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가 끝난 오후, 준은 집으로 가다 늘 지나치는 빈터 앞에서 멈췄다.
예전엔 작은 공장이 있던 자리였지만 지금은 잡초와 모래만 가득했다. 바람이 풀을 스치며 낮은 소리를 냈다. 그때 들려온 “삐빅… 삐빅…” 낯선 기계음에 준은 귀를 기울였다.
가방을 내려놓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가자 부서진 팔레트 뒤에서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속이 보였다. 먼지투성이 금속 머리와 금 간 렌즈, 팔에는 작은 표지판 하나가 달려 있었다.
GARDENER-3.
“정원사… 로봇?”
준이 중얼거리자 금속 머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다시 “삐빅” 소리가 나더니 약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
배터리… 2%. 식물… 데이터… 요청.”
준은 놀라다 웃음을 터뜨렸다.
“식물? 나도 화분 하나 키워. 물 주는 법은 좀 알아.”
그는 물병을 꺼내 로봇 머리 옆 주입구에 조심스레 몇 방울 흘렸다. 렌즈가 깜빡이며 희미한 불빛이 켜졌다.
“가드너-3… 재가동. 임무: 정원 생성.”
로봇의 팔이 삐걱거리며 들렸다가 멈췄다.
“에러: 씨앗 없음. 토양 데이터 부족.”
준은 빈터를 둘러봤다. 잡초뿐이었지만 마음속에서 콩 하고 울렸다. 아무것도 없는 이곳이지만, 어쩌면 새로운 시작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괜찮아. 씨앗은 내가 구해 올게. 흙도 같이 살펴보자.”
준이 말하자 로봇의 금속 머리가 아주 작게 끄덕였다. 바람이 불어 흙먼지가 일었다 가라앉았다. 텅 빈 땅이었지만 준의 눈에는 작은 길이 열리는 듯 보였다.
준은 로봇의 차가운 몸체를 가볍게 두드렸다. 햇볕을 받아 미세하게 따뜻해진 금속이 느껴졌다.
“가자, 가드너. 우리 둘이 정원을 만들어 보자.”
다음 날 아침, 준은 시장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샀다. 봉투 안에는 금빛 해바라기 씨앗 열 알이 들어 있었다. 들뜬 마음으로 빈터로 달려가자 가드너-3는 여전히 구부정한 자세였지만 전날보다 불빛이 조금 더 밝아져 있었다.
준이 씨앗 봉투를 흔들자 로봇의 렌즈가 반짝였다.
“씨앗… 확인. 식물 성장 알고리즘… 실행.”
로봇의 팔이 삐걱거리며 앞으로 뻗더니 흙을 파기 시작했다. 그러나 삽 모양의 손끝은 흙을 깊이 파거나 한쪽으로만 몰아넣어 구덩이가 들쭉날쭉했다.
“그렇게 하면 씨앗이 숨을 못 쉬어.”
준은 손으로 흙을 고르게 펴 주었다. 그는 할머니가 꽃을 심던 모습을 기억하며 씨앗을 하나씩 조심스레 뿌렸다. 로봇은 그 동작을 데이터로 저장하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새로운 패턴 학습… 저장 완료. 적정 수분 40% 필요.”
준은 물병을 꺼내 씨앗 주변에 천천히 물을 부었다. 로봇도 팔 끝에서 물을 뿜었지만 각도를 맞추지 못해 바닥으로 흘러버렸다. 준은 웃으며 로봇의 팔을 살짝 잡아 방향을 바로잡아 주었다.
“괜찮아, 서툴러도 돼. 우리 같이 배우면 되잖아.”
그 말에 로봇의 렌즈가 한 번 깜빡였다. 그 짧은 빛이 마치 ‘고맙다’는 듯했다. 빈터 한쪽에 작은 흙둑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 씨앗이 나란히 묻혔다. 아직 싹은 없었지만 준은 벌써 초록빛이 솟을 것처럼 설렜다.
