뒤따라온 할머니가 말했다.

“오늘 날씨는 구름 많음, 빗물 세 칸. 기록해 두자.”

하린은 노트에 또박또박 적었다.

[날짜] 구름 많음. 빗물 3칸.


풍향깃은 북쪽을 향해 서 있었다.

바람이 서늘하게 스쳐 지나갈 때 작은 속삭임이 들렸다.

“후―쉬―바람처럼 천천히! 오늘은 느리게 걷자…”


하린은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 들었어요? 바람씨가 천천히 걷자고 했어요.”

“바람씨가 오늘 우리한테 전한 마음인가 보구나. 서두르지 말라는 거지.”


하린은 미소 지으며 알림 게시판에 새 메모를 붙였다.

《바람씨의 부탁》 오늘은 천천히 걷기.


학교 가는 길에도 하린은 귀를 기울였다.

나무 사이로 바람이 슈우― 노래하고, 전봇대 깃발이 사각사각 흔들렸다.

“오늘의 바람은… 나뭇잎이 춤춘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녁 무렵 다시 옥상에 오른 하린은 풍향깃 옆에 서서 말했다.

“오늘 소식 고마워. 덕분에 덜 급했어.”

바람이 조용히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며 대답처럼 속삭였다.


노트의 빈 칸이 하나둘 채워질수록 두려움은 조금씩 사라졌다.


4장. 태풍의 밤, 세 가지 주문


저녁 뉴스에서 기상 캐스터가 전했다.

“오늘 밤, 태풍 경보가 발효됩니다. 강풍과 폭우가 예상됩니다.”


하린은 저절로 어깨를 움츠렸다.

창밖은 벌써 먹구름이 깔리고 굵은 빗줄기가 창문을 때렸다.

휴대폰 알림창에는 붉은 경보 표시가 깜빡였다.


“할머니… 바람씨가 오늘은 화난 것 같아요.”

하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할머니가 손전등과 수건을 챙기며 말했다.

“괜찮아. 우리가 배운 대로 하면 돼. 기억하지? 세 가지 주문.”

“숨고르기… 기록하기… 할 일 나누기!”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거실 한가운데 앉아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후―쉬―, 네 박자.”

빗소리가 지붕을 두드렸지만 호흡이 조금씩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린은 노트를 펼쳤다.

[날짜] 태풍 경보. 창문 잠금 확인. 풍향: 동남풍. 기분: 두근 반, 걱정 반.


마지막으로 할머니는 문풍지를 붙이고, 하린은 현관 틈새에 수건을 눌러 넣었다.

“이제 우리 집은 준비 끝!”


잠시 뒤 초인종이 울렸다.

2층 분식집 아줌마가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창문이 덜컹거려요. 문풍지가 남을까요?”

할머니는 남은 문풍지를 건네고, 하린은 상자를 문 앞에 받쳐 주었다.


그 순간, 바람이 우우웅― 하고 크게 울었지만 무섭지 않았다.

이웃이 함께하니 태풍도 덜 사나워 보였다.


밤이 깊어지자 빗줄기가 창문을 세차게 때렸다.

하린은 이불 속에서 속삭임을 들었다.

“고마워. 오늘도 길을 지켰어.”


하린은 조용히 웃으며 중얼거렸다.

“내일 아침, 빗물 지도를 보여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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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다음 날의 지도


태풍이 물러난 다음 날 아침, 하린은 창문을 열었다.

밤새 씻긴 하늘이 맑고 파랗게 빛났다.

옥상으로 올라가자 빗물통이 병 목 위까지 가득 차 있었다.


“할머니! 빗물통이 꽉 찼어요!”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어제 우리가 문풍지 붙인 덕분에 물도 안 새고, 빗물도 잘 모였구나.”


하린은 노트에 적었다.

[날짜] 태풍 뒤 맑음. 빗물 가득.


풍향깃은 동쪽을 향해 있었다.

하린은 오늘은 그림을 곁들여 보고 싶어졌다.

노트 옆면에 집과 골목, 옥상과 빗물통을 그리고

물이 고인 자리를 파란색으로 칠했다.

“이건 빗물 지도예요! 여기에 화분 받침을 더 놓으면 흙이 안 흘러내리겠죠.”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야. 오후에 친구들과 해 보자.”


그날 오후, 하린은 학교 친구 둘을 불러왔다.

세 아이는 빗물 지도를 들고 골목을 돌며

물이 고인 곳마다 작은 화분 받침과 돌멩이를 놓아 흙이 쓸리지 않게 했다.


친구 지우가 감탄했다.

“우리 진짜 날씨 박사 같다!”

하린은 웃었다.

“그리고 환경 지킴이!”


관측소 게시판에는 새 메모가 붙었다.

《바람 알림장》 오늘의 소식: 빗물 지도 완성. 흙 보호 성공.


저녁 바람이 살짝 불어와 풍향깃이 은빛 달빛을 반사했다.

하린은 속삭임을 들었다.

“잘했어. 길을 지켜 줘서 고마워.”


6장. 바람씨의 편지


며칠 뒤, 학교 게시판에 하린의 ‘빗물 지도’와

《바람 알림장》 사진이 붙었다.

선생님이 말했다.


“하린이가 관측소에서 바람과 빗물을 기록했대.

우리 반도 작은 실천을 해 볼까?”


아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집에서 전기 아끼기!”

“다 쓴 종이 재활용하기!”

모두 한 가지씩 약속을 적어 오기로 했다.


다음 날, 아이들은 색색의 카드를 가져왔다.

“나는 빈 물병을 꽃병으로 쓰겠어요.”

“나는 매일 나무에 물을 줄 거예요.”

하린은 카드를 모아 달 모양의 큰 판에 붙였다.

아이들은 그것을 ‘바람엽서’라고 불렀다.


저녁이 되어 하린은 바람엽서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달빛이 풍향깃을 은빛으로 물들이고

카드들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부딪히는 소리가 작은 종소리처럼 사각사각 울렸다.


그 순간, 귓가에 속삭임이 들렸다.

“모두의 마음이 모였구나…

두려움도 기록하면 길이 된단다.”


하린은 노트 마지막 줄에 썼다.

[바람씨 편지] 우리가 함께 만든 길은

두려움보다 길고 단단하다.


밤하늘의 달이 구름 사이로 미소 지었다.

하린은 풍향깃 아래에서 손을 흔들며 말했다.

“고마워, 바람씨. 내일도 소식 들려줘.”

하린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제는 두려워도 도망치지 않을 거야. 바람이 불면 또 기록하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