며칠 동안 준은 매일 방과 후 빈터를 찾았다. 하지만 싹은 나오지 않았다. 가드너-3는 매번 센서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토양 수분… 70%. 최적치 유지 중.”
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70%면 충분한 거 아니야?” 그는 물을 더 부어 보았다. 그러나 며칠 뒤 씨앗이 있던 자리의 흙이 움푹 꺼져 있었고, 몇 알은 껍질이 터져 썩고 있었다.
“물이… 너무 많았나 봐.”
가드너-3가 짧게 말했다.
“에러: 수분 과다. 데이터 보정 필요.”
두 친구는 물 주는 횟수를 줄였지만 이번에는 흙이 금세 말라 갈라졌다. 며칠째 비가 오지 않아 햇볕에 바싹 말라버린 탓이었다. 남은 씨앗은 꿈쩍하지 않았다.
준은 무릎을 꿇고 마른 흙을 손바닥에 올렸다. 바람이 흩날리는 흙가루가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그냥 물만 준다고 되는 게 아니구나…”
가드너-3의 렌즈가 반짝였다.
“습도·온도·토양 유기질… 결핍 감지. 추가 데이터 수집 필요.”
준은 한숨을 쉬었지만 곧 고개를 들었다.
“그럼 우리가 더 배워야겠네. 책에서 찾아보자!”
로봇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식물 성장… 실패 기록 저장. 다음 단계로 보완 가능.”
며칠 동안 초록 싹은 보이지 않았지만 준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가드너-3를 몰래 집으로 데려와 동네 도서관으로 향했다. 식물 코너에서 두꺼운 책을 펼치자 로봇의 렌즈가 반짝이며 글자를 스캔하기 시작했다.
“발아 조건… 토양 통기성, 배수성 중요. 수분 50~60% 유지.”
“햇빛은 하루 다섯 시간 이상… 아, 이런 건 몰랐네!”
준은 놀라며 노트에 적었다.
그날 저녁 준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 씨앗이 안 자라요. 흙이 자꾸 말라요.”
전화기 너머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흙이 너무 딱딱하면 숨을 못 쉬지. 마른 잎이나 부엽토를 섞어 주고, 씨앗은 얕게 덮어야 해.”
준은 메모를 꾹꾹 눌러 적었다. 가드너-3도 작은 소리로 말했다.
“유기물 추가… 데이터 업데이트 완료.”
다음 날 아침, 준은 낡은 모종삽과 마른 낙엽을 들고 빈터로 갔다. 로봇이 팔을 움직여 흙을 부드럽게 섞자 바삭거리는 낙엽이 흙과 섞이며 촉촉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이번엔 다를 거야.”
준이 웃자 로봇의 불빛이 반짝였다.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된 듯했다. 새 흙과 낙엽을 섞은 둑은 전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준과 가드너-3는 해바라기 씨앗을 다시 뿌리고 얇게 흙을 덮었다. 이번에는 책에서 배운 대로 물을 조금씩만 뿌렸다.
며칠 동안 준은 매일 아침과 오후에 빈터를 찾았다. 가드너-3는 습도 센서를 들고 날씨를 기록했고, 준은 손가락으로 흙의 촉촉함을 확인했다. 둘은 숨은 보물을 찾듯 매일 땅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일주일째 되던 날 아침, 준은 흙 위에서 아주 작은 초록 점 하나를 발견했다.
“싹이다!”
그는 숨을 죽이고 더 가까이 몸을 숙였다. 점처럼 보이던 초록빛은 정말로 가느다란 줄기였다.
가드너-3의 렌즈가 반짝였다.
“새싹 감지. 성장률 0.8센티미터. 광합성 단계 진입.”
로봇의 기계음에도 준은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날엔 초록 줄기가 세 개로 늘었고, 그다음 날엔 다섯 개가 됐다.
바람이 불 때마다 새싹은 함께 흔들리며 작은 춤을 추었다.
“봐, 우리 해냈어!” 준이 말했다.
가드너-3는 팔을 들어 조심스레 흙을 정리했다.
“성장 성공. 데이터 저장 완료. 추가 보호 모드 실행.”
초록 싹이 키를 키우던 어느 날, 일기예보에 태풍 경보가 떴다. 하늘은 아침부터 잔뜩 흐리고 바람이 점점 거세졌다. 준은 학교 수업 내내 창밖만 바라보았다.
“싹들이… 괜찮을까?”
집으로 달려가자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준은 우산도 쓰지 않고 빈터로 뛰었다. 이미 바람은 작은 새싹들을 휘청거리게 하고 있었다. 흙은 빗물에 패여 웅덩이가 생겼고, 몇몇 줄기는 흙 속에 쓰러져 있었다. 준은 손으로 흙을 막아 보려 했지만, 빗물의 힘이 더 거셌다.
그때 가드너-3가 전조등을 반짝이며 앞으로 나섰다.
“긴급 보호 모드 가동.”
로봇은 자신의 낡은 몸을 새싹들 앞에 옮겨 세웠다. 철판 어깨가 방패처럼 비와 바람을 막았다. 바람이 세게 몰아칠 때마다 로봇의 관절이 덜컥거렸지만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조금만 버텨!” 준이 외쳤지만 로봇은 대답 대신 몸을 더 낮춰 싹을 감쌌다.
밤새 태풍은 몰아쳤다. 준은 집에서 창문에 이마를 대고 걱정스레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한밤중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빈터 쪽에서 로봇의 불빛이 희미하게 깜박였다.
다음 날 아침, 비는 멈췄지만 바람은 여전히 거셌다. 준이 달려가 보니 가드너-3의 한쪽 팔은 흙더미에 파묻힌 채로 굳어 있었고, 철판 표면에는 긁힌 자국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가 막아 준 덕분에 대부분의 새싹은 쓰러지지 않고 살아 있었다.
준은 흙투성이 로봇을 꼭 안았다.
“고마워, 가드너. 네 덕분에 새싹들이 무사해.”
로봇의 렌즈가 약하게 빛나며 대답했다.
“식물 보호… 임무 계속.”
태풍이 지난 뒤 빈터에는 흙냄새가 짙게 남아 있었다. 부러진 나뭇가지와 쓰러진 울타리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지만, 해바라기 싹들은 놀라울 만큼 꿋꿋하게 서 있었다.
준과 가드너-3는 흙을 다시 고르고 부러진 지지대를 세웠다.
상처 난 잎을 살살 닦아 주며 매일같이 정성을 쏟았다.시간이 흐르면서 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초록빛은 더 짙어졌다.
그리고 어느 맑은 아침, 해가 떠오르자 가장 키 큰 해바라기 줄기 끝에서 노란 꽃잎이 천천히 펼쳐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반쯤 오므라져 있었지만, 빛을 향해 고개를 드는 모습이 마치 미소 짓는 얼굴 같았다.
“드디어… 꽃이 피었어!” 준의 목소리가 빈터에 울렸다.
가드너-3는 조용히 꽃 앞에 서서 데이터를 기록했다. “개화 단계 진입. 수분량·광량 정상.”
며칠 사이 노란 해바라기가 하나둘 더 피어났다. 바람이 불면 커다란 꽃잎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며 인사하는 듯 살랑거렸다. 잡초뿐이던 빈터가 점점 환해졌다.
동네 어르신들이 산책하다가 걸음을 멈추고 꽃밭을 구경했고, 아이들은 학교 가는 길에 노란 꽃을 보며 웃었다.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던 빈터가 어느새 마을의 작은 정원이 된 것이다.
준은 해바라기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건 우리 둘의 첫 정원이야. 멋지지, 가드너?”
로봇의 렌즈가 반짝이며 짧게 소리를 냈다.
“목표 1단계 완수. 정원 유지 모드 가동.”
해바라기들이 해를 따라 고개를 돌리는 오후, 빈터는 더 이상 빈터가 아니었다.